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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관장 박명림 교수)은 8월 17일 김대중의 민주당 입당성명서를 최초 공개한 데 이어 18일에는 1955년 6월 15일에 작성된 김대중의 신문 기고문 '신당운동은 왜 좌절했나'를 최초로 공개한다.

이 자료는 김대중이 언론에 게재된 1950년대 자신의 기고문을 직접 스크랩한 노트에 있다. 이 노트에는 1950년대 김대중의 기고문 수십 편이 스크랩돼 있는데, 현재 시점에서 보면 대부분 미공개 자료다. 왜냐하면 <동아일보>와 <사상계> 등 오랜 기간 명맥이 유지된 언론에 실린 기고문은 나중에 알려졌지만, 훗날 폐간되면서 사라진 매체에 기고글은 시간이 지나면서 잊혔기 때문이다.

1950년대에 김대중은 시사평론가로서 명성을 쌓았고 신문과 시사잡지 등에 많은 글을 기고했다. 잡지에 실린 글들은 이 스크랩북에 있지 않아도 헌책방 등 당시 잡지에 남아 있는 경우가 있어 상당 부분 확인이 가능하다.

그런데 폐간된 신문 자료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만약 그 당시에 김대중이 스크랩해놓지 않았다면 이 자료들은 사장됐을 것이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당시 자료를 남길 생각을 한 것 자체가 매우 놀랍기도 하다. 이는 생전에 꼼꼼하면서도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졌던 김대중의 모습을 청년 시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스크랩북에 있는 여러 기고문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청년 김대중의 정치관과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이 자료는 김대중 정치 사상의 기원을 해명하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학문적 함의가 있다. 그리고 오늘 공개할 '신당운동은 왜 좌절했나'라는 기고문은 1955년 민주당이 탄생할 즈음의 김대중의 정치관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다만, 아쉽게도 이 기고문의 경우 김대중이 스크랩할 당시 신문의 제호(題號) 부분은 넣지 않아 매체 이름을 알 수 없다. 이런 경우가 더 있어서 이 노트에 수록된 몇몇 자료의 경우 수록된 매체명을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아쉬운 지점이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인 내용 분석을 하도록 하겠다.

1955년 김대중의 기고문 '신당운동은 왜 좌절했나'
 1955년 김대중의 기고문 '신당운동은 왜 좌절했나'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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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운동'은 무엇이고 왜 '좌절'이라고 표현했을까?

이 기고문의 제목은 '신당운동은 왜 좌절했나'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나오는 '신당운동'은 무엇이고 '좌절'의 내용은 무엇인가? 김대중은 1955년 6월에 왜 이런 글을 썼으며 그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하고, 이것의 현재적 의미를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먼저 당시 김대중의 글을 인용해보도록 하자.

