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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북한 작가 60여명의 판화, 남한에 내걸린다> 기사에서 김준권 작가와 김진하 아트디렉터의 허락을 받아 충북 진천군립 생거판화미술관에서 열리는 '평화, 새로운 미래-북한 현대판화전'을 소개했다.

이번에는 민족의 영산으로 남북이 모두 생각하는 백두산과 관련된 작품 1점과, 북한주민들의 삶을 그려낸 판화 5점을 소개한다. 이질감을 가질 수밖에 없던 분단의 비극을 넘어, 이젠 동질성을 회복하는 평화를 향해 한 발 먼저 내딛을 때다. 그러자면 우리도 북한의 생활상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홍춘웅 판화 백두산의 봄 ⓒ 정덕수
 
홍춘웅의 '백두산의 봄'은 풍경으로 미뤄 4월 중순 이후쯤 되겠다. 자작나무가 숲을 이룰 정도라면 해발 1500미터 이상 고원으로 보이는 원경과 멀리 아직 눈이 녹지 않은 백두산의 풍경이 평화스럽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북한의 산은 모두 헐벗었다"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나왔다. 기근이 들어 산의 나무와 풀뿌리를 모두 캐 먹어서란다. 그때 생각했다. 북한에서 우리처럼 전국에 고속도로를 내거라 산과들을 파헤쳤다면 뭐라고 하겠는가. "북한은 경제개발을 한다고 온 산과 들을 파헤쳐 자연이 모두 훼손됐다"고 주장할 거 아닌가.

작가가 상상력으로 작품을 그려낼 수도 있다. 그러나 풍경으로 미뤄 자작나무숲 사이에 자리한 분비나무와 진달래는 직접 현장을 스케치한 걸로 믿어야 옳다. 잎이 막 피어난 연초록의 자작나무와 아직 잎을 내지 않은 분비나무의 모습은 물론이고 진달래도 자연 속에서 만날 대의 풍경 그대로다.

1970년대 우리의 현실에 대한 기억

어렸을 때 북한사람은 새빨갛게 생긴 줄 알았다. 그리고 무조건 때려잡아야 되는 걸로 배웠다. 오죽하면 초등학생들의 인사말이 "승공"과 "반공"이었고, 그것도 넘어서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 일어난 북한군에 의한 미군 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한 사건이 발생한 직후엔 아예 "멸공"이었겠는가.

사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사건은 전 세계가 북한을 지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어린 아이들에게 귾임 없이 대한민국의 교육정책은 북한은 가난한 곳, 자식이 부모를 공산당에 신고를 하는 제도가 있는 불효막심한 곳으로 가르쳤다. '천 삽 뜨고 허리펴기 운동'은 물론이고, '샛별보기운동'으로 인민을 금성이 떠 있는 꼭두새벽부터 노동현장으로 내몰아 천 삽을 떠야 허리 한 번 펼 기회를 주는 악질들이 사는 곳으로 말이다.

그런 고된 노동을 하고도 배급량은 턱없이 부족해 죽도 제대로 못 먹고 산다고 배웠다. 하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 초반엔 북한이 우리보다 더 잘 살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그런 진실을 숨기고 북한을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새마을운동을 전개했다. 새마을 노래 첫 시작이 "새벽종이 울렸네"다. 새벽종이 울려 새아침이 밝았으니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만들라고 독려했다. 그러면서 빠트리지 않고 국민들에게 굳세게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 새 조국을 만들라 했다.

국가가 안전하게 국민을 지키니 국민은 안심하고 평화롭게 가정의 행복을 지키라는 말은 없었다. 초가집을 없애기 위해 슬레이트지붕으로 바꿨고, 대통령이 시찰을 나올 때면 급하게 시멘트 공장에서 찍은 넓적한 판을 기둥을 박고 끼워 맞춘 울타리로 눈을 가렸고, 집은 그대로 둔 채 도로에서 보이는 방향만 한 줄로 시멘트블록을 쌓아 마치 새롭게 집을 건축한 모양을 연출했다.

흙먼지 풀풀 날리던 6월, 논은 바짝 말라 모내기도 아직 못한 농촌에 박정희 대통령 각하가 지나가던 풍경을 기억한다. 물을 뿌릴 수 있는 차는 모두 동원돼 논에도 안 뿌리던 물을 신작로 바닥을 아깝게 뿌려 먼지가 안 일게 하던 모습이라니… 태극기를 휘두르며 박근혜에 대한 향수병에 걸린 이들에겐 정말 미안한 노릇이지만 이게 실상이고 진실이다.

농사철 모내기 현장에 한 번씩 나와 밀짚모자를 쓴 대통령이 노인들이 바치는 막걸리를 한 대접 마셔주는 사진을 찍고, 저녁이면 안가에서 양주를 마시며 민주인사들을 탄압해 항구적 독재를 구상한 게 진실이다. 박정희 시절 돌아가신 분들 모두 빨갱이가 아니다. 진정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독재에 항거한 분들임을 기억해야 된다.

북한, 과연 그들의 생활상과 우리의 추억은?

