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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이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였다면 올해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 있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에 이어 이번에는 <현충원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서울현충원 4.3길 – ②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길 – ③서울현충원 5월길 – ④서울현충원 친일파길 – ⑤서울현충원 전직대통령길 – ⑥서울현충원 평화·통일길

오늘은 제주 4.3 71주년 추념일이다. 지난해 범국민적으로 진행된 70주년 사업을 계기로 제주 4.3에 대한 관심과 환기가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올해 제주 4.3 71주년을 맞이해 국립 서울현충원 '4.3길'을 걸었다.

물론 서울현충원 '4.3길'은 국립 서울현충원 측에서 조성한 길이 아니며, 기자가 조성하여 이름 붙인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제주 4·3과 베트남전 참전용사 묘역의 채명신 장군

현충원 정문에서 직진해 현충탑 오른편에 있는 2번 묘역 일대는 베트남전 참전용사 묘역이다. 이 묘역 제일 앞에는 '베트남전 참전의 영웅' '참군인' 등으로 불리며 주월한국군사령부 초대 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1926~2013)의 묘가 있다.
 
채명신 장군의 묘 베트남전 참전의 영웅으로 불리기도 하는 채명신 장군의 묘는 베트남전 참전용사 묘역 제일 앞에 있다. 채명신 장군이 육사 5기를 마치고 1948년 4월 10일 처음 부임한 곳은 제주4.3의 현장이었다.
▲ 채명신 장군의 묘 베트남전 참전의 영웅으로 불리기도 하는 채명신 장군의 묘는 베트남전 참전용사 묘역 제일 앞에 있다. 채명신 장군이 육사 5기를 마치고 1948년 4월 10일 처음 부임한 곳은 제주4.3의 현장이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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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명신 장군은 5.16 쿠데타에 가담했지만, 그 자신은 다른 정치군인과 달리 군인으로 돌아갔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베트남전 과정에서는 한국군의 독자적인 작전지휘권 보장을 관철시켰는가 하면 "한국군은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1명의 양민(민간인)을 보호한다"는 모토를 내걸고 사령관직을 수행했다.

채명신 장군은 2013년 사망하기 전에 "내가 죽거든 일반 사병묘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겨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채명신 장군 묘가 그의 유언을 제대로 반영한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도 많다.

'죽은 자의 정치학'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산 자들이 죽은 자를 활용하는 '산 자의 정치학'이라고 해야 할까. 채명신의 묘는 일반사병 묘와 '함께' 있지 않고 묘역 제일 앞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채명신 장군은 죽어서도 사병을 이끌고 있는 사령관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고향이 이북(황해도)인 채명신은 월남해 육사 5기로 교육과정을 마친 후, 4.3사건이 있은 직후인 1948년 4월 10일 제주 9연대에 소대장으로 첫 부임해 군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부임 후 불과 한 달 만에 김익렬 연대장이 해임되고, 이어 박진경(중령)으로 연대장이 바뀌는 경험도 한다.

6월 16일의 미군 비밀보고서에 이때부터 9연대 박진경의 작전으로 불과 44일 동안 "약 3000여명이 체포되고 심사를 받았다"고 했을 정도로 무고한 민간인을 마구잡이로 체포하는 등 강경일변도 작전을 펼친다. 당시 무장대는 50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채명신의 제주 4.3에 대한 경험은 전혀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이지 않다.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박진경 대령이) 양민을 학살한 게 아니라 죽음에서 구출하려고 했다, 4.3 사건 초기 경찰이 처리를 잘못해 많은 주민이 입산했다"라며 "그런데 박 대령은 폭도들의 토벌보다는 입산한 주민들이 하산하는 데 작전의 중점을 두었다"라고 말한 것으로 나온다.

