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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이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였다면 올해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 있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에 이어 이번에는 '현충원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서울현충원 4.3길 – ②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길 – ③서울현충원 5월길 – ④서울현충원 친일파길 – ⑤서울현충원 전직대통령길 – ⑥서울현충원 평화·통일길 

"1980년 5월 00일 광주에서 전사"한 군인이 있다고?
  
5.17계엄군의 묘 묘비 뒷면에 "1980년 5월 24일 광주에서 전사"라고 씌어 있어 5.18민주화운동의 역사 왜곡 현장이기도 하다.
▲ 5.17계엄군의 묘 묘비 뒷면에 "1980년 5월 24일 광주에서 전사"라고 씌어 있어 5.18민주화운동의 역사 왜곡 현장이기도 하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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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에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 신군부세력의 5.17쿠데타군에 가담했다가 숨진 22명의 계엄군 묘가 있다. 19기의 일반사병 출신 묘는 28묘역에, 3기의 장교 출신 묘는 29묘역에 있다.

광주에 있는 5.18국립묘지에 당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가 사망한 시민들이 안장돼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5.18민주화운동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시에 국립묘지에 묻혀 있는 묘한 모양새다.

특히 계엄군 묘비 뒷면에 새겨진 "1980년 5월 00일 광주에서 전사"라는 부분은 심각한 역사 왜곡으로 즉각 정정돼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국어사전을 보면 '전사'는 "전쟁터에서 적과 싸우다 죽음"으로 정의돼 있다. 그렇다면 1980년 5월의 광주는 전쟁터였고, 광주시민은 대한민국의 적이었단 말 아닌가.

사실 5.18민주화운동은 전두환 신군부세력의 왜곡과 날조로 한동안 '광주사태'로 불렸고, '폭도들의 난동'으로 매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1988년의 광주청문회를 시작으로 광주시민들의 명예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1995년 말에 이르러 5.18특별법이 제정되고 전두환·노태우 등 쿠데타 세력이 처벌되면서 광주시민들의 항쟁은 비로소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됐다. 특히 5.18민주화운동 17주년을 맞는 1997년에는 5월 18일이 국가기념일인 '5.18민주화운동 기념일'로 지정됐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움직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 바로 세우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6년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광주시민을 학살한 176명의 무공훈장을 박탈하는 조치가 단행됐다. 이때 현충원에 '전사자'로 묻힌 22명 계엄군의 화랑무공훈장과 인헌무공훈장도 당연히 포함됐다.

그런데 당시 훈장을 박탈하면서도 역사 왜곡의 생생한 증거인 계엄군의 묘비에 주목하지 않은 일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대목이다. 여기에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일반사병은 희생자의 측면도 있으니 그대로 두더라도 지휘관에 해당하는 영관급 묘 2기(차정환, 변상진)는 이장을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마저 나오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전사'를 '순직'이나 '사망'으로 바꾸는 조치를 더 이상 미룰 이유는 없다.

최근 자유한국당 내에서 '5.18 망언'이 터져나와 사회적 공분이 일었다. 하지만 한국당이 망언 3인방(김진태·김순례·이종명)에 물징계를 내려 논란이 더욱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자칫 '국가마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정작 12.12쿠데타에 맞서다 '전사'한 김오랑 소령-정선엽 병장은 '순직'
 
29묘역에 있는 육군중령김오랑의 묘 김오랑은 1979년 전두환 신군부세력의 12.12쿠데타 당시 정병주 특전사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는데, 반란군에 맞서 총격전을 벌이다 7발의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 29묘역에 있는 육군중령김오랑의 묘 김오랑은 1979년 전두환 신군부세력의 12.12쿠데타 당시 정병주 특전사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는데, 반란군에 맞서 총격전을 벌이다 7발의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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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번 묘역에는 1979년 전두환 신군부세력의 12.12쿠데타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김오랑 중령(1946~1979, 사망 당시는 소령)의 묘가 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최규하의 재가도 없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하면서 시작된 12.12쿠데타는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 이건영 3군사령관, 윤석민 참모차장, 문홍구 합참본부장을 연이어 체포한 뒤 9사단장 노태우와 50사단장 정호용이 각각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에 취임함으로써 군부는 반란 세력에 의해 장악되고 말았다.