3월 25일의 호동총회(護同總会)에서 종래의 당촉진십팔인위원회가 해체되고 연이어 문호개방 원칙을 말살함으로써 신당운동은 이제 완전히 그 방향을 바꾸고 말었으며 종래 운위되든 반공 반비민주의 전 야당 세력의 연합체로서의 기치는 깨끗이 거더치워지고 소위 자유민주파 중심의 보수세력만의 극히 협소한 정당으로 일대 변질을 하여버린 것이다. … 신당운동의 오늘의 참담한 실패를 보고 일편 경악하고 일방으로 과연 그와 같은 실패의 원인이 무엇이겠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당운동은 1954년 11월 사사오입 개헌 이후 갈수록 악화돼 가는 이승만 독재에 맞서기 위해 나타났던 범야권 단일야당 결성운동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당시 사사오입개헌에 반대한 61명의 의원들은 '호헌동지회(아래 호동)'라는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했으며, 호동은 신당 창당을 위한 '신당결성촉진위원회(아래 신당촉진위)'의 사령탑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이 글을 보면 김대중은 신당운동이 실패했다고 규정하면서 매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면 김대중은 왜 이러한 반응을 보였을까? 이것은 신당운동 과정에서 조봉암의 참여가 불가능해진 상황과 관련이 있다. 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조봉암과 함께 단일 정당을 만들고자 했던 청년 김대중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던 조봉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던 조봉암.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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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촉진위는 1954년 12월 14일 신당의 이념과 지향점을 '반공과 반독재' 두 가지로 제시했었다. 전쟁 직후 '반공'은 기본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반독재'를 '반공'과 함께 강조한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우선 '반이승만'을 의미하는 '반독재'를 '반공'과 함께 강조함으로써 야당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강조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반독재' 원칙을 통해서 조봉암을 비롯한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혁신진보 세력에 대한 연합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신당운동 과정에서 조봉암의 참여를 찬성한 쪽은 민주대동파, 반대한 쪽은 자유민주파로 구분됐다. 민주대동파는 조봉암이 '반공과 반독재' 두 가지 원칙에 모두 부합하니 연합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자유민주파는 조봉암에 대한 색깔론을 제기하면서 조봉암과의 연대는 '반공'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1955년 초부터 신당운동 진영 내에서는 조봉암과의 연대 여부로 큰 논쟁이 발생하게 됐다. 1955년 2월 22일 조봉암은 신당에 참여할 의사를 밝혔는데, 자유민주파는 3월 초부터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내세우면서 조봉암을 사회주의세력이라고 하는 등 색깔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당시 자유민주파의 조봉암 반대 논리는 근거가 없었다. 조봉암은 1946년에 조선공산당과 공개적으로 결별하고 정부 수립 후 이승만 정부에서 초대 농림부 장관을 했으므로 조봉암에 대한 당시 자유민주파의 문제제기는 전형적인 메카시즘적 공세였다.

그런데 자유민주파는 중심 인물과 조직력 등에서 민주대동파보다 더 강했고, 정치적 기획력도 민주대동파보다 우월했다. 자유민주파에는 훗날 민주당 구파와 신파의 영수가 되는 조병옥, 장면이 있었고 김준연 등 당시 야권의 중량급 인사가 여럿 있었다. 이에 반해 민주대동파의 중심 인물은 서상일, 신도성, 장택상 등이었는데 조직 역량이 약했다. 김대중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와 같은 자유민주파의 강력하고 능숙한 공세에 대항해서 신당발기 당초의 노선을 견지하여서 국민의 여망에 상응하는 일대야당을 형성함으로써 여당에 비견하여 명년의 대통령선거에 건곤일척의 싸움을 거러브려든 소위 민주대동파의 결속과 전략이란 너무도 징약하고 또 졸렬하기 짝이 없었된 것이다.

그들은 각기 인기주의적 개인 푸래이에만 급급하여서 "결속된 세력에는 결속으로" "교묘한 전략에는 역시 치밀한 전법으로" 대항할 줄을 모름으로써 결국은 절대적인 민중의 지지와 호동다수의 의원의 동조와 신당운동의 정통파라는 명분까지를 독점하는 극히 유리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거월 25일 총회에서는 자유민주파가 신당지정의 책임을 18인위원회에다 들려 싸우고 이에 대치하여 자파 집중의 9인위원회를 선출하는 것을 막어내지 못하였으니 얼마나 무능과 졸렬을 극했든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결과 1955년 4월 1일 호동 총회에서 조봉암의 배제가 확정되면서 자유민주파가 승리하게 된 것이다. 당시 중앙정계 진출을 모색하던 청년 김대중은 민주대동파와 인식을 같이하고 있었으며, 자유민주파의 극우적 속성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들(자유민주파를 의미함, 필자주)이 수다(數多)한 관제공산당을 만들러가면서까지 일절의 진보적인 세력을 혐오하고 말살하려고들든 본질적으로 극우보수파였든 것만은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
그러나 날이 가고 좀 냉정하게 사태를 검토하고 보니 그들이 지금 손잡고 있는 것이 결코 그들의 진정한 동지가 아니요 사실은 이 대통령보다도 더욱 경원해야 할 소위 진보세력이였든 것이다. …  그들은 일단 자신들이 반대하는 사람은 모다 사회주의자며 제3세력으로 몰려고 들뿐 아니라 심지어는 공산당의 사촌이라고까지 위협해댔든 것이다.

