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늘 또 택배 상자가 집에 도착했다. 상자 안에는 어김없이 책이 들어있다. 책을 상자에서 꺼내 바닥에 쌓아 놓는다. 한 번 훑어볼 생각으로 일단 바닥에 두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책을 꽂아 둘 곳이 없어서다. 책장은 이미 포화상태. 그리하여 우리 집 바닥에는 자리를 찾지 못한 작은 책탑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다.

책장을 보고 있자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쳐다보게 된다. 재미있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지만 결국 심란함만이 마음을 가득 채우곤 한다. 이 책들을 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버려? 말아? 버리자니 아쉽고, 갖고 있자니 짐스럽다.

'그래! 결심했어! 올여름은 책장 정리의 계절이다!' 내 집에서 곧 퇴거하게 될 책들이 대참사를 앞두고 억울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듯하다. '가만있어 보자. 책장 정리를 하려면 또 책장 정리에 관한 책을 봐야지. 그게 어디에 있더라. 저기 어디쯤에 있었던 것 같은데… 찾았다!' 그렇게 '책장 대 정리'의 거사를 앞둔 내 손에 들려진 책, 바로 <책장의 정석>이다.

 
<책장의 정석>, 나루케 마코토 지음, 최미혜 옮김, 비전코리아(2015)
 <책장의 정석>, 나루케 마코토 지음, 최미혜 옮김, 비전코리아(2015)
ⓒ 박효정

관련사진보기

   
<책장의 정석>의 저자 나루케 마코토는 1955년 훗카이도에서 태어나, 1979년 주오 대학 상학부를 졸업하고 1991년에 36세로 마이크로 소프트의 일본 법인 사장으로 취임하여 2000년까지 역임했다.

2000년에 투자 컨설팅 회사 인스파이어를 설립하고 2011년 서평 사이트 <HONZ>를 개설했다. 현재 인스파이어 이사, 스루가 은행 사외이사, 와세다 대학 비즈니스스쿨 객원교수이다. 비즈니스계에서도 유명한 독서가로, 산케이신문, 주간아사히 등에 서평을 연재하고 있다.

그는 책을 적어도 1년에 200권은 읽는다고 한다. 다독가이자 서평가이기도 한 그는 이 책에서 고심 끝에 세운 자신만의 '책장의 룰'과 서점을 돌아다니면서 인상 깊었던 서가의 사진도 보여준다. 그 밖에 저자가 책을 읽는 방법, 그리고 서평을 쓰는 법까지 그만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담았다. 책을 좋아하고 간간이 서평도 쓰는 나로서는 여러 가지로 얻을 게 많은 귀한 책이다.

<책장의 정석>은 내가 본 서재 관련 책 중에서 가장 단호하고 자기만의 철학이 뚜렷하게 담긴 책이다. 나루케 마코토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이상적인 책장은, 내가 꿈꾸던 책장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집에 두고 쓸 책장은 일반적인 책장보다는 조금 낮은 4단 x2 열의 총 여덟 개의 칸으로 구성된 책장 하나면 충분하다.  
 
<책장의 정석> 87쪽에 실린 '메인 책장'의 모습
 <책장의 정석> 87쪽에 실린 "메인 책장"의 모습
ⓒ 박효정

관련사진보기

  
저자가 추천하는 책장 구성은 이렇다. 오른쪽 위에서부터 첫째 단에는 과학 책, 둘째 단에는 역사 책, 셋째 단에는 경제 관련 책, 넷째 단에는 무거운 책을 꽂는다. 그리고 왼쪽 위에서부터 첫째 단은 '특별 전시' 테마로 꾸미고, 둘째 단에는 사건과 사회 관련 책, 셋째 단에는 문화, 예술 관련 책, 넷째 단에는 앞으로 처분할 책을 꽂는다. '특별 전시'칸은 그때그때 내가 관심이 있는 분야의 책을 장르 불문하고 모아 전시하는 곳이다. 관심사가 변함에 따라 당연히 이 '특별 전시'의 테마도 바뀐다.

