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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가을, 삶이 불안했던 엄마는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용인에 위치한 마을 '황새울'로 이사했다. '황새울'이라는 이름의 마을에는 당시 총 50가구가 살고 있었다. 지금은 양계장으로 가득한 상업적인 지역이지만 그때만 해도 텔레비전을 가지고 있는 집이 별로 없어서 동네 사람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함께 TV를 보는 오붓한 강촌 동네였다. 아빠는 여전히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새벽마다 경매 일을 하며 한 달에 한 번씩 집에 왔다. 

엄마 윤정모는 17평 작은 집을 짓고 본격적으로 생계형 작가가 되었고 나는 자연 속에서 자랐다. 엄마는 '작은 밭에서 유기농으로 농사를 지어보겠다'며 비료나 농약 없이 과일과 채소들을 키우려고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해 동네 아주머니들의 도움을 받곤 했다.

읍내에 가는 길이 참으로 멀었다. 한 시간 정도 버스정류장까지 걸어 간 후 거기서 또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넘게 가는 행군이어서 몇 달에 한 번씩 가서 생필품을 잔뜩 사왔다.

엄마는 용감했다
 
국가원수모독죄 윤정모
▲ 국가원수모독죄 윤정모
ⓒ 윤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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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겨울, 그 시골로 형사 두 명 찾아와 엄마를 불러냈다.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찾아온 거야. 그 말한 거 맞냐고."
"무슨 말?"
"전두환 살인마..."


그때만 해도 전두환이 정권을 잡고 있던 어두운 시절이었다. 속으로는 생각해도 겉으로는 뱉을 수 없는 무서운 말을 엄마는 무슨 용기로 한 걸까?

"내가 그때 새해 인사드리러 담당 교수님이셨던 이호철 선생님 댁에 다녀올 때였어. 택시를 탔는데 '땡전뉴스'(그때는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나 정각이 되면 전두환에 대한 뉴스가 나와서 땡전뉴스라고 불렸다)가 나오더라고. 그래서 '전두환 살인마'라고 했지. 택시기사가 쿵짝을 잘 맞춰줘서 한참 이야기하다가 설날에도 일하느라 고생한다며 잔돈까지 주고 내렸어."

그러나 택시 기사는 그 길로 경찰서에 가 엄마를 신고했다. 형사들이 엄마를 찾아오는 데 이틀 정도 걸렸다고 한다. 글로 쓴 것도 아니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말한 것도 아니었다. 엄마는 단지 택시 기사와 나눈 대화 때문에 연행까지 됐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때는 그게 전부였잖아. 독재정권을 지키는 것, 광주항쟁을 은폐하는 것 그리고 그에 반하는 사람들을 감시하는 것. 그러니 나를 쉽게 찾을 수 있었겠지. 형사들이 택시에서 그런 말을 왜 했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그랬지. '살인마 맞잖아요. 제가 했어요. 그래서 뭐요'라고."
 
거센 항의 받으며 광주법원 떠나는 전두환 전두환씨가 11일 오후 광주지법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관련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 재판에 참석한 뒤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으며 법원을 떠나고 있다.
 전두환씨가 3월 11일 오후 광주지법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관련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 재판에 참석한 뒤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으며 법원을 떠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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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형사들에게 딸이 혼자 시골에 있을 수 없으니 서울로 같이 가야 한다고 했다. 엄마는 청량리 경찰서로 구금되었고 나는 이호철 교수님 댁에 맡겨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는 항변을 하면 괜찮을 거로 생각하며 즉결 심판날만 기다렸다.

"국가원수 모독죄! 구류 7일!"

판사는 자초지종을 들어보는 솔로몬이 아니었다. 그날만 기다려오던 엄마 윤정모에게는 심히 아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무언가 바뀔 여지가 있다는 순진한 마음에 엄마는 한손을 번쩍 들었다.

"판사님! 제가..."
"구류 14일!"
"아니 판사님 어떻게..."
"구류 21일!"


말대답을 할 때마다 구류날짜는 배로 늘어갔다. 끝내 엄마는 국가원수모독죄라는 죄명으로 구류 21일을 선고받고 법정에서 끌려 나왔다. 그 택시기사는 정부로부터 포상금과 함께 괘종시계 그리고 개인택시 한 대를 받았다고 한다.

"유치장에서의 삶은 참 비참했어. 24시간 전경들이 배치돼 계속 소리 지르고 욕하고 그랬거든. 겨울이라 수도가 얼어 물도 안 나왔어. 정말 맨바닥에서 하루하루 버티면서 지냈어. 당시 열일곱 정도 되는 매춘부 소녀가 손님이 행패 부리는 것에 참지 못하고 살인을 저질렀나 봐. 나랑 한방에서 지냈는데 자신도 그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덜덜 떨더라고. 그 아이와 나는 발을 맞대고 온기를 나누면서 간신히 버텼어."

지금 와서는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아직도 엄마는 그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고 했다. 배웠다고 하는 판사가 벌레 취급하던 그 순간이 생생하다면서.

"그래도 나는 구류 21일이 전부잖아. 다른 많은 사람처럼 고문당하고 몇 년씩 감옥살이하거나 하지는 않았으니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지. 그 시대에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던 때였으니까."

우리는 다시 황새울로 돌아왔다. 한 달여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나는 다시 학교를 나갔고 아이들은 그동안 어디 있었냐고 물었다.

"엄마 감옥 갔었거든, 거기 면회 다녔어."

아이들은 엄마에 대해 묻지 않았다. 들어봤자 못 알아듣는 어려운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어떤 판단 기준이 없는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리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나는 다시 아이들과 들판에서 비석치기, 자치기를 하고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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