1955년 9월, 신생 민주당에 실망했던 김대중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사진은 청년 시절 모습.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사진은 청년 시절 모습.
ⓒ 더불어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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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은 자유민주파가 반공을 명분으로 진보세력을 사갈시 하는 극우적 속성을 갖고 있다고 인식했다. 그래서 반이승만보다 반공을 이유로 반진보, 반조봉암 성향을 보일 것이라고 예단하기도 했다. 실제 이와 같은 김대중의 진단은 정확했다.

1956년 대선에서 신익희 후보의 급서로 결과적으로 대선후보를 내지 못했던 민주당은 또 다른 야권의 대선후보였던 조봉암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선 이후부터 본격화된 조봉암에 대한 탄압에 대해서도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와 같은 김대중의 인식을 보면, 김대중은 1955년 9월 19일 창당된 민주당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신당운동의 좌절은 결국 민주대동파의 실패를 뜻하는 것이었고, 이것의 결과인 1955년 9월 민주당 창당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대중은 당시에 바로 민주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김대중이 1956년 9월 민주당 입당 전까지 했던 것은 민주당 이외의 대안 야당 건설운동이었다. 김대중은 1955년 11월부터 가시화된 새로운 야당 운동에 참여했다. 그래서 가칭 민정당(民政黨)을 거쳐 1956년 3월 30일 창당된 공화당에 참여했다.

그러나 족청계와 비족청계의 극심한 내분으로 비족청계였던 김대중은 4월에 비족청계의 대거 탈당 당시 함께 공화당을 탈당, 무소속 상태로 있다가 5월 대선에는 민주당의 장면 부통령 후보를 지지했다.

그리고 김대중은 이 시기 친구 최서면의 소개로 장면을 알게 됐고, 대선 직후인 1956년 6월 2일(7월 2일이라는 설도 있음)에 장면을 대부로 해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 해 9월 25일에 민주당에 입당해 장면을 영수로 하는 민주당 신파 소속 정치인이 된 것이다.

김대중, 민주당 변화시켜 중도진보 정당으로 재탄생케 하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사진은 6대 국회의원 시절 대정부 발언을 하고 있는 모습.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사진은 6대 국회의원 시절 대정부 발언을 하고 있는 모습.
ⓒ 더불어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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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김대중의 인식과 활동은 훗날 군사 독재 정권 시절 김대중이 민주당과 재야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 때 나온 정치노선의 성격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김대중은 혁신계에 대한 탄압을 반대했으며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혁신 세력이 제대로 존재할 때 공산주의 세력의 침투를 막을 수 있다고 봤다.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자유민주주의 안에서 이해하고 수용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김대중은 1960년대와 1972년 유신 선포 전까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야당의 체질직 보수성, 현실안위적 태도, 정책 대신 정략만을 강조하는 풍조 등에 대해 비판했다. 김대중이 1963년 6대 국회에 등원한 이후 독자적으로 만든 '내외문제연구소'를 통해 정책 개발에 힘을 쏟은 것은 당시로는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반공주의'를 통해 야당과 재야운동 세력의 민주화 투쟁을 근본적으로 무력화시키려는 군사 독재 정권의 여러 공작에 맞서 투쟁한 김대중의 실천방식도 1955년 기고문을 통해서 유추해볼 수 있다. 또한 제도권 야당과 재야운동 세력 사이의 연합을 강조한 김대중의 민주화 이행 전략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렇듯 이 기고문은 현 시점에서 볼 때에도 여러 가지 역사적·정치적 함의를 준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기고문을 통해 보면, 1956년 9월에 입당한 당시 민주당은 1955년 신당운동과정에서 김대중이 구상하고 동참했던 그 정당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면 김대중은 자신이 민주당에 입당한 이후 민주당의 정치 리더로 성장해가면서 자신이 원래 구상했던 방식의 정당으로 변화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전 기사] [최초공개] 청년 김대중의 민주당 입당 성명서

다음은 김대중의 '신당운동은 왜 좌절했나' 전문이다.