이때 정병주(1926~1989) 당시 특전사 사령관의 비서실장을 맡고 있던 김오랑 소령은 송파구 거여동의 특전사령부 건물에서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하기 위해 들이닥친 12.12쿠데타 가담한 3공수여단 15대대 병력 10여 명과 격렬한 총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김오랑 소령은 온몸에 총탄 일곱 발을 맞은 채 숨졌다. 정병주 사령관도 왼팔에 관통상을 당한 채 체포돼 보안사의 서빙고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당시 신군부에 맞섰던 정병주 사령관은 장군1묘역에, 장태완 수경사 사령관(2010년 사망)은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돼 있다.

전두환 신군부세력의 12.12 쿠데타에 맞서 싸웠던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오랑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은 그래도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하지만, 쿠데타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정선엽 당시 육군병장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국방부 경비 헌병으로 근무하던 정선엽 병장은 '국방부를 사수하라'는 국방부 장관과 차관의 명령을 받고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연결하는 지하벙커를 사수했다. 그러던 중 1300여 명의 반란군에 홀로 맞서다 장렬히 전사했다. '참군인'이다. 

12.12쿠데타 당시 반란군으로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장악했던 1공수여단(단장 박희도)의 일지에는 "벙커 출입구 헌병 근무자 2명 중 1명 체포, 1명은 반항 사격과 함께 벙커로 도주 사살됨"이라고 기록돼 있다.

당시 정선엽 병장은 23세로 5남매 중 넷째로 광주 동신고를 졸업하고 조선대 전기공학과 2학년 재학 중 입대해 전역을 불과 3개월 남기고 있었다. 정 병장의 어머니 한점순(2008년 작고)은 1995년 12월 12일 아들의 묘 앞에서 "아들아, 네가 죽음으로 항거했던 쿠데타가 이제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되는 모양이다"라고 전하면서 "선엽이가 그때 갖고 있던 총을 순순히 반란군에 건네줬으면 목숨만은 건질 수도 있었을 텐데... 12.12 반란군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경향신문> <한겨레신문> 1995.12. 12. 기사 참조).
 
정선엽 병장의 어머니 한점순의 생전 인터뷰 기사(<경향신문>, 1995. 12. 12) 12.12쿠데타 당시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연결하는 지하벙커를 지키고 있던 정선엽 병장은 쿠데타군의 항복 요구를 거부하고 총격전을 벌이다 '전사'하였다.
▲ 정선엽 병장의 어머니 한점순의 생전 인터뷰 기사(<경향신문>, 1995. 12. 12) 12.12쿠데타 당시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연결하는 지하벙커를 지키고 있던 정선엽 병장은 쿠데타군의 항복 요구를 거부하고 총격전을 벌이다 "전사"하였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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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엽 병장이 안장돼 있는 8묘역은 12.12 쿠데타에 동원됐다가 육군참모총장 관사에서 숨진 박윤관 상병의 묘도 있다. 비록 쿠데타군으로 사망했지만, 박윤관 상병 역시 전두환 신군부세력에 동원된 피해자였다.

정선엽 병장의 형 정훈채는 "둘 다 억울하게 숨진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박 상병은 신군부 쪽이어서 당당하게 장례를 치렀는데 비해 우리는 진압을 당한 입장이라 처음엔 국립묘지에 묻힐 수도 없었다"라면서 "신군부 측이 처음에는 아들이 '반혁명군'이라며 국립묘지 안장을 거부했었다"라고 당시 상황을 전하기도 했다(<경향신문>, 1995.12. 12. 기사 참조).

