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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6명의 작가가 입주해 있는 최신시설의 원룸 겸 작업공간
▲ 천안창작촌 총 16명의 작가가 입주해 있는 최신시설의 원룸 겸 작업공간
ⓒ 노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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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을 꿈꾸며 미대에 진학해 자신의 이상을 개척해온 청춘들. 대학에 다니는 동안 숱한 작업을 거치며 예술혼을 불태웠던 시절엔 그나마 꿈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가난과 동의어 격으로 사는 예술인들은 마음껏 작업할 수 있는 공간 하나 갖기도 벅차다. 가슴이 원하는 창작 활동을 지속하려고 해도 현실을 감내할 비빌 언덕 하나쯤 있어야 했다.

지난 6월 천안 광덕산 아래 '천안창작촌'이 생겼다. 예술가 16인이 입주해 왕성하게 작업 활동을 펼치고 있는 레지던스다. 작가들은 약 4.7m 층고에 달하는 쾌적한 개인 작업실을 겸한 최신 시설의 주거공간에 입주했다. 대지면적 약 7,590m²에 달하는 천안창작촌은 개인작업실 외에도 휴게공간, 전시실, 사무실, 웰컴센터 등을 갖췄다.

작가들은 임대료 한 푼 내지 않는다. 무료다. 작가들에겐 천국이나 다름없다. 경제적 부담 없이 최신시설에서 자기만의 작업실을 갖고 마음껏 작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입주 작가인 강유진 서양화가는 "기존 레지던스를 이용해 본 경험이 있는데 이곳은 최신시설을 갖췄을뿐더러 작가들의 특성과 필요성을 잘 알고 지은 것 같다"며 만족스러워했다.

실제 작업실을 둘러보니 영락없이 작업실이 달린 최신 원룸이다. 누구라도 입주하고 싶은 생각이 들겠다. 그렇다면 누가, 왜, 이곳에 예술가들을 위한 건물을 지은 걸까. 16명이 동시에 입주하려면 빌라촌 1개 단지를 짓는 것과 맞먹는 비용이 들어갈 터. 거기에 전시공간, 작가들 커뮤니티 시설과 산책로 등 광활한 대지 위에 알찬 계획들이 들어차 있다.

국민 뮤지컬 <명성황후> 제작자에서 예술가 후원하는 독지가로 

천안창작촌 내 전시실에서 이수문 대표
▲ 이수문 대표 천안창작촌 내 전시실에서 이수문 대표
ⓒ 노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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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창작촌을 건립한 이는 이수문(70)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대표다. 토지 매입부터 건물을 짓고 관리 운영하는 비용까지 모두 사비로 감당하면서 작가들에겐 단지 전기요금만 부담하게 했다. 처음이 아니다. 이 대표는 이미 파주 헤이리에 레지던스를 운영하고 있다.

레지던스란 예술가들에게 입주할 공간을 제공해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쭉 유지하면서 오히려 더 규모를 늘려왔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의 깜짝 이력은 또 있다. 국민 뮤지컬로 불리는 <명성황후> 제작이다. 중1 때부터 연극을 했고 밴드부, 군악대 생활도 했던 이 대표에게 조창걸 한샘 창업자의 자극이 계기가 됐다.

"우리도 세계적인 뮤지컬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주머닛돈을 털어 뮤지컬 본고장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와 미국 브로드웨이 등에서 자료를 수집했지요. 뮤지컬의 제왕 캐머런 매킨토시와 일본 연극계 대부 아사리 게이타를 만나 조언도 들었어요."

조창걸 창업자의 도움을 받아 이문열 작가, 윤호진 연출가와 박칼린 음악감독을 섭외하고 철저히 준비한 후 무대에 올린 뮤지컬 <명성황후>. 이 공연이 처음 무대에 오른 1995년은 공교롭게도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파주 헤이리에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이 있다. 2011년 개관한 사립미술관인데, 여기에 작가들 레지던스를 운영한다. 기수마다 4명씩 총 16명이 작업했거나 현재 하고 있다. 천안창작촌은 두 번째 레지던스며 5기다. 16명이 동시 입주했다.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은 지하 1층, 지상 3층 건물로 총 6개의 대형 전시실이 있다. 흰색 외벽과 투명한 유리가 건물을 감싸고 있어 실내와 외부의 자연이 소통하는 구조이며 아름다운 건축물로 사랑받고 있다. 헤이리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헤이리 안에서 꼭 다녀갈 명소로 꼽기도 한다.

