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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플리트의 운치있는 골목길과 거리 답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여행객들로 가득한 나로드니 광장(Narodni trg)을 나와 스플리트의 최대 번화가인 마르몬토바 거리(Marmontova ul.)로 향했다. 반짝이는 하얀 대리석이 깔린 마르몬토바 거리는 깔끔하고 예뻤다.

이 거리의 이름에는 스플리트가 1806년~1813년의 짧은 기간 동안 나폴레옹의 통치를 받았을 당시의 영향이 남아있다. '마르몬토바'라는 거리 이름은 스플리트에 주둔하던 프랑스 마몽트(Marmont) 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마몽트 장군은 스플리트를 지배할 당시 스플리트에 도시개혁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그는 새 도로를 내고 건물을 세웠으며 스플리트에 처음으로 전기도 공급하였다. 스플리트 시민들은 그가 비록 외국인이었지만 그의 업적에 고마움을 느껴 가장 큰 번화가에 그의 이름을 남겨놓은 것이다. 스플리트가 수백년 외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마몽트 장군은 진정으로 스플리트를 위한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름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마르몬토바 거리를 걸으며 한 건물을 올려다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르몬토바 거리의 중심부에 약간은 난해한 아르느보 스타일의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인근 자다르 출신의 크로아티아 예술가인 카밀로 톤치치(Kamilo Tončić)의 작품인데, 기이한 느낌의 예술성이 흐르는 건축물이다.

건물 2층의 외부 벽면에 가득 붙어있는 조각상들은 귀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잔뜩 고함을 지르고 있는 모습이다. 그 위층에는 긴 머리카락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말을 거는 듯한 남자들의 조각상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20세기 초 격변기를 살았던 크로아티아인들의 삶의 모습이 전해져 오는 듯 했다.
 
건물벽에서 나온 물이 반원 모양을 그리며 거리의 잔 속으로 떨어진다.
▲ 피르야 분수. 건물벽에서 나온 물이 반원 모양을 그리며 거리의 잔 속으로 떨어진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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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내는 이 패션 거리의 여러 가게들을 구경하며 마르몬토바 거리의 북쪽 끝까지 걸어가 보았다. 거리의 끝에는 묘한 찻잔처럼 생긴 조형물이 있었다. 찻잔을 지나치려고 보니 건물의 벽면에 위치한 작은 조각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사진을 찍으려고 자세를 잡았지만 물줄기는 이내 멈추고 말았다. 물이 안 나오는 시간에 지나가면 이 조형물이 거리의 한 조각품으로 알고 지나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주변에 있던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이 조형물은 꽤 유명한 피르야 분수였다.

분수 물을 받는 잔이 크지 않아, 잔이 넘치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물이 튈까봐 조금씩 쉬었다가 물줄기를 내뿜는다고 한다. 몇 분 기다리다 보니 건물벽의 파이프에서 다시 물이 나와 반원 모양을 그리더니 거리의 잔 속으로 떨어진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참 독특한 형태의 분수였다. 그런데 건물벽의 조각을 자세히 보니 뭔가 이상했다.

물이 뿜어져 나오는 조각의 모양이 사람의 주먹 모양을 하고 있었다. 더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두번째 손가락과 세번째 손가락 사이에 들어가 있는 엄지 손가락에서 한줄기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더 웃기는 것은 엄지손가락 모양이 무언가를 닮은 것이, 무언가를 향해 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길 가던 한 스플리트 아저씨에게 물어보았다.

"저 손가락 의미가 무엇이지요? 손가락이 어느 방향을 가리키고 있나요?"
"저 손가락 방향은 정확히 자그레브예요. 자그레브를 향해 욕을 하고 있지요."


실제로 이 피르야 분수를 만든 조각가는 손가락 모양이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수도 자그레브에 대해 역사적으로 감정이 좋지 않은 스플리트 시민들은 손가락 욕이 자그레브를 가리키고 있다고 해석을 한 것이다. 이 분수는 크로아티아 제2의 도시로서 발칸반도 해안도시 중 가장 큰 도시인 스플리트에 사는 시민들의 자긍심이 담겨있는 분수인 것이다.

나와 아내는 스플리트에서의 거리 산책을 계속했다. 마르몬토바 거리는 스플리트 국립극장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1893년에 개관한 스플리트 국립극장은 스플리트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로서, 유럽 극장의 전형적인 건물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노란색 외관이 돋보이는 고풍스러운 건물에서는 클래식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건물 입구에는 이 달의 콘서트와 오페라의 공연시간표가 가득 붙어 있었다.

국립극장 바로 옆에 있는 성당은 1936년에 지어진 고스페 오드 즈드라빌리아 성당(Crkva Gospe od Zdravlja)으로 치유의 성모 성당(Church of Our Lady of Health)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현대적인 성당의 건축 디자인은 파격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마치 신전을 형상화한 듯한 성당의 전면은 모든 장식을 생략한 8개의 우람한 기둥만이 단순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성당 지붕 위,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십자가와 건물 끝에 걸려있는 종탑만이 이곳이 천주교 성당임을 알려주고 있다. 조용한 성당 외관과는 달리 성당 내부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예배를 보고 있었다.
 
숯불 위의 구멍 뚫린 솥에 군밤을 가득 굽고 있다.
▲ 군밤 파는 아주머니. 숯불 위의 구멍 뚫린 솥에 군밤을 가득 굽고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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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플리트 국립극장 앞을 다시 지나가는데 어디선가 군밤 냄새가 구수하게 퍼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먹던 군밤 냄새와 똑 같은 군밤 냄새였다. 주변을 보니 한 아주머니가 숯불 위의 구멍 뚫린 솥에 군밤을 가득 굽고 있었다.

군밤을 좋아하는 아내가 이곳을 지나칠 리가 없다. 아내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군밤을 가득 담아달라며 웃어보였다. 군밤 파는 아주머니는 아내의 즐거운 표정에 만족하였는지 내 사진기에 앞에서 자연스레 포즈까지 취해 주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벤치에 앉아 한가하게 밤을 까먹었다. 주변에서는 한 할아버지가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조용히 책을 읽던 할아버지는 식사시간에 맞추어 모여든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고양이들이 싸우지 않고 차분히 먹이를 받아 먹고 있다.
▲ 고양이 먹이 주는 할아버지. 고양이들이 싸우지 않고 차분히 먹이를 받아 먹고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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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얻어먹는 고양이들은 10마리나 됐다. 고양이들은 이 시간에 할아버지에게 오면 밥을 준다는 것을 알고 모여든 것 같았다. 여러 마리의 고양이들은 싸우지 않고 차분히 기다리며 밥을 받아 먹었다. 

군밤을 먹으며 벤치에서 쉬는 시간은 스플리트에서 가장 편안한 시간이었다. 주변에는 복작거리는 여행객의 무리도 없고, 잔뜩 모여들었던 고양이들도 모두 자신들의 영역으로 돌아가 주변이 조용해졌다. 군밤을 잔뜩 먹어서 배는 부르고 머리를 스치는 바람은 시원했다. 우리는 한동안 벤치에 앉아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언론미디어 중 오마이뉴스에만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체코, 슬로바키아 여행기를 게재하고자 합니다.


태그:#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여행, #스플리트, #스플리트여행, #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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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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