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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톤이라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 마술사가 그의 직업이다. 그런데 시작부터 그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퍼먹으며 투덜거린다. 오늘은 그의 생일이다.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단단해서 숟가락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며 생일을 자축하는 마술사. 그가 안톤이다.

그는 '까탈레나'다. 성격이 유별나게 까탈스럽다. 식당에서 주문할 때 그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돈가스가 먹고 싶기는 한데, 같이 나오는 감자튀김을 웨지 감자로 바꿔 달라고 오랫동안 실랑이를 벌인다. 뒤에 사람들이 죽 줄지어 서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 결국 웨지 감자를 포기하지만, 대신 그는 주문을 바꾼다.

"그럼, 돈가스는 취소하고 햄 치즈 샐러드로 주세요. 대신 햄은 빼고 치즈는 산양 치즈로." (68쪽)

먼 거리를 운전하여 찾아간 양로원에서는 공연 예약 취소를 통보받는다. 게다가 그들은 먼 거리에서 찾아오는 마술사에게 줄 저녁 식사조차 준비하지 않았다. 호텔 미니바의 땅콩이나 먹으려고 하는데 그것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먹다 보니, 싫어하는 크런치 스타일이다.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건다.

이거, 먹다 보니까, 크런치 스타일이네요. 전 알러지가 있어서 이런 거 먹으면 안 됩니다. 환불해 주세요. 호텔 직원은 거의 빈 땅콩 봉지를 쳐다보고 한마디 한다. 거의 다 드셨네요. 이제 안톤은 열이 오를 대로 오른다. 아니, 알러지 있는 사람에게 위험한 음식을 먹이고 뭐가 어째요?

열 받은 안톤은 그 자리에서 호텔을 박차고 나와 야간 운전으로 집에 돌아가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에서 날아온 빨간 소파를 피하다가 길 옆으로 차가 처박히고 만다. 차는 움직이지 않고, 도움을 구하기 위해 터벅거리며 걷는 그 앞에 한 소녀가 나타난다. 그리고는 그에게 일곱 가지 꽃을 꺾어 달라고 한다. 하루 종일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가 이제 교통사고로 차까지 망가졌는데 뭐라고라?

"일곱 가지 꽃을 꺾어야 하는데, 정말로 안 도와줄 거예요?"
"그래 안 도와줄 거야." (35-36쪽)

안톤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리고 이제 기나긴 고난의 시험이 시작된다.

매혹적인 모험담

<마법을 믿지 않는 마술사 안톤 씨> 표지
 <마법을 믿지 않는 마술사 안톤 씨> 표지
ⓒ 북로그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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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오프닝이라면, 훌륭한 편이기는 해도 독보적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안톤은 숲속 마을에서 만난 노부부에게 그 소녀가 사실은 요정이며, 요정의 부탁을 거절해서 크나큰 저주에 걸렸다는 설명을 듣는다. 그러나 그런 걸 믿을 안톤이 아니다. <마법을 믿지 않는 마술사 안톤 씨>가 제목이기는 하지만, 밥벌이가 마술인 사람이야말로 마법을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안톤은 어떻게든 집에 가려다가 오히려 봉변을 당한다. 아주 묘한 순간에 화장실 문이 열리지 않는 바람에, 소아 성범죄자로 몰린다. 이 정도까지 몰리고 나니 저주가 진짜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안톤은 다시 노부부를 찾아온다. 어떻게 해야 하죠?

소설은 마법의 숲에서 벌어지는 안톤 씨의 모험을 다룬다
 소설은 마법의 숲에서 벌어지는 안톤 씨의 모험을 다룬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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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이야기는 현대판 <오디세이아>라고 할 만하다. 세 가지 과제, 흥미로운 인물들, 기묘한 사건,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안톤의 개인사까지, 아주 잘 버무려진 샐러드 같은 느낌이다. 서로 잘 어울려 있기는 하지만 정체성을 잃고 뭉뚱그려지는 대신 재료들이 모두 신선하게 살아있다.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려다 도둑으로 몰린 그는, 진짜 도둑인 요르마의 협박으로 공범이 된다. 그런데 요르마라는 인물은 도저히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훔친 물건이라고는 과자 부스러기뿐이고, 사랑의 퀘스트를 수행 중이라는 이해 못 할 말을 한다. 게다가 숲속에서 노숙이라니. 그런데도 저주에서 벗어나야 하는 안톤은 기행으로 똘똘 뭉친 요르마의 참견을 받아준다.

