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해가 저문다. 2018년은 다른 해보다 굵직한 스포츠 이벤트가 많았다. 평창에서 열린 동계올림픽부터 시작해 박항서 감독이 일으킨 베트남 축구 열풍에 이르기까지, 우리 스포츠 팬들을 웃고 울렸던 장면들도 많았다. 수많은 스포츠 팬들의 감흥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몇 가지 잊지 못할 순간들을 눈감고 떠올려 본다.

정현이 조코비치를 이기다니, 커다란 새해 선물이었다
 
 정현이 지난 18일 호주 멜버른에서 열른 호주오픈 테니스대회 남자단식 2회전에서 공을 받아치고 있다.

정현이 지난 1월 18일 호주 멜버른에서 열른 호주오픈 테니스대회 남자단식 2회전에서 공을 받아치고 있다. ⓒ 연합뉴스

 
우리 테니스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가 아름답게 만들어졌다. 세계 남자 프로테니스 단식 랭킹을 조금씩 끌어올리고 있던 정현이 호주 오픈 남자 단식에 도전한 것이다.

롤랑가로스(프랑스 오픈), 윔블던, US 오픈과 함께 세계 4대 메이저 대회로 공인된 호주 오픈 테니스대회 2018년 남자 단식 4라운드(16강전)가 지난 1월 22일 메인 코트인 로드 레이버 아레나에서 열렸다. 2년 전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와의 대결에서 완패했던 정현이 어느 정도 세계 수준에 근접했는지 지켜볼 수 있는 흥미로운 경기였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보는 이들 모두가 놀라워하는 양상이 펼쳐졌다. 

첫 세트부터 흥미진진한 '타이 브레이크'(테니스에서 게임이 듀스일 경우 12포인트 중 7포인트를 먼저 획득한 자가 승리하는 경기방식)가 이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세계 프로테니스계의 빅 이슈였다. 정현이 첫 세트에서 게임 스코어 4-0까지 앞서나간 것도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어릴 적 영웅을 상대로 끈질긴 수비력을 자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첫 세트 열한 번째 게임에서 노박 조코비치가 게임 스코어를 6-5로 뒤집어버렸다. 여기까지가 정현의 한계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현은 이어진 열두 번째 게임에서 정확한 포핸드 다운 더 라인으로 타이 브레이크를 이끌어냈다. 그랜드 슬램 대회 메인 코트라는 조건부터 수많은 관중의 함성, 세계 '톱 클래스'의 상대 선수에 이르기까지 정현 앞에 놓인 타이 브레이크는 그야말로 떨리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첫 세트 타이 브레이크는 정현의 성장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듯했다. 네트 바로 앞 백핸드 발리로 2-1을 만든 정현은 일곱 번째 포인트에서 포핸드 역크로스를 성공시키며 4-3으로 또 한 번 앞서나갔다. 그리고 이어진 11번째 타이 브레이크 포인트 기회에서 서브권을 쥔 정현은 과감한 백핸드 다운 더 라인으로 노박 조코비치의 수비 실수를 이끌어냈다. 68분 만에 첫 세트가 끝난 것이다. 

첫 세트 승리 자체도 벅찬 순간이었지만 두 번째 세트 흐름도 첫 세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두 번째 세트 세 번째 게임에서 낮은 발리 크로스를 성공시켜 3-0으로 앞서나가는 정현이 정말로 큰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조코비치는 침착하게 따라붙어 두 번째 세트도 열두 번째 게임까지 이어졌다. 6-5로 게임 스코어가 유리한 상황에서 정현은 특유의 질긴 수비력을 맘껏 자랑했다. 신음 소리를 내면서까지 노박 조코비치의 스트로크가 구석구석 뻗어왔지만 정현은 믿기 힘들 정도로 뛰어다니며 웬만한 공들을 다 받아넘겼다. 결국 두 번째 세트의 주인공도 정현이 된 것이다. 61분이 걸린 두 번째 세트 마지막 포인트는 정현의 수비력에 혀를 내두른 노박 조코비치의 포핸드 스트로크 실수였다. 네트를 넘기지 못한 것이다.

세 번째 세트가 이 16강전 마지막 세트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처음으로 노박 조코비치가 세트 첫 게임을 따냈지만 곧바로 정현의 수비력이 빛나며 1-1로 따라붙고 내친 김에 게임 스코어를 뒤집어 버렸다. 

이 대결 마지막 갈림길은 세 번째 세트 아홉 번째 게임이었다. 정현 서브 게임에서 0:30을 만든 노박 조코비치가 환한 표정으로 수많은 관중들의 함성을 이끌어내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지금부터 대역전 드라마를 쓸 기세였다. 

