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라딘>을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 시절의 디즈니 애니메이션다운 '뻔한' 스토리에 특별한 감동을 받지는 않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주제곡 'a whole new world'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자스민과 알라딘이 양탄자를 타고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그 장면만은 마음에 선명히 새겨졌다.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바라보는 다양한 세상의 모습들은 당시 소녀였던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넓은 세상을 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그런 삶을 살리라 다짐했었다. 그리고 무려 26년 만에 <알라딘>을 다시 만났다. 자스민이 달라졌다는 소문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26년만에 다시 만난 2019년 <알라딘>

26년만에 다시 만난 2019년 <알라딘>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목소리의 존재를 깨닫다

자스민(나오미 스콧)은 아그라바 왕국의 아름다운 공주다. 연로한 공주의 아버지, 왕국의 술탄(네이비드 네가반)은 자스민을 왕자와 결혼시켜 왕국을 안정화하는 것이 삶의 목표다. 1993년 애니메이션과 2019년 영화 속 자스민은 모두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93년 자스민은 "전 혼자서 뭘 해본 적도 없어요"라고 아버지에게 한탄한다. 2019년 자스민도 이런 상황을 답답히 여기고 신분을 속인 채 궁궐 밖에 나가 알라딘(메나 마수드)과 첫 만남을 갖는다.

그런데 분명 두 자스민은 달랐다. 26년 전 자스민은 지금의 삶에서 탈출하고 싶긴 하지만,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는 잘 표현하지 않았다. 그저 왕국의 강제결혼 정책에 반대해 "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2019년의 자스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 "전 왕이 될 준비를 해왔어요"라고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이 아닌 자신의 꿈을 말하는 자스민. 과연 자스민의 내면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자스민은 애니메이션 버전에서는 없었던 자신의 새로운 주제곡 'speechless'를 부르며 자신이 깨달은 바를 전한다. 그는 "나를 노리는 저 거친 파도 자꾸만 나를 끌어내려. 부서지고 또다시 부서져 내 목소린 다 사라져가"라며 여성으로 하여금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억압적인 세상을 비판한다.

그리고 이렇게 다짐한다. "내 목소리를 막으려고 하는 손에 두려움이 밀려와도 난 절대 침묵하지 않아"라고 말이다. 극 중 자스민은 지금 여성도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는 여성의 목소리도 남성의 것과 똑같이 세상의 기준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심리학자 캐롤 길리건의 주장과 맞닿아 있었다.
 
 2019년 <알라딘>에서 자스민의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실천하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2019년 <알라딘>에서 자스민의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실천하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자스민이 내고 싶었던 목소리

도대체 자스민이 목소리를 내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영화의 도입부 몰래 궁을 빠져나온 자스민은 배고픈 아이들을 만나자 돈이 없음에도 노점상에 진열된 빵을 집어 아이들에게 나누어 준다. 영화에서 이 사건은 알라딘과 자스민이 만나게 되는 계기로 활용되지만, 실은 자스민이 하고픈 말을 잘 들려주는 에피소드였다.

자스민이 이 장면에서 택한 건 '돈이 없으면 물건을 살 수 없다'는 융통성 없는 원칙이 아니라 배고픈 아이의 사정과 돕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자스민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나는 이 백성들을 잘 알고, 이들을 보살피고 싶다"고 피력한다. 또, 알라딘과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비행을 한 그 밤에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저 사람들(왕국의 국민)"이라고 말한다. 자스민은 끊임없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을 바탕으로 서로를 보살피는 것, 즉, 길리건이 말한 '보살핌의 윤리'가 세상에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스민의 이런 목소리는 호시탐탐 1인자의 자리를 노리는 자파(마르완 켄자리)와 대비된다. 자파는 서열다툼에서 최고가 되려 기를 쓰며, 전쟁을 일으켜 더 많은 왕국을 통치하려 한다. 자파의 이런 모습들은 모든 것을 서열화하고, 강자와 약자로 이분화해 힘과 권력에 의한 통치를 정당화하는 가부장제를 상징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자스민에게 자파는 이렇게 충고한다. "편하게 사는 법을 알려드릴까요? 우리 왕국의 전통을 받아들이세요. 그리고 목소리를 내지 말고 계시면 됩니다. 조용히." 이는 그동안 가부장제가 여성들의 목소리를 억압해 온 논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영화 <알라딘> 스틸컷

영화 <알라딘> 스틸컷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자스민, 꿈을 이루다

결국 자스민은 꿈을 이룬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왕이 된다. 26년 전 애니메이션과 가장 다른 지점은 바로 여기였다. 1993년 애니메이션에서 자스민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이루고, 왕이 되는 것은 알라딘이었다. 하지만, 2019년에 자스민은 자신이 왕이 되고 알라딘은 왕의 배우자가 된다.

물론, 자스민이 왕이 되기까지 알라딘과 지니(윌 스미스)의 도움이 크긴 했지만, 이런 결말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영화에서 '보살피는 정치'를 꿈꿨던 자스민이 왕이 되었다는 것은 여성의 목소리로만 여겨졌던 '보살핌의 윤리'가 이제 한 국가의 보편적인 윤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길리건은 최근의 저서 <담대한 목소리>에서 민주주의 사회라면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이분화하지 않고 다양한 가치들이 함께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여성들만의 것으로 간주되어 왔던 '보살핌의 윤리'도 정의나 공정성과 같이 사회 전반에서 실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마도 자스민이 왕이 된 아그라바 왕국은 왕국이 세운 규칙과 정의 안에서 '보살핌의 윤리'가 실천되는 민주적인 사회가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이처럼 2019년의 <알라딘>은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었을 때, 변화할 수 있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애니메이션 <알라딘>이 극 중 대사처럼 "한 젊은이의 인생을 바꾼 이야기"였다면, 영화 <알라딘>은 '여성이 침묵에서 깨어나는 이야기'였다. 물론, 자스민이 능력보다는 외모 위주로 평가받는 것, 여전히 남성을 여성의 구원자처럼 묘사하는 것 등은 아쉬운 면이었다.

하지만, 그 옛날 지독히 가부장적이었던 사회가 배경인 이야기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담아냈다는 점에서 꽤나 반가운 만남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이젠 'A whole new world'가 아니라 'speechless'의 한 소절이 자꾸만 입에 맴돈다. "I won't go speechless!(침묵하지 않을 거야)"
  
 영화 <알라딘> 스틸컷

영화 <알라딘> 스틸컷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 https://brunch.co.kr)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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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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