안톤은 계속해서 과거를 회상한다. 자신을 배신하고 인기 마술사가 된 세바스티안과 샬로타에 대한 원망, 그리고 요양원이나 전전하며 싸구려 공연으로 먹고사는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 그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자신에게 강요된 불행이라 생각하는 안톤의 입장과는 다른 진실이 조금씩 드러난다. 이별을 선언한 것은 샬로타가 아니고 안톤이었다. 세바스티안이 배신한 것이 아니고, 안톤이 마술 공연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세바스티안은 자신만의 길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과거에 대한 회한과 싸우는 동시에 안톤은 세 가지 과제를 하나씩 해결한다. 첫 번째 과제인 까다로운 노파의 심부름 정도는 나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의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고 배은망덕하기까지 한 커플을 도와줘야 하는 두 번째 과제는, 보는 내가 괴롭다. 하지만 세 번째 과제만 하랴. 가장 간단할 거라는 도우미 노부부의 말과는 달리, 이 과제는 그의 생명을 위협한다.

이 숲의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외부인을 눈물 신에게 제물로 바쳐 숲의 평화를 지킨다. 투덜대고 이기적이며 자기 연민에 빠진 그런 사람만 골라서 말이다. 실종되어도 아무도 걱정하지 않을 그런 사람을. 노부부는 과제를 위장해서 눈물 신에게 자신을 제물로 보낸 것이다.

눈물 신과의 사투 와중에, 우여곡절 끝에 세 번째 과제를 함께하게 된 요르마를 보고 안톤은 생각한다. 나보다 더 형편없는 인생을 사는 요르마를 희생하면 되지 않을까?

모든 훌륭한 소설은 성장소설이다

숲의 여왕인 변덕 신의 겉모습은 암회색 고양이다.
 숲의 여왕인 변덕 신의 겉모습은 암회색 고양이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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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운명의 밤이 지나갔다. 노부부는 살아 돌아온 안톤을 보고 놀란다. 그는 요르마를 희생양으로 삼지도, 스스로 눈물 신의 먹이가 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눈물 신을 물리치고 숲의 평화를 지켜냈다.

그는 큰돈을 벌 기회를 포기하고 '영원의 얼음'을 요르마에게 준다. 슈퍼스타가 된 옛 동료 세바스티안을 수십 년 만에 찾아가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건넨다. 식당에 들러 다시금 까탈스러운 주문을 하려다가 그냥 메뉴에 있는 요리를 주문한다. 주문한 요리는 형편없는 맛이었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는다. 집 앞에 도착해서는, 짐을 못 찾아 애를 먹고 있는 새 이웃, 사가를 만난다. 그리고 자신의 안전 영역을 벗어나 그녀에게 말을 건다.

그래도 너무 쉽게 해피 엔딩에 다가가는 것은 성에 차지 않는지, 저자는 마지막 순간에 이야기를 한 번 비튼다. 커튼 다는 데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가에게 안톤은 3층의 농구선수를 찾아가 보라고 한다. 이 대목을 읽는 독자들이 아쉬움에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자기 집에 들어갔다가 뭔가를 깨달은 안톤. 다시 내려오니, 사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당연히 커튼 다는 것도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원하신다면."
그녀가 우산을 살짝 들어 나를 보았다.
"안 그래도, 더 확실하게 티를 냈어야 했나, 생각했어요."
"미안해요. 하지만 이렇게 알아차리고 다시 왔잖아요. 설마 3층 농구 선수한테 벌써 부탁한 건 아니죠?" (445쪽)

한밤중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유발했던 빨간 소파는 그녀의 이삿짐이었다. 이토록 단순한 작은 장치가 수미쌍관의 마법까지 부린다. 마법을 믿지 않는 나에게 <마법을 믿지 않는 마술사 안톤 씨>는 마법과 같은 소설이었다.

모든 훌륭한 소설은 성장소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흥미로운 모험담이 그저 한갓 에피소드로 끝나고, 주인공이 그저 일상으로 회귀하는 소설이 얼마나 많은가? 별로 흥미롭지도 스릴 넘치지도 않은 모험 뒤에 어울리지 않게 과도한 보상을 받고 '행복하게 잘 먹고 잘사는' 주인공은 또 얼마나 많단 말인가. 안톤의 모험과 성장은 <데미안>의 싱클레어나 <왕의 모든 신하들>의 잭 버든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다.

길고 험난한 퀘스트의 경험치는 안톤 씨를 레벨업시켰다. 그는 이제 세상과 화해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도 더 따뜻해질 수 있지 않을까. 과거는 이제 더 이상 그를 옭아매지 않을 것이다.


마법을 믿지 않는 마술사 안톤 씨

라르스 바사 요한손 지음, 배명자 옮김, 북로그컴퍼니(2018)


태그:#라르스 바사 요한손, #<마법을 믿지 않는 마술사 안톤 씨>, #퀘스트, #고전, #성장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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