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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적 특성상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은 나라. 제국주의 식민세력을 물리쳤으나 그 후 남북으로 분단되어 처절한 전쟁을 치러야 했던 나라. 공산화를 막기 위한 명목으로 그 전쟁에 미국이 참전해 남쪽을 지원했던 곳. 여기까지 들으면 어느 나라를 떠올릴까. 그 역사에서 슬픈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 말하려는 곳은, 베트남이다.

<동조자>의 저자 비엣 타인 응우옌은 이름으로 알 수 있듯 베트남 출생이다. 사이공이 함락되던 1975년, 그의 나이 다섯 살에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자랐다고 한다. 영문학과 민족학을 전공했으며 소설가이자 교수로서 자리 잡았으나, 소설은 영원한 이방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적나라한 기록을 품고 있다.

소설 속 소피아는 이민 2세대로서 그녀에게 조국과 모국어는 다름 아닌 미국이며, 영어다. 그러나 상사는 끝내 그녀를 "제 뿌리를 잃어버린 불쌍하고 별 볼일 없는 존재"(p128, 1권)로 취급한다. 동양 혈통의 미국인에게 비교적 우호적인 그조차 온통 편견으로 가득차 있다. 그 땅에 정착한 이들이 아무리 보통의 미국인보다 더 폭넓은 어휘, 정확한 어법을 구사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민자의 나라로 불리는 미국, 소설이 묘사하는 그 기회의 땅은 이렇다. 그러나 이를 미국의 실체로 한정 짓는 것은 오만일 테다. 이민자가 늘어가고 있는 한국, 우리는 결백한가. 

<동조자> 책표지
 <동조자> 책표지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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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조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 반드시 이야기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보다 전쟁이다. 책에 실린 저자의 <뉴욕 타임스> 기고글 중 일부를 옮기면 이렇다. 
"어떤 사람들은 난민인 우리 가족이 아메리칸드림의 산 증거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부모님은 부유하시고, 형은 백악관 자문위원회를 이끄는 의사이며, 나는 교수이자 소설가이다. 그렇지만 우리 가족의 이야기는 상실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오로지 미합중국이 300만 우리 동포의 목숨을 빼앗은 전쟁을 치렀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니까." (pp311-312, 2권)

그의 기고문을 보지 않더라도, 소설 속 거의 모든 문장, 아니 단어들까지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기 위해 활용되고 있다. 더욱이 소설이 품고 있는 역사가 우리의 그것과 닮아 있다는 깨달음은 이 소설을 단지 허구, 혹은 먼 나라 이야기로 들을 수 없게 만든다. <동조자>는 베트남전에 국한되지 않은, '전쟁'이라는 전세계적 실화를 기초로 하고 있다. 소설로 들어가보자. 
"나는 스파이, 고정간첩, CIA 비밀 요원, 두 얼굴의 남자입니다." (p7, 1권)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처음부터 가장 중요한 정보를 누설하며. '나'는 남베트남을 위해 일하는 군인이자, 북베트남이 심어놓은 스파이, 즉 이중간첩이다. 소설은 '나'의 자술서 형식을 띠고 있으며, 1975년 4월 북베트남에 의해 사이공이 함락되던 시기부터 시작한다.

사이공의 함락이 예견되자, 모든 미국인들은 그곳을 빠져나간다. 도망갈 수 없는 남쪽의 사람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미국인을 위해 일했던 사이공의 주민들은 위험을 직감한다. 그 와중에 남베트남의 대통령은 사임하고, 타이완으로 망명한다. 금으로 가득한 가방을 싣고.

표면상 남베트남의 장군 수하에서 참모로 일하지만 실상은 북베트남이 심어놓은 이중간첩인 '나'에게, 사이공의 함락은 곧 해방이다. 해방된 조국에 있고 싶지만 장군이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자, '나' 역시 그를 감시하라는 임무를 띠고 동행한다. 장군은 패전으로 실의에 빠지기도 하지만 곧 자신을 회복하고, 남베트남의 재건, 즉 혁명을 도모한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나'의 임무 역시 끝나지 않았다.

이중간첩을 주인공으로 하는 첩보물의 형식을 띠고 있으므로, 스포일러는 최대한 자제한다. 이 자술서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장군이 도모하는 혁명은 어떻게 끝나는지, '나'의 임무와 세 명의 의형제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지 등 소설을 덮는 순간까지 호기심과 긴박감을 멈출 수 없다.

내용보다는 소설이 분명하고 날카롭게 짚고 있는 것들에 대해 기록하고 싶다. <동조자>는 전쟁이란 것이 집단적 광기와도 같다는 것을, 전쟁은 인간 모두를 최악으로 만드는 악랄한 행위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서로를 죽이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린 전쟁에서 표적은 모호해지고, 살인은 정당화된다. 
"베트콩 테러범, 베트콩 동조자, 베트콩 부역자, 어쩌면 베트콩일지도 모르는 사람, 십중팔구 베트콩인 사람. 이 여자는 배 속에 베트콩을 뱄군. 이 녀석은 베트콩이 될 생각이야. 이 녀석은 모든 사람이 생각하기에 베트콩이야. 이 사람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베트콩이야. 그러니까 이 사람도 훈련 중인 베트콩이지."(p124, 2권)

이것이 전쟁이다. 베트남만의 일인가. 이 전쟁의 주체는 누구인가. 
"그들은 지금껏 약소국인 우리나라에서 자신들의 온갖 기술, 무기, 발상들을 시험해 왔지. 우리는 그들이 시치미를 떼고 부르는 소위 '냉전'이라는 저 실험의 피실험자들이었어. 굉장한 농담이지! 그 전쟁이 우리에게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고려한다면 말이야."(p244, 2권)

그러나 소설은 어느 한 곳에 비난의 화살을 집중하지 않는다. 무고하였으나 단지 힘이 없었을 뿐이라는 식으로, 가련한 희생양의 역할을 맡은 자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 앞에서 모두가 가해자인 동시에, 희생자다.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하기 전에는 외국인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위협하고, 우리에게 굴욕을 주고 있었지요. 이제 우리 동포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위협하고, 우리에게 굴욕을 주고 있어요. 그게 진보라는 거겠지요." (p248, 1권)

그렇다면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자들, 그곳에 있지 않았던 자들에게는 면죄부가 주어질까. 소설은 에두르지 않고 말한다. 그 누구도 무죄일 수 없다고. 
"온 세상이 우리나라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지켜보았지만, 세상 대다수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그뿐 아니라 - 그것을 즐기기까지 했어. 당신도 예외는 아니야." (p262, 2권)

저자는 이 소설이 독자들을 불편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바 있고, 그 바람대로 되었다. 지금도 어느 한 편에서는 전쟁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책을 읽는 동안 악몽에 시달려야 할만큼.

그러나 책이 안겨주는 것은 가치 있는 고통임에 틀림없고, 그러므로 공유하고 싶은 불편함이다. 전쟁의 후유증을 지금도 겪어내고 있는 국가에 살고 있다면, 더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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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엣 타인 응우옌 지음, 김희용 옮김, 민음사(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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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엣 타인 응우옌 지음, 김희용 옮김, 민음사(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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