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제주 4.3당시 행방불명된 이들의 집단묘역
▲ 행방불명자 묘역 제주 4.3당시 행방불명된 이들의 집단묘역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제주 4.3 사건 71주년이다. 제주 4.3은 아직도 정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채 중립적이면서도 모호한 성격의 '사건'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규정되고 있다. 그런데 71년 전에 발생했던 그 당시 역사가 '사건'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에는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4.3의 처음 이름은 '공산폭동'이었다. 정치적, 법적, 사회적으로 매우 엄격한 반공체제가 수십 년 동안 지속됐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의 제기나 재해석 등은 엄격하게 금지됐다. 그래서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그리고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위로 및 보상 등은 매우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볼 때 4.3이 '폭동'에서 '사건'으로 불리게 된 현재 상황은 그 자체가 역사의 진보다. 그리고 모든 진보의 과정이 그렇듯이 이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감수하면서 노력했다. 이 글에서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정치인 김대중의 정치적 실천과 그 배경을 살펴보려고 한다.

지금 시점에서 이와 같은 내용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1차적으로는 제주 4.3 사건의 해결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김대중은 제주 4.3에 대한 정치적 공론화를 처음으로 했고,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도록 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제주 4.3 문제 해결에 매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다른 하나는 김대중이 제주 4.3 문제에 대한 관심을 오래전부터 갖게 된 배경을 분석하는 건 역사적인 맥락에서 제주 4.3이 담론화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 4.3의 명예회복·진상규명을 최초로 요구했던 1987년의 김대중
   
1987년 평민당 대선후보로 유세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1987년 평민당 대선후보로 유세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이후에 4.3 특별법을 제정해 제주 4.3 문제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이미 상당히 알려졌다. 그런데 한국 정치인으로서 최초로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공론화해 제주 4.3 문제 해결을 위한 단초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제주 4.3 사건에 대한 김대중의 정치적 실천은 이미 1987년 대선 평민당 후보로 출마할 때부터 이뤄졌다.

"제주도민은 4.3의 비극을 겪었다. 나는 제주인의 한과 고통과 희망을 같이 하겠다. 나도 용공조작 피해자의 한 사람이다. 내가 집권하면 억울하게 공산당으로 몰린 사건 등에 대해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 주겠다." - 1987년 11월 30일 제13대 대통령선거 제주유세 때

이 때의 발언은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당시만 해도 제주 4.3은 정치적 금기어였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적으로 봐도 당시에는 제주 4.3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아는 사람도 매우 적었다. 학계를 중심으로 해서 조금씩 알려졌던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대중 정치인이 그와 같은 발언을 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김대중이 제주 4.3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 자체도 놀라운 일인데, 이것을 정치적으로 공론화한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당시 상황에서는 공산폭동으로 규정된 제주 4.3에 대한 이의 제기와 재해석은 정치 생명을 위태롭게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부담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대중은 용공조작과 색깔론에 의해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용공시비에 의한 국민들의 불안감으로 인해 득표에 있어서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김대중의 행동은 용기를 넘어서 매우 확고한 정치적 신념 차원의 결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김대중의 실천은 이때에만 국한되지 않고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뤄진다.

"4.3사건은 반드시 진상이 규명돼야 하며 특별법이 제정돼 억울한 원혼들의 넋을 달래 주고 유가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제주도민들이 절차상 필요한 내용의 국회청원을 제출해 달라." - 1989년 10월 22일 평민당 제주도당 결성대회 때

"수많은 도민이 희생된 4.3은 재조명돼야 한다. 4.3의 희생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수단과 방법의 정당화를 위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제주의 4.3은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요, 부끄러운 역사이다. 인권유린이 반공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거창주민학살사건'은 이미 주민청원이 있어 정부차원의 보상이 검토되고 있다. 제주의 4.3 역시 청원이 이뤄져 억울한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 - 1990년 7월 22일 제주방문 때

이런 발언에서 볼 수 있듯이 김대중은 1987년에 처음으로 제주 4.3 문제를 정치적으로 공론화했고,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4.3 특별법이 제정되도록 했다.

1979년 강창일에게 제주 4.3을 설명한 김대중
 
3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71주년 제주4·3 추념식 ‘4370+1 봄이왐수다’ 행사에서 유가족 이진순씨가 '아버지에게 부치는 편지'를 낭독하고 있다. 뒤로 희생자들의 명단이 일부 보인다.
▲ "아버지에게 부치는 편지" 낭독한 딸... 서울서 열린 제주4·3 추념식 3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71주년 제주4·3 추념식 ‘4370+1 봄이왐수다’ 행사에서 유가족 이진순씨가 "아버지에게 부치는 편지"를 낭독하고 있다. 뒤로 희생자들의 명단이 일부 보인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그러면 제주 4.3과 김대중은 무슨 관계가 있었을까? 김대중은 제주도 출신도 아니고 제주 4.3과 직접적인 관련도 없다. 더군다나 제주 4.3의 실체적 진실은 오랜 기간 은폐돼 있었다. 

1978년 현기영의 <순이삼촌>이 나올 때까지 이 문제는 정치사회적으로 거론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론될 수 없었다. 공산폭동으로 규정된 제주 4.3에 대한 반론 제기와 재해석 시도는 반공독재체제 속에서 엄격히 금지됐기 때문이다. 

