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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는 못했지만 나만의 미래를 꿈꾸며 현재를 성실히 살아가는 낙관주의자입니다. 불안하지만 계속 나아가는 X세대 중년 아재의 좌충우돌 일상을 소개합니다.[편집자말]
2019년은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이 되는 해다. 국가보훈처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역사다방'이라는 행사를 기획했는데, 내게도 패널로 참석해 달라는 제안이 왔다. 나는 역사 스토리텔러이자 책 <찌라시 한국사>의 저자 자격으로 참여하게 됐다.

'역사다방'이 열린 장소는 경북 안동에 위치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안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곳이다. 안동의 '내앞마을'은 1910년 기준 700여 명의 인구 중 무려 17명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됐다. 안동 하면 찜닭이나 하회마을만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은데, 가히 독립운동가의 성지라고 할 만하다.
 
임청각
 임청각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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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안동에서 독립운동을 이끈 주요 세력은 오늘날 학계에서 '혁신유림'이라고 불리는 분들이었다. 이 가운데 99칸 저택이자 독립운동의 산실인 '임청각'에서 태어난 석주 이상룡 선생을 소개할까 한다. 이상룡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내셨으며, 200억 원에 달하는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썼다.

이상룡 선생은 전 재산을 처분하고 간도로 떠나기 전, 안동 지역에서 최초로 노비 문서를 불태우며 "너희도 이제 독립군이다"라는 한 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정든 고향을 떠나려니 걸리는 게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조선 성리학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안동의 명문가 집안이기에 내부에서도 반대가 많았다고 한다.

"선비된 자로서 공부는 어찌하실 작정입니까?"
"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


그리고는 조상을 모시던 신주도 모두 땅에 묻고 먼 길을 떠났다. 가히 혁신 유림이라 불릴 만하다.

일제는 그의 생가인 임청각의 상당 부분을 훼손하고, 철도까지 내는 짓을 저질렀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속 고애신 (김태리) 의 대저택이 겪게 되는 아픔을 떠올리게 한다.

그거 정말 법도 맞아요?

나는 보수의 진정한 가치와 품격을 보여준 혁신유림에게 크게 감동을 받아 다른 자료들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이상룡 선생의 후손이 2019년 1월 <동아일보>와 한 인터뷰를 읽게 됐다. 유서 깊은 이 집안의 제사 지내는 법을 소개한 기사다.

임청각에는 대대로 문서 하나가 전해져 내려온다. 내용은 '제사를 지내는 방법'으로, 1744년에 작성됐다. 대체로 제사의 간소화를 강조한 내용이다.

더욱 놀라운 대목은 이들의 제사 횟수와 날짜. 임청각 종가는 매년 8월 15일 광복절 낮 12시 4대조의 제사를 한꺼번에 모신다고 한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온 집안이 모든 것을 버렸기에, 광복절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것이다. 유서 깊은 유림의 종가가 1년에 제사를 한 번만 지낸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더 충격적인 사실은 우리나라 유교의 상징과도 같은 퇴계 이황의 종가와 더불어 임청각도 추석 차례는 아예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여성분들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만세를 부르지 않을까? 사실 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끼어있는 남편들에게도 추석은 절대 반갑지 않다.

또한 임청각 종가는 설날의 경우에도 과일 4개, 포, 떡국까지 포함해 10가지가 넘지 않게 음식을 준비하고, 시댁 식구도 모두 함께 이 과정에 참여한다고 한다. 상상만 해도 모두가 즐거운 설날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하루를 시간 단위로 쪼개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는 사회 초년병을 알고 있다. 그에게는 1년에 3일밖에 휴가가 주어지지 않았기에 추석 연휴를 이용해 제주도로 떠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떠나지를 못했다. 법도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나는 혁신유림의 제사법에 감탄하며 우리의 명절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다. 추석 연휴까지 앞으로 다섯 달이나 남았건만, 명절 이야기가 나오면 벌써부터 괜히 몸이 경직되거나 심장이 뛰는 사람이 분명 있을 터.

명절 직후에 이혼율이 높아진다는 이야기는 이제 뉴스도 아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넋이 나간 상태로 근육통을 참아가며 제사상을 차리는 걸까? 명절 연휴가 시작되면 방송 뉴스에서는 해외로 떠나는 인파로 복잡한 공항의 모습을 비춰주곤 한다. 조상 덕 본 후손들은 명절에 해외로, 조상 덕 못 본 후손들은 전을 부치며 싸운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우리 주위의 평범한 가정들은 왜 제사와 차례의 간소화를 이루지 못하고 고통받는 걸까? 지레짐작으로 이것이 법도라고 생각하기 때문 아닐까?

다시 한 번 사실만을 전달하면, 안동의 유림 명문가이자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문인 이상룡 선생의 집안은 제사는 1년에 1회만 지내며, 추석에는 생략한다고 한다. 이 집안의 정신은 모두가 반드시 본받고 배워야 할 것이다. 제사의 법도를 포함해서 말이다.

직장인에게는 신혼여행을 제외하고 장기 휴가를 낼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명절 연휴다. 이 위대한 집안이 직장인 마음의 짐도 덜어주고 선택의 폭도 넓혀 주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조상들은 우리 스스로 부여 잡고 있는 제사의 멍에를 이미 벗겨 주었는지도 모른다.

태그:#혁신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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