하지만 정현은 이 흐름을 결코 내주지 않았다. 베이스라인 스트로크를 놀랍게도 구석구석 찔러대며 노박 조코비치를 지치게 만든 것이다. 이 게임 포인트를 40:30으로 역전시킨 정현은 조코비치의 스트로크가 옆줄 밖에 떨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열한 번째 게임에서도 정현은 완벽한 포핸드 크로스로 6-5를 만들고는 어퍼컷 세리머니를 펼쳐 관중들과 하나가 됐다. 상대적 약자인 자신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는 첫 세트에 이어 세 번째 세트에서도 타이 브레이크 상황이 이어졌다.

타이 브레이크 여덟 번째 포인트에서 네트 앞으로 달려든 조코비치를 상대로 포핸드 크로스를 완벽하게 뿌린 정현은 타이 브레이크 포인트 5-3을 만들어 관중들의 환호성을 즐기는 여유까지 보여주었다.

그리고 매치 포인트도 노박 조코비치의 백핸드 스트로크 실수를 유도하는 정현의 수비가 빛났다. 3시간 21분 만에 웬만한 테니스 팬들조차 믿기 힘든 3-0(7-6{TB7-4}, 7-5, 7-6{TB7-3}) 점수판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후 정현은 한국 테니스 그랜드 슬램 도전 역사상 처음으로 4강까지 오르는 위력을 뽐냈다. 비록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스위스)와의 세미 파이널에서 두 번째 세트 도중 발바닥 물집이 터져 기권패하고 말았지만 노박 조코비치를 3-0으로 이긴 것은 2018 세계 테니스 뉴스를 통틀어 가장 놀라운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경기 이후 전문가들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베이스라인 포인트 성공률에서 정현의 60.8%(174/286개)가 노박 조코비치의 57.3%(202/352개)보다 앞섰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만큼 정현은 테니스의 기본에 충실했기 때문에 귀중한 승리 경험을 따낸 셈이다. 바로 그 노박 조코비치가 7월 15일 테니스 대회 최고 권위에 빛나는 윔블던 트로피를 들어올린 것을 감안하면 우리 테니스 팬들에게 너무나 큰 새해 첫 선물이었던 것이다.

금메달보다 더 빛난 그들의 마음... 이상화-고다이라의 우정
 
이상화와 고다이라 이상화 선수와 고다이라 선수가 18일 오후 강원도 강릉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500미터에 출전해 역주를 하고 있다.

▲ 이상화와 고다이라 이상화 선수와 고다이라 선수가 18일 오후 강원도 강릉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500미터에 출전해 역주를 하고 있다. ⓒ 이희훈

 
우리 땅에서 열린 첫 번째 동계올림픽이기에 더 특별한 순간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컬링 빙판 위에서 "영미"를 외치는 김은정 선수의 목소리 덕분에 우리는 더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고, 아찔한 자세로 엎드려 타는 썰매 종목 스켈레톤에서 감동의 금메달을 목에 건 윤성빈 선수의 붉은 눈시울도 잊을 수 없다.

그래도 그녀들의 따뜻한 우정과 진심이 담긴 격려의 말 한마디가 더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그 주인공은 여자 스피드 스케이트 500미터 종목에서 나란히 시상대 높은 곳에 선 고다이라 나오(일본)와 이상화(한국) 선수다.

지난 2월 18일 오후 강릉 아이스 아레나에서 벌어진 평창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여자 500미터 속도 겨루기에서 일본의 고다이라 나오 선수는 14조에 속해 먼저 뛰었다. 36초94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했기에 관중석의 열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환호하는 팬들의 함성을 듣고 고다이라 나오 선수는 입술에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펼치며 조금만 조용히 해 달라는 뜻을 전했다. 그녀의 뒤에는 바로 다음, 15조로 뛸 이상화 선수가 아웃 코스 출발선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올림픽 정신, 스포츠 정신이 아닌가 싶다.

마음으로 친구의 응원을 받은 이상화 선수는 37초33 기록을 남기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레이스 초반 100미터 기록이 바로 앞에 뛴 고다이라 나오 선수보다 0.06초 빨랐기 때문에 믿기 힘든 대역전 금메달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뒷심이 아주 조금 모자랐다. 

각자 국기를 붙들고 두 선수가 만나는 장면에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숨어있었다. 경기 후 기자회견장에서 누구보다 온화한 얼굴로 나란히 앉은 두 선수는 숨막히는 500미터 스피드 스케이팅 레이스보다 더 큰 감동을 솔직한 이야기로 남겨주었다. 