그러면 김대중은 제주 4.3에 대해서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됐을까? 아니, 언제쯤부터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까?

이에 대해선 제주 4.3 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서 오랜기간 활동한 제주 출신 강창일 민주당 의원(4선)의 증언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강창일 의원은 2009년 8월 21일 김대중 서거 직후에 발표한 김대중에 대한 추도문에서 김대중과 관련된 과거 일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과거 유신체제 하에서 저희 청년 학생들은 선생님이 버팀목이 되어 주셨기에 흔들림 없이 민주화 투쟁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1978년 말 감옥에서 나오시고 이듬해 정초에 저희들 민청학련 관련자들 몇몇이서 동교동 자택에 세배하러 갔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가 제주 출신인 것을 아시고서는 제주출신의 목포상고 친구에 대한 추억과 제주 4․3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특히 4․3 당시 목포에 있으면서 그 실상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그리고 이 땅에 그러한 잔인한 역사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히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진실을 잘 모르는 저희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 후 대통령 선거 때마다 제주에 와서 4․3진상규명을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이 증언은 여러 면에서 중요하다. 우선 제주 출신 강창일 의원조차 1979년에 제주 4.3의 진실을 몰랐다고 말하고 있다. 제주 4.3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의 시작은 1978년 현기영의 <순이삼촌> 출간 이후부터인데, 그때까지는 일부 사람들만 알고 있었을 것이고 알아도 입 밖으로 말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더군다나 그 당시 완고한 통제체제 속에서 제주 4.3 문제에 대한 공론화의 확산은 불가능했다. 강창일 의원의 증언은 그와 같은 상황을 확인시켜준다.

김대중은 언제 제주 4.3의 진실 알았을까 
 
사진은 1987년 9월 8일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김대중이 유가족과 함께 통곡하는 모습.
 사진은 1987년 9월 8일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김대중이 유가족과 함께 통곡하는 모습.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관련사진보기

  
그러면 김대중은 언제부터 제주 4.3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됐을까. 공론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사건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특별한 개인적 체험이 수반돼야만 한다. 이는 1950년 목포 지역에서 있었던 좌우 학살과 당시 공산군에 의해서 목숨을 잃을 뻔했던 김대중의 경험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위 증언을 보면 김대중은 1979년 이전부터 제주 4.3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었다. 위 증언에서는 김대중의 모교인 목포상고에 있던 제주도 출신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만 나온다. 그런데 당시 목포와 김대중의 상황을 보면 좀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하다.

우선 김대중은 해운업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 목포와 제주도를 오가는 배편을 통해서 김대중은 제주도 상황에 대한 정보를 간접적으로 많이 접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제주 4.3 사건 관련 수백 명의 사람들이 당시 목포형무소에 수감돼 있었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1949년 9월에 목포형무소 탈옥사건이 발생했고, 그 와중에 수십 명의 사람이 죽었다. 아마도 이 사건은 그 당시 목포 지역을 떠들썩하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1950년 전쟁 발발 전에 김대중은 최소한 제주도에서 굉장히 큰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 정도는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고 민간인 학살 과정을 경험하면서 김대중은 제주도에서 발생한 사건의 성격을 상당히 진실에 가깝게 이해한 것으로 판단된다. 전쟁 발발 직후 목포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제주 4.3 관련 수감자 400명은 행방불명이 됐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시점은 공산군이 목포를 점령하기 이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대중은 공산군이 목포 지역을 점령한 이후에 역산으로 몰려서 공산군에 의해서 2개월가량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 당시 목포 지역을 점령하던 지역의 좌익들은 분명히 자신들이 목포를 점령하기 전에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학살사건을 거론하면서 수감된 우익인사들을 압박했을 것이다.

그 당시 김대중은 좌익에 의해서 학살 당할 위기에 있었다. 목포형무소에는 우익인사 220여 명이 수감돼 있었는데 전황이 불리해져 후퇴하게 된 공산군은 이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때 140여 명이 학살 당했고 학살이 잠시 중단된 틈을 타서 80명이 탈옥에 성공,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다. 김대중도 이때 목숨을 구한 것이다. 

좌우 학살의 비극을 체험한 김대중... 문제해결에 나서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좌우 학살에 의한 민족적 비극을 뼈저리게 체험한 김대중은 이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의 성격을 명확하게 인식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목포 지역에 있으면서 간접적으로 제주 4.3에 대한 내용을 접했을 김대중은 제주도에서 발생한 비극의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시점은 1950년부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한국의 독재 정권이 제주 4.3을 공산폭동으로 규정하면서 민간인 학살을 은폐하려고 했던 것에 대해서 김대중은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비판적으로 인식했었다. 그러므로 1979년에 벌써 그와 같은 발언을 했고, 제주 4.3 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적 실천에 선도적으로 나선 것이다.

제주 4.3 사건 발생 71주년을 맞이해서 이 사건 해결을 위해서 큰 역할을 한 김대중의 실천과 그 배경에 대해서 살펴봤다. 이 글이 김대중과 제주 4.3과의 관계를 해명하는 데에 있어서 조금이나마 기여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김대중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태그:#김대중, #제주 4.3
댓글7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