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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파매개행위금지조항의 문제점과 대안 토론회
▲ 전파매개행위금지조항의 문제점과 대안 토론회 전파매개행위금지조항의 문제점과 대안 토론회
ⓒ 신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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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는 후천성면역결핍증(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HIV) 감염자다. HIV에 감염된 후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으면 특정 질병이나 증상을 보이는 에이즈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A씨는 항바이러스 치료를 꾸준히 받아 '바이러스 미검출' 상태였다. 전파가능성이 0에 가까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A씨가 자신이 감염자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콘돔을 쓰지 않은 채 상대와 합의된 성관계를 맺었다면 A씨는 어떻게 될까. 현행법에 따르면 A씨는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HIV/에이즈는 이미 '관리가능한' 질병이 됐지만 국가는 여전히 감염인들을 '바이러스 전파자'로 여기며 성행위 등을 과도하게 규제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12월 1일 세계 에이즈의 날을 맞아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는 28일 오후 2시 서울 마포구 인권재단사람에서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19조'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19조에 따르면 감염인은 혈액 또는 체액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파매개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해당 법 25조는 이를 어길 시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해당 법은 당초 '콘돔 없는 성행위'를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대통령령이 정하는 감염의 예방조치 없는 성행위를 금지하고 시행령에서 '해당 예방조치는 콘돔의 사용으로 타인에게 전파를 방지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적시했었다. 하지만 '사적이고 은밀한 성행위시 콘돔 사용 여부에 대한 감독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전파방지 목적 달성의 효과적인 수단이라 할 수 없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적이 2007년 나오면서 해당 조항은 2008년 삭제됐다. 그 결과 19조는 지금의 모습이 됐다. 하지만 콘돔 없는 성행위를 금지했던 예전과 다를 바가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노 콘돔' 조항 사라졌지만... '노 콘돔' 처벌 여전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이종걸 활동가는 이날 "19조 표현이 두루뭉술하다"라며 "혈액 또는 체액을 통해서 전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혈액과 체액이 교환될 수 있는 예방행위 없는 성행위는 안 된다는 뜻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콘돔 없는 성행위는 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그는 "실제 감염 가능성이 없어도 콘돔을 사용하지 않아서 처벌 받은 사례가 있다"라고 했다.

2010년 7월 에이즈 확진 판정을 받은 B씨는 상대에게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리지 않고 피임도구도 사용하지 않은 채 성관계를 한 혐의로 기소됐다. B씨는 꾸준한 치료로 바이러스 미검출 상태였다. 하지만 재판부는 바이러스 농도가 미검출인 점은 인정하나 바이러스가 억제됐을 뿐이지 소멸된 것은 아니며 피임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피해자의 진술을 받아들여, 지난 7월 19일 B씨에게 징역 6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상대가 B씨와의 성관계로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류민희 희망법 변호사는 이날 토론회에서 "지난 2008년 개정을 통해 콘돔을 사용하지 않은 성관계 금지 조항이 삭제됐지만 법원의 판결은 개정 전의 삭제 조항과 동일한 법적 해석과 적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 같은 판결은 국제적 기준에도 맞지 않는다고 했다. 류 변호사에 따르면 유엔에이즈(UNAIDS) 등 전문기구들은 감염의 중대한 위험을 초래한 것이 아니면 형사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하고 있다. 위험성을 따질 때도 과학적, 의료적 증거에 기반해 판단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류 변호사는 "의료전문가들은 HIV 바이러스 수치가 낮거나 미검출 수준일 경우, 한 번의 질·항문·구강 성행위로 전파될 가능성은 낮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가천대 길병원 감염내과의사 엄중식씨도 "약을 꾸준히 먹으면 혈액에서 HIV바이러스가 검출이 안 된다"라며 "다른 체액에서도 검출이 안 된다는 것이고 이는 사실상 전파력이 0에 수렴한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엄씨는 "전파력이 굉장히 낮아진 사람들에 대해 전파매개금지조항을 적용하는 것은 의학적으로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라며 "19조를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HIV/에이즈는 관리 가능한 질병이며 다른 질병과의 형평성을 고려해도 19조는 과하다고 했다. 엄중식씨는 "HIV/에이즈는 완치는 안 되지만 치료를 계속 하면 조절이 되는, 전염성이 거의 없는 간단한 병이 됐다"며 "당뇨병보다 조절이 간단한 질병이 됐는데도 법령은 여전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B형 간염 바이러스의 경우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3~4%가 감염된 상태이며 그 중 만성 간염 환자는 약 4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라며 "해마다 2만여 명이 간질환으로 사망하고 있다"라고 했다. 그는 "B형 간염은 어머니와 신생아 사이 수직감염, 성관계를 통해서도 감염된다"라며 "그렇다고 B형간염자들에게 어떤 행위를 금지하는 법 조항은 없다"라고 했다.