그런데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김오랑 소령과 정선엽 병장의 묘비에는 '순직'이라고 표기돼 있다. 5.17계엄군의 묘비에 '전사'라고 적혀 있는 것이 역사 왜곡이라면, 12.12쿠데타 당시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김오랑 소령과 정선엽 병장의 묘비에 '순직'이라고 적혀 있는 부분 역시 역사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12.12쿠데타나 5.17쿠데타가 군사반란으로 규명되고,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처벌받는 변화가 있었지만,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여전히 그런 변화가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전두환·노태우·정호용이 베트남전에서 실전 경험을 얻었기 때문"

서울현충원에는 지난번 '서울현충원 4.3길'에서도 걸었던 베트남전참전용사묘역이 있다.

베트남전에 파병된 한국군의 규모는 10년간 연인원 32만 명이 달한다. 그중 5099명이 사망했고, 참전 장병 중 상당수가 지금까지도 고엽제 피해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평가는 종전 46주년을 맞는 2019년에도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그중 한국군 사망자의 2배에 가까운 베트남 민간인이 한국군에 의해 학살됐다는 사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가장 첨예하고 민감한 주제다. 대한민국이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젊은이들에게 피를 흘리게 한 것도 모자라 그렇게 많은 베트남 민간인의 학살도 불가피했다고 본 '국익'은 무엇이었을지 여전히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이와 관련해 2017년 공개된 미국 국방정보국(DIA)의 비밀문서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5.18민주화운동 직후인 1980년 6월 11일 미군 정보요원(한국계)에 의해 생산된 이 문서는 '한국인에게 공개 금지'라는 꼬리표와 함께 본국으로 타전한 2급 비밀문서였다.

이 문서에는 "한국군의 동떨어지고 잔인한 처리는 현 군부의 실세인 전두환·노태우·정호용이 모두 한국전쟁이 아니라 베트남전에서 실전 경험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돼 있다. 또 6.3항쟁과 같은 "1960년대 초반의 사건에 비해 대응이 훨씬 잔혹했던 것도 그 이전의 선배 장교들과 달리 군 수뇌부들이 베트남에서 경험을 쌓았기 때문"이라면서 "한국군이 점령군의 태도를 견지하면서 마치 광주시민을 외국인처럼 다뤘다"라고 했다.

이 비밀문서는 1980년의 광주를 미군이 베트남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마을 '미라이'에 빗대 '한국의 미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뼈아픈 비판적 평가의 근거와 내용이 추가된 셈이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순직한 경찰의 묘

정선엽 병장이 안장돼 있는 8묘역에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 순직한 이세홍·박기웅·강정웅 경장과 정충길 경사 등 함평경찰서 소속 경찰 4명의 묘가 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숨진 순직 경찰의 묘 8묘역에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위대의 버스에 치여 숨진 박기웅, 이세홍, 강정웅 경장과 정충길 경사의 묘가 있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숨진 순직 경찰의 묘 8묘역에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위대의 버스에 치여 숨진 박기웅, 이세홍, 강정웅 경장과 정충길 경사의 묘가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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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1980년 5월 20일 광주 동구 노동청 청사 앞에서 전남도청 경찰저지선 방어 임무를 수행하던 중 시위대가 몰던 버스에 치여 숨졌다. 최루탄 가스로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버스 운전수가 핸들을 틀다 안타까운 사고가 나고 말았다.

73주년 경찰의 날을 맞이하여 2018년 10월 22일 이들 순직 경찰관들을 기리는 '5.18 순직경찰관 부조상 제막·추념식'이 전남지방경찰청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정충길 경사의 아들 정원영은 "수십 년째 누구도 내 잘못·내 책임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이 역사와 죽음은 광주의 5월을 소요 사태로 만들어 계엄작전을 펼치고 민주화 열망을 꺾은 신군부와 그 수장인 전두환·노태우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매일경제> 2018. 10. 22. 기사 참조).