위에서 설명한 책장이 '메인 책장'이라면 이 '메인 책장'에 들어가기 전, 새로 산 책들은 '신선한 책장'이라 부를 수 있는 곳에 정리해둔다. 책장이라고는 하지만, 굳이 책장은 필요치 않고 집에서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는 장소에 쌓아두면 된다. 밖에 나갈 때에도 이 '신선한 책장'에서 적당해 보이는 한 권을 갖고 나가 틈틈이 읽으면 좋다. 그러니까 '신선한 책장'은 '메인 책장'으로 가는 선발 장소이다. 여기서 '메인 책장'으로 갈지, 처분할 책이 될지 그 운명이 갈린다.
 
책장은 신진대사가 원활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책을 버리기는 어렵다. 특히 이 <메인 책장>에 있는 책은 <신선한 책장>에서 선발된 책이기 때문에 버리기가 더 어렵다. 조금 시간을 갖고 고민하고 싶다. 이럴 때 왼쪽 제일 아래에 있는 '앞으로 처분할 책'칸이 활약한다. 먼저 <메인 책장>에 넣지 않기로 한 책은 일단 그 칸에 둔다. 이 칸은 수납 효율을 최우선으로 한다. 위에까지 쌓아서 꽉꽉 채워도 좋다. 칸이 가득 차면 모인 책을 어떻게 할지 결정한다. 여기에 모인 책은 한 번은 <메인 책장>에 있던 책인 만큼 재미있고 유용하다. 다만 더 재미있고 유용한 책이 등장했기 때문에 자리를 잃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패자부활도 가능하다. 내 경우 30퍼센트 정도는 부활한다. 이 칸에 넣으며 다시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다. 버리기로 결정한 책은 <신선한 책장>에는 들어갔지만 <메인 책장>에는 다다르지 못한 책과 마찬가지로 처분한다. (118쪽)

저자의 책장에 대한 철학은 대단히 확고하다. 저자는 책장이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저자에게 책장은 '뇌를 스쳐 간 정보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두는 곳'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필요할 때 제까닥 찾아낼 수 있는 책장이면 그걸로 충분하다. 한마디로 책장은 나의 부족한 기억력을 보조하는 보조 장치가 되어야 하고, 지식의 백업 장치여야 한다.   

내 책장은 어떤가? 지식의 백업 장치라기보다는 추억의 앨범이고, 상당 부분 나의 지적 허영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읽은 책과 읽지 않은 책이 3:7 정도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움베르토 에코의 말을 인용해 변명처럼 내뱉곤 한다. "아! 이 책들이요? 다음 주에 읽을 책들입니다. 아니, 책장에 이미 읽은 책을 꽂아놓는 사람도 있나요?"
 
우리 집 책장의 모습. 이 밖에도 식탁 위, 책상 밑, 상자 안, 바닥 곳곳에 책들이 쌓여 있다.
 우리 집 책장의 모습. 이 밖에도 식탁 위, 책상 밑, 상자 안, 바닥 곳곳에 책들이 쌓여 있다.
ⓒ 박효정

관련사진보기

  
이제 변명은 그만하고 싶다. 나의 추억이 담긴 책들은 아쉽지만 눈물을 머금고 처분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읽은 책들도 다시 읽을 필요성이 없는 책들은 처분할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은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읽을 건데, 정말 읽을 건데…' 일단 보류. 일단은 이미 읽은 책들을 정리하자. 나만의 '궁극의 리스트'가 가지런히 꽂힌 책장을 그리며, 그때까지 이 책을 나침반 삼아 천천히 책장 정리를 해 나갈 것이다.  
 
책장에 책을 꽂다 보면 책 이외의 것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바로 현재 내가 무엇에 흥미가 있는지,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는지다. 의식하지 못하던 자신의 머릿속이 눈앞에 드러나 있다. 눈에 보이면 '다음에는 이 종류에 힘을 줘 봐야지', '이제 이 분야는 읽을 필요가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책장 정리를 목적으로 이 책을 손에 든 사람은 우선, 용기와 결단력을 갖고 책장에 둘 책과 뺄 책을 구분하길 바란다. 누구나 책장에 필요 없는 책 몇 권쯤은 갖고 있다. 재미없는 책, 기대에 어긋난 책, 큰맘 먹고 장만해서 차마 못 버린 책까지. 세상은 변하고 나는 성장한다. 그 사이 필요 없는 책은 계속 생길 테고, 책장은 달라져야 한다. (19쪽)

책장의 정석 - 어느 지식인의 책장 정리론

나루케 마코토 지음, 최미혜 옮김,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2015)


태그:#책장의정석, #나루케마코토, #비전코리아, #책장정리, #책장의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