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성> 스틸컷

<안시성> 스틸컷 ⓒ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영화 <안시성>이 크랭크인을 한다고 했을 때 관심이 갔던 것은 조인성이 양만춘 역을 맡았다는 것보다 전작들과의 차별화였다. 고구려와 말갈의 안시성 구원군 15만 명이 사실상 궤멸된 상태에서 당나라 십 수만 군사를 격퇴한 안시성 전투는 역사적 자긍심을 주는 소재로서, 이미 역사물로 재현된 터였다. 중국의 동북공정 논란이 불붙던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은 공을 들여 안시성 전투를 1·2회에 담았고, KBS <대조영>도 전반부 클라이맥스로 이를 그려낸 바가 있다.

십여 년도 더 지나 안시성 전투를 다시 한번 짚은 <안시성>은 분명 드라마에 견줘 규모는 커졌고, 장면은 웅대하게 펼쳐졌다. 전투에서 시작해 전투로 끝맺음하는 영화는 마침 웅장한 전투를 재현하는 게 본 목적이었다는 듯, '액션 블록버스터'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거기까지였고, 한계는 뚜렷했다. 액션은 진일보했지만 세월을 감안하면 전작의 재현에 머무르고 말았다는 인상을 깊게 남기고 말았다.

승리의 환희를 안겨준 안시성 전투는 기본적으로 도식적이다. 수적, 자원 열세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용기로 맞서 싸운 끝에 승리를 쟁취한다는 서사는 이 전투의 본질로서, 변주해내기가 어렵다. 전투에 참여하는 인물들 역시 희생과 헌신, 고뇌와 열정을 서사에 투영해낼 뿐이다. <연개소문>과 <대조영>도 이 틀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안시성 전투를 처음으로 영상화했다는 점에서 나름의 참신한 구석이라도 있었다.

<안시성>의 미흡한 차별화
 
 <안시성> 스틸컷

<안시성> 스틸컷 ⓒ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안시성 전투를 러닝타임 130여 분으로 확장한 <안시성>은 전작들의 영상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가운데, 차별화 요소로 백하와 하소 역을 각기 맡은 설현과 엄태구, 양만춘과 결혼 상대였다는 고구려 신녀 시미 역의 정은채를 등장시켜 러브 라인을 내세웠다. 한데 중반부를 지나 급작스럽게, 그것도 연이어 퇴장하는 이들을 볼 때면 이들 등장이 관객의 관심 유도를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죽음이 거듭되는 광경에서 번민을 안고 고민하는 양만춘의 모습은 불굴의 투지로 완전무결한 무사로 그려졌던 전작에 비하면 인물에 대한 접근이 다변화된 측면은 있으나 이마저도 짧은 시간에 지나갈 뿐이다. 결국 <안시성>은 액션의, 액션을 위한 영화가 되는데, 관객들도 이를 감안하고 관람하겠지만 서사의 빈곤은 메워지지 않는 흠결이 되고 만다. 안시성 전투를 10여 분의 러닝타임으로 처리했던 KBS <대조영>이 탁월한 선택으로 보일 정도다.

돌아보건대, 이제껏 승리의 역사는 반복해서 다뤄지는 경향이 있었다. 12척으로 330척의 왜군을 무찌른 명량대첩을 그린 2014년 영화 <명량>의 경우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한정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이는 2016년 KBS 팩추얼 드라마 <임진왜란 1592>에서 재차 그려졌다. 사실 임진왜란 와중에 이어지는 이순신의 고뇌와 당시 명과 일본의 국제적 역학 관계는 변주를 거듭해서 그려내도 오늘날 의미 값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시성 전투는 그려낼수록 액션의 확장에 머무르는 경향이 짙어질 뿐이다.

실패의 역사를 영화로 마주할 수 있을 것인가
 
 <안시성> 스틸컷

<안시성> 스틸컷 ⓒ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실패의 역사는 영상화한 뒤 대중 앞에 내놓는 데 소외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이 실패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마주한 작품이었다. 이는 치욕이 깃든 실패를 그려내는 것이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다는 통념에 기반을 둔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관객 수는 384여만 명으로, 참패 수준은 아니었다. 도식적이고, 진부한 성질이 된 환희의 역사보다는 실패의 역사에 대한 수요를 확인한 계기가 된 것이다. 

<안시성>을 보며 차라리 고구려 멸망의 단초가 된 668년 평양성 전투를 영화화하는 게 어땠을까 하는 감상이 떠올랐다. 당시 평양성은 내부자의 배반에 의해 문이 열린다. 물론 2011년 이준익 감독이 영화 <평양성>을 통해 해당 전투를 그려내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유머 코드에 치중한 탓에 멸망의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패의 과정에는 위기가 동반하고, 위기에는 평상시에는 알 수 없던 여러 민낯과 인간의 복잡다단한 감정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것을 관조하는 것도 서사가 한결 다채로워짐은 물론, 의미가 있을 테다. 

그간 영화와 드라마는 성공과 국난의 극복에 초점을 맞춘 반면, 멸망에는 덜 주목하는 측면이 있었다. 멸망은 물론, 처절함과 음침함이 가득하겠으나 그 가운데서 길어 올릴 인간의 희망이 존재할 수도, 성공의 결과에선 알 수 없었던 교훈적인 내용도 있을 것이다. <안시성>은 역사 영화에 또 다른 질문을 던져준 셈이 됐다. 영화는 실패의 역사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실패에서 우리는 어느 걸 발견하고 느낄 수 있을 것인가를 말이다.
안시성 대조영 연개소문 평양성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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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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