그의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매일경제신문사)를 보면 "남로당의 인민해방군은 주민들의 배타성을 이용,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 총선거를 앞두고 이를 방해하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제주 4.3의 원인을 1947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대회 당시 벌어진 경찰 발포 사건으로부터 찾지 않고 남로당이 남한 단독 총선을 방해할 목적으로 4.3을 일으켰다는 왜곡된 인식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4.3 직후 무장대 대장 김달삼(본명 이승진)과 평화협상을 벌였던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을 "색깔이 불분명하고 미온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했고, '무모한 토벌을 막고 동족상잔을 피하기 위해 암살을 벌였다'고 주장한 문상길 중위에 대해서는 "좌익 사상에 물들어 김달삼 지령에 따라 연대장을 암살했다"라고 매도했다. 반면, 1948년 3월 한림면의 박행구를 고문으로 살해하는 등 제주 4.3의 한 원인이기도 했던 서북청년회 단원들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며 '용맹스럽다'고 했다.

채명신 장군이 주월한국군사령부 사령관 시절 내걸었던 "한국군은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라는 모토가 실제 현실과 너무나 큰 괴리가 있었다는 지적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 한국군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베트남전을 되돌아볼 때, 제주 4.3의 현장에 있었음에도 이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없었던 채명신·이세호가 베트남전 초대 사령관과 2대 사령관을 역임했다는 사실은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진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제주 시인 이종형도 베트남을 방문하고 쓴 시 <카이, 카이, 카이khai, khai, khai>에서 "쯔엉탄 아랫마을 깟홍사 미룡촌에서 태어난 판 딘 란/ 떨리는 목소리로 태어난 지 사흘 만에/ 호랑이 표식을 단 남한 병사에게 어미 잃은 사연을 얘기하는데" 어쩔 수 없이 "제주의 4월을 다시 떠올리고" 만다.

제주 4.3에서 배운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경험은 20년 후 베트남에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로 이어진다. 그리고 젊은 시절 베트남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던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의 신군부세력은 1980년 광주에서 자국민을 상대로 그렇게 쉽게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제주 4.3과 안재홍 당시 민정장관
  
애국지사묘역 무후선열제단에 모셔져 있는 안재홍의 위패 안재홍은 제주 4.3봉기가 일어났을 당시 미군정 민정장관의 지위에 있었고, 협상을 포기하고 본격적인 진압을 결정한 '5.5 최고수뇌 회의'에도 참석하였다.
▲ 애국지사묘역 무후선열제단에 모셔져 있는 안재홍의 위패 안재홍은 제주 4.3봉기가 일어났을 당시 미군정 민정장관의 지위에 있었고, 협상을 포기하고 본격적인 진압을 결정한 "5.5 최고수뇌 회의"에도 참석하였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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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애국지사묘역에 도착해 위쪽에 있는 무후선열제단으로 가면 왼편 깊숙한 곳에 안재홍(1891~1965)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된 안재홍은 북한 평양의 재북인사의 묘에 안장돼 있다. 안재홍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청년외교단과 신간회, 조선어학회 등에서 활약하면서 세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한 인물이었다.

안재홍은 미군정 치하에서 민정장관을 하던 시절 제주 4.3의 역사에 휘말린다. 그는 4.3이 일어난 지 한 달 후인 5월 5일 제주중학교에서 미 군정장관 딘(William F. Dean)의 주도로 제주 4.3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5.5 최고수뇌 회의'에 경비대총사령관 송호성,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제주지사 유해진, 제주경찰감찰청장 최천 등과 함께 참석한다.

이날의 회의에서 무장대 대장 김달삼을 만나 4.28 평화협상을 주도했던 김익렬은 협상이 깨지는 계기가 된 5월 1일의 '오라리 방화 사건'이 무장대가 벌인 것이 아니라 경찰의 소행임을 언급하며 온건 화평 전술을 주장한다.