이들 순직 경찰관이 서울현충원에 안장되는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시민의 안전을 생각하며 시위진압에 소극적이었던 경찰에 대한 신군부가 '괘씸죄'를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망한 지 2개월을 훌쩍 넘긴 7월 31일에야 안장될 수 있었다.

이들 경찰의 묘비에 5.17계엄군 묘와는 달리 '전사'가 아닌 '순직'이라고 새겨져 있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최소한의 일관성조차 갖추지 못한 '군사깡패 집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민주인권 경찰'은 어떻게 그 시대를 살아갔는가, 안병하 치안감 묘
 
안병하 5.18 당시 전남도경국장의 묘 전두환 신구부세력의 '경찰도 무장하라'는 요구에 불응했다가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던 안병하 경무관은 '민주인권경찰의 표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 안병하 5.18 당시 전남도경국장의 묘 전두환 신구부세력의 "경찰도 무장하라"는 요구에 불응했다가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던 안병하 경무관은 "민주인권경찰의 표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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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경국장으로 광주·전남 지역 치안을 책임지고 있던 안병하 경무관의 묘도 서울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안병하는 전두환·노태우 등 5.17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 세력으로부터 시민들의 저항에 맞서 경찰도 '총기로 무장할 것'과 '강경진압'을 요구받았다. 하지만 안병하는 이에 불복하고 경찰의 비무장을 지시했다.

그는 4.19혁명 당시 경찰의 발포 장면을 떠올리면서 '경찰이 더 이상 역사의 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로써 안병하는 위기에 처한 경찰을 구해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대신 안병하는 서슬퍼런 신군부 세력의 횡포로 인한 수난을 스스로 감당해야만 했다. 직무유기 혐의로 직위 해제된 안병하는 악명 높은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해야 했다.

결국 강제 사직되면서 경찰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는 6월 민주항쟁이후 1988년 여소야대 국회에서 광주청문회가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광주사태'의 원인으로 "과격한 진압으로 인한 유혈사태로 시민 자극" 등의 내용을 담은 비망록을 정리한다.

하지만 그는 청문회엔 참석도 못한 채 1980년에 당한 고문 휴유증으로 청문회 직전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안병하는 1992년 5.18유공자로 인정됐고, 2005년에는 서울현충원 경찰묘역에 안장됐다.

안병하의 애민정신이 담긴 민주인권 경찰의 모습은 뒤늦게 주목을 받았다. 그는 2017년 촛불혁명의 결과 새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 아래에서 '올해의 경찰영웅'으로 선정됐다. 이어 전남도경 1층에 흉상이 건립되는가 하면 11월에는 경무관에서 치안감으로 승진 추서됐다.

한편, 2018년 5월에는 이준규(1980년 당시 목포경찰서 서장)의 사연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다. 그는 시민의 피해를 막기 위해 안병하 도경국장의 방침에 따라 기동경찰대의 총기를 회수해 인근 고하도로 옮겼다. 이 행동이 신군부의 노여움을 사 그는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고 파면됐다. 더군다나 안병하 경무관보다 먼저 1985년에 사망하고 만다. 고문 후유증 때문이었다.

1980년대에도 자신의 목숨보다 시민의 생명을 우선시한 의로운 경찰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서울현충원 5월길'에는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의 묘도 포함돼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5.18 민주화운동의 배후로 지목, 김대중내란음모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신군부 세력에 사형 언도를 받았다. 그 역시 광주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앞장선 인물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1983년 5.18민주화운동 3주기를 맞아 단식투쟁을 전개하면서 광주의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했는가 하면, 대통령 시절인 1995년에는 5.18특별법 제정과 전두환·노태우 전격 구속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두 대통령의 묘는 '서울현충원 전직 대통령길'에서 걷기를 기약하면서 오늘은 걷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으며,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와 <동작민주올레 가이드북>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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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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