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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 먹을 것을 싸 들고 혼자 지내는 엄마를 찾아갔는데 엄마가 나를 보자마자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내용은 이랬다. 

엄마는 1층에 사는 준호(가명)를 동네 슈퍼에서 오랜만에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아이고, 준호가 많이 컸구나"하며 팔을 토닥였는데, 순간 준호가 토닥이는 엄마의 손을 낚아챈 후 가슴팍을 밀쳤다. 

슈퍼 주인이 준호를 나무라며 사태는 수습됐지만 엄마는 서운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나 보다. 속상한 말끝에 엄마는 "애를 그냥 일반 학교에 다니게 하는 모양인데 왜 특수학교에 안 보내지? 저런 애들은 어디 한 곳에 모아 데리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막 돌아다니지 못하게. 이렇게 사람 다치게 하면 안 되잖아"라고 했다. 엄마의 이야기에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준호는 경증의 지적 장애인이지만 일반 중학교에 다니고 있다. 준호를 초등학생 때부터 봐왔던 터라 아무 생각 없이 팔뚝을 토닥였을 뿐인데, 엄마로서는 봉변을 당하고 보니 피해 의식이 생긴 듯하다. 

엄마처럼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겪은 80이 넘은 고령 세대는 인권이 그야말로 '똥' 같은 시절을 보냈다. 사람을 병이 있다고 잡아 가두고, 장애가 있다고 잡아 가두는 것이 일상으로 벌어졌으니 저리 말씀하는 게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엄마. 형제복지원이라는 데가 있었는데 장애인 시설이야.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 10여 년 동안 500명이 넘는 장애인이 암매장을 당했어. 강제로 일 부려 먹고 막 때리고 성폭행까지 하고 죽였어. 난 생각만 해도 무서운데 그런 시설이 있으면 되겠어요?" 

나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에게 교훈 조의 말을 했으나 실상 내가 시설의 반인권에 대해 각성하고 '탈시설'을 지지하게 된 일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먹고 싶을 때 먹겠다
 
2015년 4월 6일 장애인들이 탈시설을 요구하는 손피켓을 들고 있다.
 2015년 4월 6일 장애인들이 탈시설을 요구하는 손피켓을 들고 있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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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개봉한 영화 <어른이 되면>은 언니인 혜영이 장애인 동생 혜정을 시설에서 데리고 나와 함께 지내며 부딪히는 삶의 이야기다. 영화는 탈시설을 한 혜정이 새로운 삶에 적응하려면 혜영 말고도 혜정을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사실상 탈 시설한 장애인이 활동 보조인의 도움 없이 삶을 꾸려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장애인의 활동 보조 등급 심사는 까다롭고 엄격하다. 장애인의 탈시설이 주로 경증의 장애인에 한정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오는 7월부터 장애인등급이 폐지되면서 그에 따라 활동 보조서비스도 실사하는 방식으로 바뀐다고 한다. 활동 보조 적격성 판정이 장애인을 두 번 울리지 않도록 세심히 준비되었으면 한다.

사회적 대타협으로 장애인 시설을 없앤 스웨덴의 탈시설 정책은 어떤 인간도 그 의지에 반해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의 소산이다. 스웨덴 장애인의 탈시설이 성공한 원인은 장애인을 그저 사회로 돌려보냈기 때문이 아니다. 정부가 앞장서 장애인의 인권을 국민에게 설득했다. 정부의 확고한 의지와 정교한 정책-활동 보조 서비스, 주거 서비스, 휴식 지원 서비스, 주간 활동 서비스 등을 실행했기에 가능했다. 이는 한국 정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장애인은 탈시설을 하기 위해 오랜 시간 준비한다. '탈인간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시설에서 독립된 삶을 살겠다는 시도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장애인들의 탈시설 분투기는 서중원이 기록한 <나, 함께 산다>에 생생히 그려져 있다. 이들이 탈시설을 하고자 하는 이유는 '인권투쟁'이니 '자유 쟁취'니 하는 거대담론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겠다는 바람의 발로였다. 비장애인이 누리는 일상이 이들에겐 투쟁으로 쟁취해야 하는 권리였다.

시설에서 살다 죽는 것이 운명인 줄 알았던 장애인들은 '노들 장애인 야학'이나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의 활동가들을 만나면서 다른 세상을 보게 되었다. 탈시설 감행 후 녹록지 않은 삶을 살게 돼도 이들은 시설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처음엔 그룹 홈에 살며 탈시설에 적응하다가 계속 공동 주거를 하기도 하고 독립 주거를 택하기도 했다. 이들은 함께 살면서 활동 보조인의 도움 아래 밥, 빨래, 청소하는 방법 등 삶의 방식을 교육받았다. 이 과정에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치열한 노력이 수반됐다. 

탈시설 여건 나아졌나
 
지난 2009년 탈시설 운동의 시작이었던 '석암 투쟁'을 이끌었던 마로니에 8인방이 6월 4일 오후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10주년 기념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지난 2009년 탈시설 운동의 시작이었던 "석암 투쟁"을 이끌었던 마로니에 8인방이 6월 4일 오후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10주년 기념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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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4일 8명의 장애인이 마로니에 공원에 모였다. 놀러 간 것이 아니었다. 노숙농성을 하기 위해 비장하게 나선 길이었다. 석암 베데스다 요양원의 비리를 폭로하고 내친김에 탈시설을 위해 노숙농성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들의 62일간 이어진 투쟁은 자립 생활 주택 제공과 '장애인 전환 서비스'를 끌어냈다. 10년이 지났다. 이들이 풍찬노숙하며 쟁취한 탈시설의 여건은 과연 얼마나 나아졌을까?

6월 4일 노숙농성 1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미안한 마음을 담아 심심한 축하를 보내고 싶다.

준호의 과격한 반응으로 벌어진 사고는 다행히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탈시설에 대한 내 긴 설명을 듣고 마음을 바꾸기는 했으나 준호의 급작스러운 반격이 못내 잊히질 않는 모양이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 게시됩니다.


태그:#탈 시설운동, #마로니에공원 단식농성, #장애인 인권, #어른이 되면, #나, 함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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