하지만 강경 진압을 주장하는 조병옥이 "김익렬의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였고, 김익렬과 김달삼이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 동기"라며 자신을 '국제공산당 당원'으로 매도하자 격분한 김익렬은 조병옥에게 달려들어 주먹다짐까지 벌인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안재홍은 "이게 다 우리가 힘이 없어서 생긴 일"이라면서 눈물을 훔치기만 했다고 알려져 있다. 미군정의 민정장관임에도 실질적인 힘이 없는 당시 안재홍의 처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반면, 조병옥 당시 경무부장은 이미 1년 전인 1947년 3월 14일에 육지의 응원경찰 421명을 대동하고 제주를 방문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제주도 사건은 북조선의 세력과 통모하고 미군정을 전복하여 사회적 혼란을 유지하려는 책동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것"이라고 매도하면서 3.1 발포사건을 항의하고 사과를 촉구하는 총파업 관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시작한 인물이기도 했다.

제주 4.3의 두 얼굴, 9연대장 김익렬과 박진경
  
김익렬 장군의 묘 장군제1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김익렬은 제주 4.3 당시 9연대장으로 무장대 김달삼과 협상에 나서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미 군정장관 딘에 의해 해임된다.
▲ 김익렬 장군의 묘 장군제1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김익렬은 제주 4.3 당시 9연대장으로 무장대 김달삼과 협상에 나서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미 군정장관 딘에 의해 해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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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최고의 조망명소를 가지고 있는 장군제1묘역에는 제주 4.3 당시 무장대 대장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벌여 합의안을 도출해냈던 김익렬(1921~1988) 당시 9연대장의 묘가 있다. 그는 1965년 중장으로 예편해 장군 묘역에 안장돼 있다.

제주 4.3 당시 김익렬은 일관되게 "선 선무 후 토벌"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4월 18일 맨스필드 중령으로부터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앞서 무장대 지도자와 교섭하라는 지시를 받고 4월 22일 무장대에게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을 만들어 비행기를 통해 살포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4.28 평화협상의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본다.
② 무장 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③ 무장 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


하지만 미군정의 묵인 하에 경찰과 우익 청년단원이 일으켰음에도 '폭도'들이 벌인 행위로 왜곡된 5월 1일의 오라리 방화사건은 미군정 당국이 강경 진압작전을 전개하는 계기가 된다. '5.5 최고수뇌 회의'를 통해 미국의 딘 장군은 토벌 작전으로 방침을 정한다. 김익렬은 다음날 9연대장에서 전격 해임되고 여수 14연대장으로 전출된다.

김익렬은 유고록 <4.3의 진실>을 통해 "초토작전은 인도적으로 결코 허용될 수 없고 전시에도 명령하거나 묵인한 사령관은 전범으로 처형을 면키 어렵다, 하물며 전후(前後) 평화시에 자기가 군정하는 영토 내의 국민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고 세상에 알려지면 그 결과는 엄청날 수밖에 없다"라며 "전범재판을 받지 않는다 해도 그는 인도적으로 처형될 것이다"라고 회고하며 다시 한 번 입장을 분명히 밝힌다.

한편, 장군제1묘역에는 1948년 10월 제주를 방문해 초토화 작전을 독려한 채병덕(1914~1950) 당시 국방부 참모총장의 무덤도 있다. 초토화 작전은 1948년 11월부터 1949년 2월까지 진행됐다. 채병덕은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다.

김익렬의 뒤를 이어 같은 날 9연대 연대장에 취임한 박진경 중령(1920~1948)의 묘는 54번 묘역에 있다.

취임사에서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라고 말했던 박진경은 딘 장군의 명령에 충실하게 강경 토벌작전을 감행한다.

특히 '양민과 폭도의 구별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무조건 연행했으며, 딘 장군은 이를 '성공한 작전'으로 평가해 그를 대령으로 특진시키기도 한다. 그 결과 대령 승진 축하연을 끝낸 직후 부하 문상길 중위 등에게 취임 44일 만에 살해당한다.
  