북한을 민중이 살지 못할 곳으로 가르치던 우리의 같은 시대상을 기억해봤다. 그렇다면 북한은 과연 배운 것처럼 그랬을까? 1970년대까지 전기보급률이 우리보다 좋았다. 자원이 풍부한 북한은 전쟁 전에 이미 전기를 생산할 수풍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경제여건 속에서 북한의 주민들의 모습은 우리 어머니와 누나들의 모습과 전혀 다를 게 없다.
 
길은성 판화 혼례식 하는 날 ⓒ 정덕수
 
길은성 작가의 '혼례식 하는 날'은 제목이야 문장의 구조가 조금 이상스러울 뿐, 예전 우리의 혼례 풍경과 다른 게 없다. 작품의 제작연대는 작품에 표기된 주체100년 오월로 확인되나 아주 오래전 분단 이전의 풍경으로 보인다. 혹은 1970년 이전 시골 풍경으로 보아도 무방하겠지만 복색으로 미뤄 지금과 같은 서양식 옷을 입은 사람이 한 명도 없기에 분단 이전이나 그보다 더 오래된 풍경일 수 있다.

'혼례 올리는 날' 정도로 제목을 정했다면 무리가 없었겠다. 신부집에서 가마가 막 나가기 직전의 모습으로 보이는데, 신랑집에 도착해 치르는 혼례식이라면 상이 보다 높고 닭이 상에 올려 있어야 된다.

이 작품은 아이들을 위한 책에 수록해,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를 잊지말라는 의미로 제작하지 않았나 싶다. 도록에 담긴 작품 가운덴 단군도 있는 걸로 미뤄 북한의 판화가 교과서나 아이들의 학습자료에 도판으로 다양하게 활용되었을 걸로 보인다.
 
황인제 우물가와 물동이 인 처녀 ⓒ 정덕수
 
황인제 작가의 우물가와 물동이 처녀는 1970년까지도 시골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던 풍경이라 낯설 않다. 1969년에 헤어진 어머니의 고리짝을 오래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 속엔 한복이 여러 벌 있었다. 흰 무명이나, 검게 염색한 무명으로 된 한복도 있었고 모시로 된 한복도 있었다. 그리고 양단으로 된 나염이 화려한 한복은 1977년에서야 치마를 뜯어 이불 청으로 썼다.

꽃무늬와 여러 전통의 문양들이 나염된 양단은 이미 옷을 지은 것 말고도 감만 준비해 두신 상태였다. 형의 결혼식을 앞두고 원앙금침만 감을 떠와 햇솜을 넣고 만든 다음, 남은 햇솜과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이불과 요에서 뺀 솜을 틀어온 걸 합쳐 어머니의 옷감과 치마를 뜯어 이불과 요를 여러 채 만들던 모습이 기억난다.

여인들의 한복 치마는 베틀로 짠 것은 물론이고 공장에서 넓게 짠 원단 모두 길이만 자를 뿐이다. 별도의 재단을 하지 않은 치마는 언제든 뜯으면 다른 옷감도 되고 이불이나 요의 겉감으로 이용했다.

이마저도 귀한 집에선 배급으로 받았던 미국산 밀가루자루를 모아두었다 이걸 활용해 아이들 옷을 지어 입히기도 했다. 1950년대 일곱 살이던 한 어른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있다. 할머니가 새 옷을 지어준다고 좋아했단다. 그런데 밀가루자루를 뜯은 뒤 지은 옷이 아래위가 붙은 '중우'라는 옷인데 이게 밑을 터놓아 볼일을 볼 땐 아주 편한데 입고 밖에서 놀기엔 난처했단다. 속옷이 있는 줄도 몰랐던 그 양반은 그래도 그 중우를 입고 나가서 놀았고, 그게 흉도 안 됐다고 하며 웃었다.

5살 때, 할머니께서 이 중우를 밀가루자루로 만들어 입혀 준 기억이 있으니 그 난감함을 기억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할머니와 어머니께선 옷을 시장에서 사 입지 않고 옷감을 떠와 집에서 등잔불이나 호롱불 밝히고도 달 지었다. 요즘 호롱불은 구경하기도 어렵지만, 이보다 밝은 전등불 아래선 책도 잘 못 읽는데 눈들이 상당히 좋았단 이야기다.
 
함창연 탄광 주민들 ⓒ 정덕수
 
함창연 작가의 '탄광 주민들'이란 작품은 기자도 1985년 병든 어머니를 모셔와 형님이 계시던 지금의 민둥산역이 있는 무릉리에서 한동안 광부로 살았던 기억을 되살려 골랐다. 작품은 주민들이라고 했는데 주민도 맞는 이야기겠지만 이들은 광부들이다.

캄캄한 어둠을 밝히는 안전등을 장착한 안전모를 쓰고 항으로 불리던 막장에서 채탄작업이나 굴을 뚫는 작업을 했을 광부들이 막 밖으로 나선 모습이다. 아침 교대조일 수도 있고, 오후 교대를 하는 작업반일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러닝셔츠만 입고도 밖으로 나올 정도라면 여름철로 보기에 무리가 없다. 그렇다면 먼데 풍경까지 볼 수 있으면서 채 끄지 않은 안전등 불빛이 빛을 내는 걸 보면 아침 작업반과 교대한 야간 작업조의 퇴근 모습으로 관찰된다.

