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틀 포레스트: 여름 가을 편> 포스터.

영화 <리틀 포레스트: 여름 가을 편> 포스터. ⓒ 영화사 진진


모리 준이치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만화를 원작으로 각색했습니다. 같은 원작을 둔 배우 김태리 주연의 한국 영화와 달리, 준이치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는 '여름-가을 편'과 '봄-겨울 편'으로 나뉘어 제작됐고 따로 개봉됐지요. 그 중 '여름-가을 편'에 대해 다뤄보려 합니다. 한국판 대신 2015년도에 나온 일본판을 다루는 것은,  한국판보다 리틀 포레스트 원작이 의도한 바에 좀 더 가까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 '여름-가을 편'을 다루는 이유는 글을 쓰고 있는 이 계절을 언급할 수 있기 때문이고요.

<리틀 포레스트>는 알려진 바와 같이 힐링 영화입니다. 패스트푸드와 스마트폰에 중독돼 살고 마음에 여유따윈 사치인 현대인들에게 안식을 주기 위한 영화죠. 흔한 기획이지만, 의외로 성공하기 매우 어려운 기획이기도 합니다. 논밭과 시냇물만 보여주면 도시에 지친 관객들이 알아서 위로를 받는 것은 아니니까요.

다행히도 모리 준이치의 〈리틀 포레스트〉는 자신이 목표한 바를 충분히 이뤄냅니다. 알려진 대로 줄거리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갈등도 있고 그것이 해소되는 과정도 있긴 하지만 기승전결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주인공은 끊임없이 노동하고 그 노동의 대가를 스스로 거두어 밥을 해 먹는 모습 그 자체를 보여줍니다.

<리틀 포레스트>가 흔한 '힐링 영화'와 다른 지점들

 <리틀 포레스트: 여름 가을 편>의 한 장면.

<리틀 포레스트: 여름 가을 편>의 한 장면. ⓒ 영화사 진진


농사짓고 수확한 걸로 밥 해 먹는 것이 거의 전부인 이 영화가 힐링이 되는 이유는 뭘까요. 아마, '느림' 때문 아닐까요. 우린 늘 무언가에 쫓기거나 뭔가를 쫓아 뛰어다니며 삽니다. 달아나는 버스를 쫓아 있는 힘껏 달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 업무 독촉에 종일 쫓겨다니는 것이 도시인의 일상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한 끼 밥을 위해 짧게는 이틀, 길게는 한 계절을 통째로 쓰는 주인공의 모습은 안식이자 대리만족일 수밖에 없습니다. 밤 조림 하나만 하더라도〈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은 곰이 오나 안 오나 경계하며 일일이 밤을 주운 뒤, 그것을 까고 몇 번을 삶아낸 후, 시럽을 만들고, 술을 넣고 졸여, 깨끗한 병에 밀봉한 뒤, 식혀서, 오래 두고 먹습니다. 편의점에서 간편하게 사 먹을 수 있는 밤조림 하나를 먹기 위해 며칠을 노동하고 또 노동하는 주인공을 보노라면 쫓기는 삶 가운데 놓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당연한 듯 여겼던 먹거리에 스며든 수많은 노동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고요.

촬영과 연출도 대단히 좋습니다. 새참으로 먹을 호두밥 도시락 하나를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20분을 할애하는 각본이 지루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이야기가 담고자 하는 느림의 미학을 간직하면서도 관객의 집중도를 꾸준히 지켜내는 영민한 촬영의 덕이 컸습니다. 종종 등장하는 들판이나 하늘의 정지 화면에 대한 칭찬도 덧붙이고 싶습니다.

가끔 고정된 카메라로 농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쇼트가 등장하는데 그 청량감이 상당히 큽니다. 손바닥만한 스마트폰 안에서는 단 1분 안에도 엄청난 양의 정보들이 쏟아지는데, 무한한 공간을 품은 대지와 하늘엔 그저 풀포기의 살랑이는 움직임 정도의 데이터만 있으니 아이러니하죠. 스마트폰은 분명 편리하고 유용한 도구이지만, 가끔은 스마트폰의 수많은 정보가 없는 자연스러운 화면이 위안이 되는 시대가 왔습니다.

'그래봤자 힐링 시네마', 또 다른 '착한 영화'에 불과하겠거니 생각하는 분들이 분명 계실 법 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의외로 CG 활용이 많습니다. 주인공은 의외로 '성깔' 있고요. '모성을 품은 대지가 농사꾼에게 한없는 식량을 주는' 류의 이야기도 아니에요. 주인공의 땅은 고구마를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고,토마토는 장마철을 견디지 못하고 물러버리거든요.

하시모토 아이의 연기, 표정마저 흥미롭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여름-가을 편>의 한 장면.

영화 <리틀 포레스트: 여름-가을 편>의 한 장면. ⓒ 영화사 진진


전원 생활의 판타지만을 다룬 말랑한 영화는 절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날것 그대로만을 취급하는 영화도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겠다는 목표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가끔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는' 영화가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리틀 포레스트〉는 '힐링 시네마'로서의 역할을 하면서도 '사실적 묘사'를 놓치지 않은, '사실적 묘사'를 하면서도 지나친 사실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은 영화입니다.

영화가 어느 한 극단으로 빠지지 않은 데엔 이치코 역을 맡은 배우 하시모토 아이의 역할이 지대했습니다. 일단 역할에 대단히 잘 어울립니다. 성인이 된 현재와 교복 차림의 과거가 번갈아 묘사되는데 어른일 땐 어른처럼 보이고 교복 차림을 하면 정말 10대처럼 보입니다. 도시에서 살 때 모습이 한 번 묘사되는데 그 땐 진짜 도시 사람처럼 보입니다. 연기도 대단히 훌륭한데, 마을의 아낙들과 말린 고구마를 구워 먹는 장면에서 한 번 활짝 웃는 것 빼곤 두 시간 내내 거의 무표정임에도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푹푹 찌는 날씨에 냉장한 토마토를 먹으며 "살 것 같아"라는 대사를 내뱉는 장면을 얼굴 만면에 기쁨을 가득 품은 표정으로 연기했다면 아주 촌스러운 귀농 판타지물이 됐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우스터 소스'를 우리 엄마가 개발한 게 아니란 사실을 알아버린 순간의 당혹스런 감정을 '불쾌감' 따위로 잘못 해석했다면 영화는 뻔해졌을 겁니다.

하시모토 아이는 농기구나 조리 도구를 다루는 솜씨도 상당해 보입니다. 주인공이 노동하는 장면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리틀 포레스트> 각본의 특성상 이 모습 또한 작품의 큰 즐거움이 됩니다. 마치 도토리를 입 안에 모아 담는 다람쥐의 행동을 가만 지켜보는 것과 비슷한 즐거움이라고 할까요. 영화 <철의 여인>에서 메릴 스트립의 '분장'을 두고 "분장마저 연기가 된다"는 평가가 나왔듯, 이 영화 역시 '연기'라고 부를 수 있는 지점이 어디까지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리틀 포레스트>는 영민한 각본과 치밀한 카메라, 극에 중심을 잡아주는 주연 배우의 연기로 만든 높은 완성도의 오락 영화입니다. 도시에서 놓치는 것들을 톺아볼 수 있게 해 주는 점도 좋습니다. 영화 속 귀농 청년들에게 촌마을 코모리란 '도망칠 곳'이자 '안길 품'입니다. 도시의 우리에게도 필요한 공간이죠. 당장 짐 싸들고 시골로 내려가긴 어렵더라도, 도시의 우리에게도 그런 공간은 필요할 겁니다.

리틀포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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