<신당운동은 왜 좌절했나>

1955년 6월 15일

3월 25일의 호동총회(護同總会)에서 종래의 당촉진십팔인위원회가 해체되고 연이어 문호개방 원칙을 말살함으로써 신당운동은 이제 완전히 그 방향을 바꾸고 말었으며 종래 운위되든 반공 반비민주의 전 야당 세력의 연합체로서의 기치는 깨끗이 거더치워지고 소위 자유민주파 중심의 보수세력만의 극히 협소한 정당으로 일대 변질을 하여버린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는 여야를 막론하고 비록 그 심중의 소원한 바에의 차이는 없을망정 너무도 상상외의 사실인 것이며 그토록 전 국민의 주시와 다수 민중의 호응 속에 추진되여 왔고 누구나 그 성공을 믿어서 의심치 않든 신당운동의 오늘의 참담한 실패를 보고 일편 경악하고 일방으로 과연 그와 같은 실패의 원인이 무엇이겠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신당 좌절의 원인을 항간에서는 죽산(竹山) 포섭에 대한 시비 다시 말하면 자유민주주의냐 사회주의냐의 이념의 대립에 있었든 것으로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는 결코 신당 실패의 원인을 옳게 파악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사실이지 신당발기 당초에 문호개방 원칙이 제기되었을 때 자유민주파에서도 ☐☐를 말하지 않었던 것이며 특히 작년 12월 26일에 있었든 촉진위원회 석상에서 죽산은 물론 족청파까지도 신당의 사대원칙을 지지만 한다면 받어드리기로 결정이 되었고 이에 대해서는 지금 죽산 ☐☐의 최선봉인 조병옥(趙炳玉)씨 자신도 권수찬성(拳手贊成)하였든 것이라 한다.

일방 자유민주주의 대 사회주의 운운의 시비에 대해서도 신당이 지향하는 "사회정의에 입각한 수탈없는 경제체제의 수립"이란 것은 그 표현이 추상적이여서 이의 연석(聯釈)이 구구(区区)할 수도 있겠지마는 그 신당간계자(新党干係者)들의 구체적인 주석에 의해서 이것이 결코 현 단계에 있어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19세기적 고전적 자본주의도 아니라는 것이 해명됨으로써 다시 말하면 사회정의나 자유당이 주장하는 노동자 농민본위의 경제체제나 혹은 자유민주파의 거두인 조병옥씨나 김준연(金俊淵)씨가 소원하는 민국당의 "중요기업의 국영 노동자 본위의 입법 급(及) 사회정의 현실"을 주장하는 정책보다 못하면 못했지 결코 그 이상의 좌경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명백해졌든 것이다. 따라서 호동총회에서도 이의없이 통과를 보았고 또 민주당에서도 신당의 취지는 물론 그가 지향하는 4대원칙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성명까지 발표하기에 이르렀든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들의 자유의사로써 결정한 문호개방과 신당의 방향이 ☐☐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것이 번복되여서 소위 죽산 배격 사회주의 배척 등의 구실로써 신당운동의 좌절을 갖어오게 되었음은 지금까지 운위되어온 피상적인 이유만으로서는 국민이 납득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이면에 개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여하간 종래의 신당운동을 계승한 것 같은 외양하에 9인위원회가 움직이고 있는 이 시기에 있어서 너무 그 깊은 이면을 운위하는 것은 도의상 취할 바가 못될 것임으로 여기서는 극히 기본적인 원인만을 객관적 입장에서 간단히 적기하여 보려고 하는 바이다.