"주변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게 지었어요. 2011년 AIA(미국건축가협회) 건축 디자인상을, 2013년엔 제1회 파주시 건축문화상을 수상했죠. 지명현상설계(지명된 설계업체만 참여시켜 공모하는 설계 방식)로 박진희 건축가가 설계했지요."

"이왕 하는 거 무상 제공해야"

천안창작촌 내 작가들을 위한 전시실.
▲ 전시실 천안창작촌 내 작가들을 위한 전시실.
ⓒ 노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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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표가 레지던스를 짓게 된 연유는 생각보다 열악한 작가들의 현실을 알고 나서부터다.

"국내 미대 졸업자가 연간 2만 명이 넘지만, 졸업 후 약 5년이 지나면 겨우 5%만 전업 작가로 남아요. 벌이가 쉽지 않잖아요. 일할 자리가 많지 않고 작품 판매는 거의 안 되고. 또 작업장 없는 작가가 매우 많아요. 우선 작업장을 제공해주자 싶었죠. 열심히 작업해서 10년쯤 지난 뒤 세계적인 작가가 나오면 좋고 안 나와도 괜찮아요."

진짜 아무 바라는 것이 없어 보였다. 자기 일이 당연한 듯 묵묵히 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저렴하게 임대해도 될 텐데 왜 무상제공 하는지 궁금했다.

"능력과 열정은 있는데 심지어 재료 살 돈이 없는 작가들도 있어요. 경제적 여건 때문에 실력을 발휘할 수 없는 예술인들을 위한 공간이 있어야겠죠? 그래서죠. 이왕 하는 거."

이 대표는 입주작가들 선정 시에도 크게 관여한 게 없다. 30대 중반부터 40대 중반까지라는 기준 정한 거 말고는.

"나머지는 심사위원들에게 맡겼어요. 남자의 경우 대학 졸업하고 군대 갔다 와서, 작업한 지 10년쯤 지나면 이 길을 계속 갈지 말지 매우 갈등해요. 또 그 후 10년쯤 지나면 계속 갈 사람들은 가고 있거든요. 레지던스에선 여러 작가와 교류하게 되고 자신의 위치를 판단할 수 있죠. 또 40대 중반은 20년 이상 계속했던 사람들이니까 작가들이 모여서 고민하고 토론하고 작업하는 장을 마련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작가들이 1년과 2년 중 선택해서 응모하게끔 했다. 그나마 전기요금만 본인 부담을 주었으니 작가들도 당당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절대 대단한 사람 아냐, 지속 가능한 경영 고민할 뿐" 

이 대표가 해온 실천은 재력과 뜻이 있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한 일을 선행이라고 말하지 말고, 자신을 포장하지도 말라고 당부했다.

"한샘과 현대종합목재에서 직장생활을 한 후 레인지 후드 업체 '하츠'를 창업했는데 잘 됐어요. 근데 건강 때문에 의사가 일을 그만두라고 해서 회사를 매각했죠. 파주와 천안 양쪽 토지 매입과 설계건축비 포함하면 이미 140억 정도 들어갔지요. 회사 매각한 돈이에요. 다 쓰고 죽어야지요. 다만 지속가능한 경영을 고민해요. 대를 이어서 하고 싶어서요. 거창한 공익사업이라고 생각 안 해요. 하다 보니 잘 되길 바랄 뿐이고 결과가 좋으면 다행인 거죠."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한사코 손을 내젓는 이 대표다. 그가 가진 앞으로의 계획을 들여다보니 작가들을 위해 고민한 흔적이 그대로 드러났다.

"작가들이 이용할 공동 커뮤니티 공간과 산책로, 미술관을 지을 거예요. 그림을 사고파는 갤러리가 아니라 누구나 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요. 다른 수익성 있는 사업으로 비용을 충당하려고요. 작가들을 귀찮게 하고 싶진 않지만, 지역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도 해나가야겠지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내용과 형식을 달리해 천안아산신문에도 게재했습니다.



태그:#이수문 , #화이트블럭, #천안창작촌, #레지던시, #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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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과 천안 아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소식 교육 문화 생활 소식 등을 전합니다. 지금은 출판 분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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