19조가 감염 예방 효과는 없으면서 감염인들을 옥죄기만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손문수 한국 HIV/에이즈감염인연합회 KNP+대표는 "이 같은 규제는 감염인들을 '병을 퍼뜨리는 사람'으로 낙인찍는 것이다"라며 "감염인들이 검사를 받고 확진을 받아야 하는데 낙인 때문에 검사를 피하거나 확진 받아도 정부에 등록을 하지 않고 숨어버린다"라고 했다. 감염을 확인하기 위한 자발적 동기를 약화시켜 전염을 막는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엄중식씨도 "HIV바이러스는 성행위를 통해 전파가 되긴 한다"라면서도 "하지만 대부분 자신이 감염된 것을 인지하지 못 한 상황에서 이루어진다"라고 했다. 그는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감염 가능성이 높은 고위험군들이 진단을 최대한 빨리 받아 감염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대응체계다"라며 "실효성이 있는지도 모르는 금지조항을 통해 특정한 상황에서 형사처벌을 받는 환자가 생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HIV 감염인들 죽이는 것은 낙인·혐오"

2017년 유엔에이즈의 지원을 받아 실시한 <한국 HIV 낙인 지표 조사>에 따르면 한국 HIV감염자 10명 중 7~8명이 자신의 탓을 하고 있으며 감염 사실이 소문날까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 HIV 감염으로 인해 자살 충동을 느낀다고 답한 비율도 36.5%로 다른 나라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이훈재 교수가 2005년 실시한 <HIV 감염인 및 AIDS 환자 인권 상황 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HIV 감염인의 자살률은 일반 국민 전체의 자살 사망률보다 10배가 높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라는 점에서 심각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윤가브리엘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대표는 "한국사회가 감염인에게 성적문란자라는 낙인을 찍고 이는 감염인의 '내적낙인'으로 연결된다"라며 "이런 낙인을 더욱 강화하는 건 감염인을 '전파매개자'로 규정하는 법이다"라고 했다.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김승섭 교수도 "19조는 한국사회가 HIV감염인을 대하는 태도를 명백히 보여준다"라고 했다. 김 교수는 "캐나다나 미국에서 20살 젊은이가 HIV에 감염되면 70살 넘게 산다"라며 "HIV 감염이 50년 이상 살 수 있는 만성질환이 된 것이다"라고 했다.

김 교수는 이어 "미국질병관리본부 HIV/AIDS 분과 책임자인 유진 매크레이는 HIV 감염인이 항바이러스 치료를 통해 체내 바이러스 농도를 어느 수준 이하로 낮추면, 콘돔을 사용하지 않아도 바이러스가 전염되지 않는다는 내용을 발표했다"라며 "의학적으로 관리가 가능하며 전파도 차단할 수 있는 질병이라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 HIV감염인들이 사망하는 '진짜 이유'는 낙인과 혐오 때문이라고 했다. 김승섭 교수는 "HIV 감염자 200명을 대상으로 올해 초에 실시한 조사를 보면 감염자 중 치료약을 먹지 않고 병원에 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라며 "병원에 갔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 내가 감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될까봐 가지 않는다고 답한 사람이 76%였다"라고 했다. 김 교수는 "혐오와 낙인은 HIV감염, 전파를 막는 의학적 개입을 무력화시킨다"라며 "감염됐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돼야 한다"라고 했다.

태그:#세계 에이즈의 날, #HIV/에이즈,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19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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