우린 이 작업반을 병반(丙班)으로 불렀다. 아침에 출근해서 낮에 일하고 오후에 퇴근하는 조를 갑반(甲班), 오후에 출근해서 밤에 퇴근하는 조를 을반(乙班)이라 한다. 그 뒤를 이어 3교대로 일하는 조를 병반으로 해서 3교대 작업을 한다. 이와 같은 조편성으로 북한도 탄광을 운영하는 걸로 보인다.

이 작품에서는 잘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대체로 사실적으로 표현됐으나 광차가 운행하는 궤도의 폭이 사람과 비교했을 때 너무 좁다. 생활하기 위한 목적으로 선택적으로 취한 직업군인 우리의 광부와, 당의 지시로 맡은 직업군으로 우리가 아는 북한의 광부라면 의도적으로 광부를 당당하게 보이려 작가는 작업을 했을 수 있다. 자연히 덜 중요한 궤도를 작게 표현해 광부의 건강미를 돋보이려 하진 않았을까.
 
황복신 추석날 ⓒ 정덕수
 
황복신의 '추석날'은 목가적 풍경의 민속판화다. 그런데 제목이 어색하다. 추석날 떡을 친다면 이치에 안 맞으니 말이다. 떡은 추석 전날 미리 만들고 추석 당일엔 제사를 올리고 성묘를 가는 게 전통인데, 어떤 사연인지 몰라도 추석날 떡을 만드는 일을 한다니. 작가가 아마도 풍경은 보았으되 우리의 전통적인 세시풍습의 습성을 이해하진 못한 거 같다.

뭐 이런 제목의 오류는 그냥 넘어가고. 여인과 아이들은 두 집안의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들과 차별적인 표현기법이 눈길을 끈다. 상투를 틀거나 사내아이의 머리가 짧은 걸로 미뤄 근래의 시골 풍경인데, 화사하게 단장한 여인과 아이들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남자들은 차림이 수수하다. 아마도 떡메를 치는 고된 작업을 해야 되기에 아직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기 전인 모양이다.

시루와 함지, 그리고 사내아이 둘이 앉은 멍석은 물론이고 나무를 잘라 엮은 울타리와 장독대도 낯익은 풍경이다. 거기에 항아리에 금줄을 묶은 걸로 미뤄 된장이거나 간장을 봄에 새로 담근 모양이다. 다만 위도상으로 우리보다 위인 북한 아닌가. 경기도나 강원도라 하더라도 추석을 지나면 제법 추운 시기다. 그런데 병아리라니?

우리도 드라마나 영화, 그림 등 다양한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작품들에서 의도하지 않은 실수가 많다. 때대로 그걸 보며 웃게 되는데… 화질이 좋아진 요즘 TV에서 조선시대 사극을 볼 때 귀걸이를 했던 흔적이 뚜렷한 남자배우들의 귀는 아예 이야기도 안 한다. 하지만 가을 풍경을 그려낸 드라마에서 병아리가 화면에 등장하면 웃긴 이야기가 된다. 물론 양계가 발달한 요즘 부화기로 병아리를 냈다고 주장하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목가적 풍경에서 토종닭이 병아리를 가을 끝자락에 깐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끝으로…

북한의 판화를 통해 그곳 사람들의 생활상을 살펴봤다. 작가들의 의도적 장치였던 아니든 작품 속에 모순점도 찾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들에 대해 이해의 폭이 넓어야 함께 할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북한의 노래를 듣는다고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가 잡혀가는 세상은 이미 끝났다. '심장에 남는 사람'을 바이브가 불러 동인(瞳人·상대방의 눈동자에 비친 나의 모습이라는 의미)에 담겼고, 같은 음반에 '반갑습니다'도 마야가 부른 게 벌써 10년도 넘었다. "가사에 수령이나 당을 꼭 지칭하지 않아 北당국이 對南공작을 할 때 문화적 무기로 사용하기에 더 없이 좋은 노래가 바로 '심장에 남는 사람'이다."고 조갑제닷컴의 조갑제가 주장한 것도 이 노래를 여의도에 있는 한 카페에서 들은 뒤다.

북한을 고무 찬양하고자 하지 않고, 우리의 잘못만을 꼬집으려고도 안 한다. 그렇다면 북한의 판화작품을 전시하고 이걸 우리가 본다고 문제 될 일이 없다. 이를 통해 북한의 생활과 문화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넓혀 함께 손을 잡고 앞으로 나갈 민족임을 자각함이 옳지 않은가.

'평화, 새로운 미래-북한 현대판화전'은 3월 20일부터 5월 31일까지 충북 진천군에 있는 생거판화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립니다.

태그:#북한의 판화, #생거판화미술관, #김준권, #북한 판화전, #진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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