'조곤조곤'은 책과 영화, 드라마와 노래 속 인상적인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무심코 스치는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거나, 그 말이 전하는 통찰과 질문들을 짚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며칠 전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다 우연히 논쟁 아닌 논쟁을 엿듣게 되었다. 비교적 나이 든 손님 한 분이 요즘 젊은 사람들은 미래를 준비하기 보다는 순간을 즐기며 사는 것 같다고 말했고 보다 젊은 미용사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참지 말고 살자는 분위기가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손님은 의아해 했다. 본인이야 이제 나이가 60이 넘으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지만 젊은 친구들이 그러진 않을 것 같다고. 사실 그녀가 말한 '젊은 사람'에 속하는 나도 궁금하긴 했다. 스치듯 그런 말을 하는 또래 친구들을 보긴 했지만 이게 과연 보편적인 정서일까? 누군가 한번 알아봤으면 좋겠다 싶었다.

개인적인 경우로 한정해서 이야기 하자면 저 말은 부분적으로는 맞다. 물론 오늘 내일 인생이 끝날지도 모르는데 지금 살고 싶은 대로 살자고 진지하게 생각한 적은 없다. 하지만 각종 사회적 재난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나라에서 살다보면 비명횡사는 꽤나 현실적인 일로 다가온다. 죽을 줄 알고 취직을 하거나 대중교통을 타거나 물건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어느 날 뉴스를 보면 그런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사망하는 사건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하다못해 지금 들이마시는 미세먼지조차 신체에 얼마나 큰 악영향을 미칠지 확신할 수 없다. 그야말로 숨만 쉬어도 죽음에 가까워지는 세상이다.

 다큐멘터리 '엔드 게임'

다큐멘터리 '엔드 게임' ⓒ Netflix


언젠가 다가올 반갑지 않은 미래

사는 게 이렇다 보니 생각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자주한다. 보다 정확히는 죽음의 순간이다. 곧 다가올 삶의 마침표를 기다리는 시기. 확실해진 마지막 앞에서 보낼 인고의 시간. 그 때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운이 좋다면 병원에 있을 것이다. 더 큰 행운이 따른다면 아마 집에서 간호를 받고 있을지 모른다. 아마 질병으로 심신은 쇠락하고 누군가의 보조가 없다면 먹고 마시고 거동하는 것 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누구도 그런 미래를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때는 언젠가 다가온다. 그래서 가끔 생각한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금과는 너무도 달라질 나를. 솔직히 아무리 생각해도 품위나 존엄을 떠올리긴 어렵다. 그렇다고 그런 내 모습에 모멸감을 느끼며 인생을 끝내는 것도 답은 아닌 것 같다. 삶에서 가장 공평한 것이 이런 것뿐이라니 인생이 참 야속하다는 생각도 든다.

다큐멘터리 <엔드 게임: 생이 끝나갈 때>에서 의사인 B.J.밀러는 이렇게 말한다. 고통은 틈과 같은 것이다. 꿈꾸던 나와 현실의 내가 다르고, 그래서 사람은 아파한다. 그래서 그 틈을 메울 쐐기 같은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쐐기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수긍하고 변화한 몸을 또 다른 온전한 하나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아마 이렇게만 들으면 말은 쉽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한 밀러는 19살의 나이에 감전으로 한쪽 팔과 두 다리를 잃었다. 그 사고 때문에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돌아왔다. 이런 사람이 저런 말을 하니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그 역시도 자신의 현재 몸과 예전 몸을 비교하지 않게 되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엔드 게임'

다큐멘터리 '엔드 게임' ⓒ Netflix


생이 끝나가는 사람들의 고통

<엔드 게임: 생이 끝나갈 때>는 제목 그대로 삶의 문턱에서 죽음으로 접어드는 사람들과 이들을 돕는 의료진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작품의 주요 화두는 '완화 의료'다. 아마 호스피스라는 표현이 더욱 친숙할 것이다. 흔히들 죽음이 임박한 사람이 받는 의료적 조치와 서비스로 이 개념을 이해한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맞는 것도 아니다. 완화 의료는 치료가 불가능한 말기 질환을 가진 환자들의 고통을 완화하여 남은 삶의 질을 보다 높이는데 주력한다. 질병 치료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체를 잘 살피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래서 완화 의료에는 의사와 간호사뿐만 아니라 사회복지사와 종교인이 함께 한다. 환자는 육체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도 고통을 겪기 때문이다.

처음에 나는 이 다큐멘터리가 완화 의료의 좋은 사례를 소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완화 의료의 전제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인생이 끝날 것을 쉽게 받아들일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겠는가. 영화에 등장하는 이들의 번민과 고뇌는 끊이지 않고 사람들은 각기 다른 결정을 내리거나 혹은 선택지 앞에서 방황한다. 가장 심란했던 사례는 환자 스스로 제대로 된 판단과 의사 표시가 불가능한 경우였다. 이 작품에는 더 이상 딸의 고통을 견딜 수 없어 호스피스를 원하는 엄마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잡아보고자 이를 거부하는 환자의 남편이 등장한다. 어느 누가 옳다고 쉬이 말할 수 있겠는가. 이제는 상황을 수긍하자는 사람도 아직 보낼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도 그 심정이 이해가 간다.

 다큐멘터리 '엔드 게임'

다큐멘터리 '엔드 게임' ⓒ Netflix


죽음도 삶의 일부라면

그래서 <엔드 게임: 생이 끝나갈 때>에 등장한 이들 중 누구도 똑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완치가 불가능함을 받아들이고 호스피스 시설이나 집에서 평온한 끝을 맞이한다. 시설까지 왔으나 상태가 호전될 가능성을 붙들고 다시 화학 요법을 받던 중 사망한 경우도 있다. 어떤 환자는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병실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스스로가 계획한 대로 삶의 마지막을 보낸 사람도 있었고 예상치 못하게 원치 않는 죽음을 맞이한 이들도 있었다. 영화는 이 중 어떤 죽음이 더 낫다고도 말하지 않으며 드라마틱하게 특정한 인물의 고통을 부각하여 비교하지도 않는다. 그저 다양한 생의 마지막 모습들을 관망할 뿐이다.

"죽음도 삶의 일부입니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B.J. 밀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어느 순간에는 더 이상 죽음으로 부터 달아나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든 관계를 맺으라는 뜻으로 한 조언이다. 나는 다른 맥락에서 저 말이 위로로 다가왔다. 인생은 아무리 살아도 예측이라는 것이 불가능 하다. 삶은 권태로울 만큼 단조롭고 반복적이기도 하지만 때로 원치 않는 돌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또한 나이듦과 질병은 한 순간에 내가 전에 겪어보지 못한 삶의 국면으로 나를 몰아 넣을 것이다. 아직도 다가올 처음 겪을 상황들이 많고 나는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알지 못한채 일을 그르칠 것이다.

 다큐멘터리 '엔드 게임'

다큐멘터리 '엔드 게임' ⓒ Netflix


그런데 삶이 이토록 예상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래서 늘 우리가 원하는 최선을 마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일부인 죽음 또한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피할 수 없다면 최소한 우아하고 깔끔하게 생을 마무리 짓는 것은 모두의 욕망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겪어보지 못한 일을 그렇게 잘 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상보다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물론 나를 포함해 앞으로 마주할 다른 사람의 생각치 못한 죽음 앞에서 황망함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필요 이상의 괴로움을 경감시키는 것은 가능하다. 그래서 저 문장을 계속 품고 가고 싶다. 이 또한 변덕스러운 인생의 일부다. 원래 그런 것이다.

엔드 게임: 생이 끝나갈 때 완화 치료 호스피스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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