박진경 대령의 묘 앞에 새겨진 표석 제주 4.3 당시 9연대 연대장으로 있으면서 44일간 주민 3천명을 잡아들여 조사한 박진경은 문상길 중위를 비롯한 부하들에게 살해당하였다.
▲ 박진경 대령의 묘 앞에 새겨진 표석 제주 4.3 당시 9연대 연대장으로 있으면서 44일간 주민 3천명을 잡아들여 조사한 박진경은 문상길 중위를 비롯한 부하들에게 살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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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오사카 외국어학교를 나와 영어에 능통해 미군과도 잘 통했다는 박진경은 일제 말기에 일본군 소위로 제주도에 주둔한 이력도 가지고 있었다. 제주 4.3의 희생자 대부분은 박진경을 비롯해 일본군 출신 연대장 4명(박진경, 최경록, 송요찬, 함병선)의 재임시절에 발생했다.

지난 2000년에는 박진경의 고향인 경남 남해와 학살의 현장 제주에서 '양민학살 박진경 동상 철거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추모비는 제주와 경남에서 아직도 굳건히 버티고 있다.

제주 4.3과 '산 사람들'로 위장한 특수부대 부대장 김명

33번 묘역에는 제주 4.3 당시 게릴라로 위장해 활동한 특수부대의 부대장을 맡았던 제2연대 작전참모 출신 김명(?~1950)의 묘가 있다. 김명의 특수부대는 민간인 복장을 하고 일제 99식 소총으로 무장한 채 산악을 배회하다 무장대와 만나면 사투리로 이야기를 하는 등 정보수집에 대단히 가치 있는 활동을 한 조직이었다.

김명의 특수부대는 붙잡힌 게릴라 유격요원 중 '전향'한 사람 50명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이중에는 여성대원도 있었다. 이러한 특수부대는 군대만이 아니라 경찰에도 있었다. 이 특수부대의 활동으로 '함정 토벌'에 당한 일반 주민도 많았다. 이들 특수부대는 특정 마을에 접근해 '산 사람'인양 위장해 주민들의 반응을 확인한 뒤 집단학살을 벌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제주읍 도평리 주민 피해사건이다. 1949년 1월 3일 허름한 갈중의(감으로 물들인 제주도 노동복)를 입고 총을 든 사람들이 마을에 나타나서는 '동무, 동무' 하며 악수를 청하더니 이번에는 집안으로 들이닥쳐서 "왜 너희들은 산에 협조하지 않느냐?"라며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켰다는 것이다.

이들이 '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챈 주민들이 "빨갱이면 싸우겠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들은 주민 70명을 총살했다. 이들은 외도지서 경찰과 특수부대원들이었다(<제민일보>, 1991. 4. 9).
 
2연대 특수부대원들의 사진 사진 왼쪽 아래에는 "暴徒(폭도)로 假裝(가장)코'라고 씌어 있어 이들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짐작케 한다.
▲ 2연대 특수부대원들의 사진 사진 왼쪽 아래에는 "暴徒(폭도)로 假裝(가장)코"라고 씌어 있어 이들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짐작케 한다.
ⓒ 제주4.3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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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에는 이밖에도 제주 4.3 무장대와의 전투 과정에서 무장대의 기습 공격으로 제주 오등리에서 사망한 2연대 3대대 소속 고병선 중위(사후 두 차례 특진을 통해 소령으로 승진)가 29번 묘역에 묻혀 있다.

한편, 제주 4.3에서 사망한 군인과 경찰 말고도 서북청년회, 애국단과 같이 당시 청년 단체에 속해 무장대 소탕 작전과 민간인 학살에 나섰던 인물들도 현충원에 묻혀 있는 경우도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후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도 제주 4.3과 결코 무관할 수 없는 인물이어서 그들의 무덤도 서울현충원 '4.·3길'에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오늘 서울현충원 4.3길 탐방을 마친다. 이승만은 전직대통령묘소에, 이범석은 제2 국가유공자묘역에 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으며,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와 <동작민주올레 가이드북>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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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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