신당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을 분석할 때 두 가지로 이를 나누어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는 기본적인 정치이념의 상위로 이대통령에 반대하는 층과 하나는 정치이념의 상위보다도 권력의 분배가 자기 뜻대로 되지지 않으니까 이대통령를 반대하는 층의 둘로 나누어볼 수 있는 것이다. 전부가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마는 전자가 주로 민주대동파를 형성하는 사람들이고 후자가 소위 자유민주파의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민주파의 정치적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 그들이 집권하든 군정 당시의 행동을 검토해볼 때 그들이 철저한 반공투쟁의 일익으로써 큰 공헌을 하여왔음은 누구나 시인하는 바이나 반면에 그들이 수다(數多)한 관제공산당을 만들러가면서까지 일절의 진보적인 세력을 혐오하고 말살하려고들든 본질적으로 극우보수파였든 것만은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정치적 성격이 결코 변질된 것은 아니였지마는 대한민국 수립 이후 이대통령로부터 기대하든 바와 같은 후대를 받지 못하고 영영 불악(不楽)하든 중 겸하여 지난 날 정치파동과 5·20 선거의 타격 또 개헌파동 등 연속하는 정치적 압박을 받게 되자 흥분된 감정은 전후를 돌볼 새도 없이 일절의 반(反)이대통령 세력과 규합하는데 주저치 않고 호동과 신당운동에 투신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날이 가고 좀 냉정하게 사태를 검토하고 보니 그들이 지금 손잡고 있는 것이 결코 그들의 진정한 동지가 아니요 사실은 이대통령보다도 더욱 경원해야 할 소위 진보세력이였든 것이다. 물론 진보세력이라고 지칭되는 민주대동파가 지금 사회주의를 주장한 것은 아니라고 하드래도 그들의 장래가 사회주의적 방향에 목표를 두고 일절의 정책을 세워나갈 것으로 믿어저 의심할 수가 없었든 것이며 또 그들 보수파로서는 이와 같은 경향을 극복해서 당의 영도권을 자기 수중에 유지해나갈 자신도 없었든 것이다. 여기서 자유민주파의 지도자들은 반이대통령 재야민주세력 총단결이란 종래 신당발기 당초의 방침을 一☐하고 단연코 민주대동파를 거세하는 일방 비교적 온건주의라고 지목되는 캐도릭계와 흥사단계의 영입에 몰몰(沒沒)하였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단 자신들이 반대하는 사람은 모다 사회주의자며 제3세력으로 몰려고 들뿐 아니라 심지어는 공산당의 사촌이라고까지 위협해댔든 것이다.

이와 같은 자유민주파의 강력하고 능숙한 공세에 대항해서 신당발기 당초의 노선을 견지하여서 국민의 여망에 상응하는 일대야당을 형성함으로써 여당에 비견하여 명년의 대통령선거에 건곤일척의 싸움을 거러브려든 소위 민주대동파의 결속과 전략이란 너무도 징약하고 또 졸렬하기 짝이 없었된 것이다. 그들은 각기 인기주의적 개인 푸래이에만 급급하여서 "결속된 세력에는 결속으로" "교묘한 전략에는 역시 치밀한 전법으로" 대항할 줄을 모름으로써 결국은 절대적인 민중의 지지와 호동다수의 의원의 동조와 신당운동의 정통파라는 명분까지를 독점하는 극히 유리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거월 25일 총회에서는 자유민주파가 신당지정의 책임을 18인위원회에다 들려 싸우고 이에 대치하여 자파 집중의 9인위원회를 선출하는 것을 막어내지 못하였으니 얼마나 무능과 졸렬을 극했든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당 분열의 책임을 겁내고 고민하든 자유민주파에서는 이제 완전히 주객전도의 입장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이제는 도리혀 민주대동파를 분열의 책임자로 규정하기를 위협하는 일방 당의 문호개방 원칙을 완전히 거부해 버림으로써 과거 히트-러나 도조 히데키(東條) 같은 발악적인 반공반민주자라도 하지 못한 이상의 극우보수적인 그야말로 또 다른 신당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서상(敍上)한 바와 같이 신당운동의 좌절은 결코 현 단계에 있어서의 특별한 이념 차이나 혹은 어떤 일개인의 포섭 여하로써 온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파의 생리적인 극우보수성의 공세 앞에 이를 조지 못하고 일패도지(一敗塗地)한 민주대동파의 무능과 개인적 인기주의에 기용(起用)했다는 것을 말하고저 하는 바이다.

* ☐☐ 부분은 훼손 등의 이유로 해독이 불가한 단어임을 밝힙니다.

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김대중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태그:#김대중, #조봉암, #민주당,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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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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