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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지인으로부터 "너는 부자 되긴 글렀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구멍 난 면장갑을 바늘로 꿰매고 있는 나를 보고 친구가 혀를 차면서 내뱉은 말이었다. 그 친구가 알면 더 심한 말을 들을 일이 생겼다. 뜻하지 않은 이별이 있어서다.

나는 세탁기와 헤어지고 손빨래를 하고 있다.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치 바쁜 내가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손빨래를 하고 있다면 뭐라 할지 궁금하다.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세탁기와의 이별. 세탁기가 고장이 났을 때도 나는 당연히 고쳐 쓰리라 생각했다. 서비스센터 직원이 와서 단종된 지 오래된 구형 세탁기라 부품을 구할 수가 없다면서 새로 사야겠다고 할 때 역시 세탁기와 헤어질 생각은 안 했었다. 그냥 본능적으로 중고 세탁기라도 살 생각이었다.

차일피일 미루다 손으로 빨래를 하게 되었는데 놀라운 일들이 생겼다. 놀랍다기보다는 '새로운 발견'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자동차를 없애고 자전거만 타고 다니면서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이상으로 새로운 발견의 재미를 본 나는 세탁기와 헤어지고도 그에 버금가는 발견들을 거듭하고 있다.

세탁기 없이도 잘 삽니다
 
자동차를 없애고 자전거만 타고 다니면서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이상으로 '새로운 발견'의 재미를 본 나는 세탁기와 헤어지고도 그에 버금가는 발견들을 거듭하고 있다.
 자동차를 없애고 자전거만 타고 다니면서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이상으로 "새로운 발견"의 재미를 본 나는 세탁기와 헤어지고도 그에 버금가는 발견들을 거듭하고 있다.
ⓒ picry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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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발견은 빨랫감이 획기적으로 줄게 되면서 내가 얼마나 자주 빨래를 했었는지를 알게 됐다. 세탁기가 있을 때는 바짓가랑이에 흙만 묻어도 세탁기에 넣었는데, 이제는 손으로 싹싹 비벼 흙을 털어내고 깨끗한 물걸레로 닦아 입는다.

땀이 찬 러닝셔츠는 샤워할 때 빨아버리니까 며칠씩 모아두는 일이 없다. 늘 뭔가가 담겨있던 옷 바구니가 사라졌다.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두어 시간 사용하면서 늘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세탁기 자리를 돌려받으니 큰 공간이 새로 생긴 것이다. 두 번째 발견이다.

세 번째 발견은 뭘까? 목덜미나 소매 끝, 바지의 끝단을 중심으로 옷을 뒤적여가며 비누칠을 하니 비누를 아낀다. 세탁기는 눈이 없으니 마구잡이로 가루비누를 풀고 옷 전체를 평등(!)하게 빨지만, 나는 비록 불공평해 보일지언정 정의롭게(!) 옷을 빤다. 정의롭다고까지 표현한 것은 이 과정에서 옷의 훼손이 훨씬 덜할 것으로 여겨져서다.

중요한 발견이 또 있다. 오래전부터 나는 면과 모직으로 된 생활한복을 즐겨 입었지만, 손빨래하면서 합성섬유로 된 옷들은 입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면과 달리 합성섬유는 비누칠할 때나 비벼 빨 때 미끈거려 느낌이 안 좋다. 세탁기에 넣을 때는 알 수 없었던 부분이다. 질감의 차이로부터 합성섬유의 문제를 다시 돌아보게 된 것이다.

합성섬유는 가볍고 질기고 따뜻하고 잘 마르는 데다 값도 싸서 누구나 입지만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미세플라스틱이다. 석탄이나 석유에서 뽑아낸 합성섬유는 세탁기 한 번 돌릴 때마다 수만 개의 미세물질이 빠져나온다고 한다. 그대로 바다로 흘러든다.

1mm 이하의 미세물질은 어패류 등 해안에 서식하는 생물들의 소화기나 호흡기로 들어간다. 소금에도 묻는다. 이는 스펀지처럼 유해물질을 빨아들이는 성질을 갖고 있어서 각종 중금속이나 화학물질들이 잘 흡착된다. 생물농축 과정을 거치며 농도는 더욱 높아져서 종착지는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이다.

사람들은 한 달에 칫솔 하나 분량의 미세플라스틱을 먹고 있다고 하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세탁기와 헤어진 덕분에.

세탁기에 이어 또 다른 이별이 문득 다가올지 모르겠다. 냉장고? 아니면 모바일메신저? 스마트폰? 블루투스 이어폰? 그동안 내 손과 귀, 내 눈과 내 마음까지 거머쥐고 좌지우지했던 것들과의 이별이 언제쯤 올지 기다려보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남도민일보에도 실립니다.


태그:#세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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