울먹이는 이상화에게 다가서는 고다이라 나오가 한국말로 "잘했어"라고 그 누구보다 힘이 되는 한 마디를 던져준 것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온 상화 선수를 계속 우러러볼 것이라고 덧붙였단다. 스포츠가 던져주는 아름다움을 공감하는 사람들은 그녀들이 0.39초 차로 금메달과 은메달 운명이 갈라졌다는 것보다 이렇게 그녀들이 말해준 진심의 한 마디에 더 많은 눈물의 찬사를 보낸다. 앞으로 그녀들이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고 해도 이 순간만큼은 팬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지 않을까?

'손흥민의 7초'... 월드컵 16강 실패했지만 열광했다
 
[월드컵] 손흥민 슛! (카잔=연합뉴스) 김인철 기자 = 27일(현지시간)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한국과 독일의 경기. 한국 손흥민이 슛을 시도하고 있다.

▲ [월드컵] 손흥민 슛! (카잔=연합뉴스) 김인철 기자 = 27일(현지시간)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한국과 독일의 경기. 한국 손흥민이 슛을 시도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 남자축구의 2018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 조편성 운은 나쁜 편이었다. 디펜딩 챔피언 독일도 모자라 북중미 축구의 영원한 강팀 멕시코, 유럽의 다크호스 스웨덴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신태용 감독이 이끌었던 러시아 월드컵 한국 축구대표팀의 에이스는 누가 뭐라 해도 손흥민(토트넘 홋스퍼 FC, 잉글랜드)이었다. 먼저 열린 두 경기에서 모두 패했으니 마지막 독일과의 경기 기대감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손흥민이 독일 분데스리가 경험을 바탕으로 마지막 자존심을 세워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당시 카잔 아레나 관중석에 들어온 4만1835명의 축구 팬들 대부분은 전 대회 우승국 독일이 한국을 물리치고 16강에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멀리서 TV 생중계를 지켜보던 우리 축구 팬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후반전 추가 시간이 흘러갈 때까지 한국 팀은 골키퍼 조현우(대구 FC)의 눈부신 슈퍼 세이브 덕분에 실점 없이 버텼다. 그리고 우리는 믿기 힘든 골을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볼 수 있었다. 첫 번째 골은 독일의 간판 미드필더 토니 크로스가 발끝으로 잘못 찬 공이 코너킥 세트 피스에 가담하기 위해 골문 앞까지 올라와 있던 한국 센터백 김영권에게 굴러간 덕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러시아 월드컵 톱 뉴스감이었고 축구 경기에서 까다롭기로 소문난 오프사이드 규정을 숙지하는 데 큰 교훈을 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그리고는 후반전 추가 시간 5분 44초에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독일 골키퍼 마누엘 노이어까지 그들의 마지막 공격에 가담하는 순간 한국 미드필더 주세종이 공을 가로챈 것이다. 주세종은 지체없이 몸을 오른쪽으로 휙 돌려 왼발 롱 킥을 독일 골문을 겨냥하여 차 올렸다. 너무 먼 거리였기에 직접 슛을 시도했다기보다는 손흥민을 겨냥하여 역습 공간 패스를 쏘아보낸 것이다. 

축구 오프사이드 규정상 중앙선부터 제약이 적용되기에 손흥민은 중앙원 안쪽에서 역습 패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믿기 힘든 달리기가 시작됐다. 정확히 7초 만에 손흥민은 왼발 인사이드 킥을 독일 골문에 정확하게 밀어넣었다. 독일 수비수 니클라스 쥘레도 손흥민 오른쪽에서 따라붙었지만 육상 단거리 선수를 떠올릴 정도로 손흥민의 스피드는 놀라웠다.

자기 등번호와 똑같은 '7초'를 달려 축구 팬들의 기억에서 지워질 수 없는 쐐기골을 터뜨린 것이다. 비록 월드컵 16강은 실패했지만 손흥민이 달린 이 숨막힌 순간은 디펜딩 챔피언 독일을 최하위(F조 4위)까지 밀어내며 집으로 돌려보낸 것이었기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월드컵 명장면으로 오랫동안 남을 수밖에 없다.

최정과 한동민이 담장 넘긴 야구공 둘
 
 12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18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SK 와이번스와 두산 베어스와의 6차전 경기. 9회초 2사 때 SK 최정이 동점 솔로 홈런을 친 뒤 홈에 들어오며 주루 코치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12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18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SK 와이번스와 두산 베어스와의 6차전 경기. 9회초 2사 때 SK 최정이 동점 솔로 홈런을 친 뒤 홈에 들어오며 주루 코치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야구 팬이 아니어도 이 경기를 어찌 지나칠 수 있을까? 그냥 TV 채널 돌리다가 우연히 보게 됐고 한 번도 아니고 두세 번이나 입을 다물 수 없었던 야구의 명장면들이 쏟아져나온 2018 KBO 리그 한국시리즈 6차전이 11월 12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렸다.

어웨이 팀 SK 와이번스가 3승 2패로 앞선 상황에서 6회초가 끝날 때 점수판은 3-0이었다. 예상보다 싱겁게 가을 야구가 낙엽마저 다 떨어뜨리는 듯 보였다. 다이아몬드 위 드라마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6회말 주인공은 두산 베어스가 자랑하는 포수 양의지였다. 6회말 양의지는 SK 와이번스 투수 켈리를 주저앉혔다. 작정하고 초구를 노린 양의지의 스윙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중견수 앞에 떨어진 안타였다. 그 덕분에 2루와 3루에 있던 주자가 모두 홈 베이스를 통과한 것이다. 

두산 베어스 양의지의 맹활약은 8회말에도 이어졌다. 3루에 정수빈을 주자로 두고 중견수 위로 높게 뜬 공을 친 것이다. 양의지의 선택은 역시 바뀐 투수 정영일의 초구였다. 0-3 점수판을 4-3으로 뒤집어버리는 순간이었기에 잠실 하늘은 하얀 풍선이 넘실거렸다.

이 분위기라면 이번 한국시리즈가 7차전 마지막 승부까지 이어져 대역전 드라마로 끝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더 놀라운 드라마가 9회초도 모자라 연장전까지 이어졌다. 묵직한 한방이 만드는 야구만의 매력이 가을 단풍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게 넘쳐흐른 월요일 밤이었다.

8회에 뒤집힌 4-3 점수판이 9회초 투아웃까지 이어졌으니 두산 베어스 팬들은 당연히 7차전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때 타석에 들어선 선수는 이전까지 15타수 1안타(6푼7리)에 그친 SK 와이번스 3번 타자 최정이었다. 팔꿈치 부상으로 1차전에 나오지 못할 정도였으니 초라한 한국 시리즈 타율도 이해할 만했다. 

두산 베어스의 투수도 에이스 린드블럼이었기에 아웃 카운트 하나를 잡는 것은 어려워보이지 않았다. 투 볼 투 스트라이크가 만들어질 때 최정의 헛스윙도 눈에 띄었다. 다섯 번째 공은 잘 맞은 파울볼이기도 했다. 여섯 번째 공이 날아오는 순간 최정의 눈빛은 공 끝에서 빛났다. 타구 속도 150km/h에 도달하는 105미터 짜리 홈런이었다. 

앞선 네 경기를 뛰면서 13타수 1안타(7푼7리)의 초라한 기록을 남긴 최정에 대해 SK 와이번스 힐만 감독은 이번 6차전까지 변함없는 신뢰를 보내준 것이었다. 명장의 안목이 그 어느 때보다 빛나는 순간이었다. 

역전패 그 이상의 충격을 받을 수 있었던 위기 상황을 베테랑 최정이 건져올린 SK 와이번스는 13회초에도 홈런으로 또 한 번 환호성을 내질렀다. 두산 베어스의 여덟 번째 투수 유희관을 상대로 왼손 타자 한동민이 초구를 시원하게 걷어올려 오른쪽 담장을 넘긴 것이다. '3-0 → 3-3 → 3-4 → 4-4 → 5-4'로 변한 점수판만으로도 이 다이아몬드 드라마가 얼마나 뜨거웠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SK 와이번스는 13회말에 그들을 상징할만한 투수 김광현을 마운드로 올려보냈다. 첫 타자 백민기를 2루 직선타로 잡아낸 김광현은 이어진 양의지와의 대결에서 154km/h가 찍히는 3구 3진을 완성시키며 우승에 대한 자신감을 드높였고, 마지막 타석에 선 박건우에게도 142km/h 속도가 나온 낮은 볼로 헛스윙을 이끌어내며 8년 만에 우승 감격을 누렸다. 두산 베어스의 양의지부터 SK 와이번스의 최정과 한동민, 김광현에 이르기까지 네 선수 이름만으로도 2018 한국 야구 드라마는 충만했다.

박항서 감독, 축구장의 외교관 그 이상의 가치
 
  15일 오후 베트남 하노이의 미딘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의 2018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결승 2차전에서 박항서 감독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15일 오후 베트남 하노이의 미딘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의 2018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결승 2차전에서 박항서 감독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축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눈밭에서도 공식 경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고 많이들 놀랐다. 지난 1월 27일 중국 창저우 올림픽 스포츠센터에는 함박눈이 쏟아졌다. 23세 이하 AFC(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십 결승전이 열리기 전부터 그랬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4강까지 올랐지만 아시아 축구의 신흥 강호로 떠오른 우즈베키스탄에게 1-4로 완패하고 물러났다. 그 우즈베키스탄을 상대로 결승전을 치르는 팀이 바로 박항서 감독이 대표팀 감독과 겸임하고 있는 U-23 베트남이었다. 

맏형들이 뛰는 메인 이벤트는 아니지만 23세 이하 대표팀이 거둔 그 정도 성과만으로도 베트남은 열광했다. 눈밭을 겨우 치우면서 어렵게 결승전이 열렸고 그렇게 미끄러운 그라운드 경험이 거의 없는 베트남 선수들은 상승세를 타고 있는 우즈베키스탄과 대등하게 맞섰다. 

41분, 베트남 축구의 희망이라 불리는 공격형 미드필더 응유엔 꽝 하이의 왼발 직접 프리킥 동점골이 터졌다. 이에 눈을 뒤집어쓰고 관중석에서 금성홍기를 흔들던 베트남 응원단은 펄쩍펄쩍 뛰었다. 

연장전까지 이어진 이 결승전은 종료 직전 왼쪽 코너킥 세트 피스 기회를 교체 선수인 안드레이 시도로프가 왼발 골로 성공시키며 끝났다. 승부차기를 머릿속에 그리던 박항서 감독도 안타까운 한숨을 내뱉었지만 모두들 베트남 축구의 성장에 놀라워했다. 

이 준우승 업적만으로도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의 영웅이 됐다. 마술과도 같은 박항서 감독의 지도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난 8월 열린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도 박항서 매직은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냈다. 

아시안게임 남자축구 참가 팀 중 유일하게 실점 없이 5승(8득점 0실점)을 거두며 준결승전에 올라 알찬 경기력을 자랑한 것이다. 이것이 베트남 축구 역사를 통틀어서도 처음 있는 일이라 박항서 감독이 한국 축구대표팀 코치 시절(2002 한일 월드컵) 거스 히딩크 감독과 함께 그랬듯이 '4강 신화'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끝내 금메달을 따낸 한국과 맞붙은 4강전에서 1-3으로 패하고 말았지만 베트남 축구가 한국, 호주, 일본, 이란, 사우디 아라비아 등과 함께 아시아 최고 수준에 올라설 수 있는 가능성을 웅변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그리고 박항서 감독은 2018년의 대미를 누구보다 특별하게 장식했다. 동남아시아의 월드컵이라 불리는 2018 AFF(아세안축구연맹) 스즈키컵에서 다시 한번 박항서 열풍을 크게 일으키며 10년 만에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감격을 누렸다. 태국과 말레이시아가 뜨거워진 자국 축구리그의 인기를 등에 업고 최고의 자리를 노렸지만 박항서 감독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베트남 축구 특유의 조직력에서는 빈틈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지난 15일 오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결승 2차전에서 베트남 선수들은 예상보다 일찍 터진 응유엔 아인득의 골(6분) 이후 지나치게 흥분하며 마침표를 찍어내기까지 경기 운영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항상 침착하게 대응하라는 박항서 감독의 지시에 따라 까다로운 마지막 고비를 잘 넘어 큰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선수들을 대할 때 강압적으로 지시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게임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선수들의 심리 안정을 유지하는 요령에 이르기까지 박항서 감독의 섬세한 지도력이 곳곳에서 빛났다. 

경기중에는 벤치를 박차고 나와 심판 판정에 분노하는 태도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이영진 코치와 적절하게 조화를 이뤄 엉뚱한 선을 넘지 않는 지혜를 보여주었다. 박항서 감독의 리더십은 축구 감독 그 이상의 가치로 다방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베트남을 넘어 한국 사회에도 큰 울림을 주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과 베트남의 아픈 역사를 생각해봐도 지금까지 어떤 외교관이나 정치인이 엄두도 내지 못했던 가교를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스포츠를 두고 단순히 그 성과에만 집착하는 것을 넘어 정말로 그 범위를 초월한 가치까지 생각하고 실천하게 만드는 역할을 박항서 감독이 해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덕분에 축구, 스포츠 그 이상의 가치와 의미를 논하게 된 2018년 우리 모두가 고맙고 기쁘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손흥민 박항서 이상화 최정 정현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천 대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축구 이야기,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