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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북부기술교육원 바이오메디텍 과정을 거친 전정남씨가 2일 서울 상계주공2단지 아파트 전기실에서 승강기와 전력설비를 모니터하고 있다.
 서울북부기술교육원 바이오메디텍 과정을 거친 전정남씨가 2일 서울 상계주공2단지 아파트 전기실에서 승강기와 전력설비를 모니터하고 있다.
ⓒ 손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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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이 트럼프와 회담하려고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가다가 열차에서 잠시 내려 담배 피우며 쉬어간 곳 있죠? 중국 난닝인데, 나도 그곳을 거쳐서 베트남으로 들어갔죠."

서울 상계주공2단지 아파트 관리사무실에서 만난 전정남(68)씨가 16년 전 자신의 여정을 더듬었다. 함경남도 단천 출신의 전씨는 20여 년간 북한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1998년 일가친척 10여 명을 데리고 고향을 떠난 탈북자다.

2018년 5월 24일 북한 함경북도 풍계리의 핵실험장 폐기를 취재하러 서울공항을 이륙한 남측 기자들의 공군기가 내린 곳이 그가 오랫동안 항법사로 일했던 원산의 갈마비행장이라고 한다.

1978년 9월 3일에는 교사였던 아내를 따라 평양에서 열린 전국교육일꾼대회에 참석했다가 김일성 당시 주석과 단체 사진을 찍는 '행운'을 누렸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최고지도자와 함께 찍은 사진은 '1호 사진'이라고 해서 아주 소중하게 모십니다. 사진마다 고유번호가 있고, 설령 없어지는 일이 있어도 노동당 중앙에서 따로 보관하기 때문에 언제든 복원할 수 있어요."

그러나 1994년 김정일 집권 이후 대규모 식량난이 발생하자 전씨의 생각이 바뀌었다. 설상가상으로 전역 후에는 배급이 나오지 않았다. 보훈 점수를 올려보려고 평양 애국열사릉에 노력봉사를 자원했는데, 그곳에서도 일하다가 기력이 떨어져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1998년 1월 그는 일가친척 10명을 모아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했다.

기술만 있으면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서울북부기술교육원 바이오메디텍 과정을 거친 전정남씨가 2일 서울 상계주공2단지 아파트 전기실에서 유사시 비상전력기 가동 절차를 설명하고 있다.
 서울북부기술교육원 바이오메디텍 과정을 거친 전정남씨가 2일 서울 상계주공2단지 아파트 전기실에서 유사시 비상전력기 가동 절차를 설명하고 있다.
ⓒ 손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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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만 있으면 자본주의 사회든 사회주의든 먹고는 살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이 떠올라 중국에서 전기 다루는 기술을 어깨너머로 배웠지만 언어 소통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나라도 한국에 먼저 가서 살 길을 마련해야겠다"는 결심은 2003년 4월에야 결실을 맺었다.

5년 동안 중국을 종단하고 베트남과 캄보디아, 태국을 거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1년 뒤에는 중국에 남아있던 나머지 가족들이 한국에 왔다. 전씨는 "중국 공안에 안 잡히려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는데 다시 모으느라 애를 좀 먹었다. 정착금으로 받은 1500만 원도 브로커 쓰느라고 다 날려버렸다"며 웃었다.

가족들을 데려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생계 문제가 코앞의 숙제였다. 북한 사회에서도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거나 땅을 파는 일을 기피했던 풍조를 떠올리고 뒤늦게 굴착기 운전을 공부했지만 "일자리를 쉽게 얻으려면 낙도로 내려가야 한다"는 말에 중도에 포기했다.

우여곡절 끝에 장남이 다니던 고등학교 담임교사의 주선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의 한 아파트 전기실 제어 업무를 맡게 됐다. 도중에 서울 면목동의 또 다른 아파트 전기실로 옮긴 것을 합하면 13년 7개월을 '아파트 전기실'에서 보냈다.

50대 초반에 한국에 들어와서 60세 정년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될 때까지 일자리가 주어진 것은 '축복'이었지만 그에게는 남모를 고민이 있었다.

"14년 가까이 실무 경력을 쌓았지만, 자격증이 없으니 인정 안 해주는 분위기가 있어요. 때로는 자격증 있는 사람들에게 업무를 지시해야 할 때도 생기고. 정부 정책도 청년 일자리 늘리는 방향으로 가니 자격증이라도 있어야 버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2018년 3월 31일 면목동 아파트 관리사무소와 맺은 1년짜리 계약이 만료됐다. 다음날 그는 서울시가 운영하는 북부기술교육원 바이오메디텍(의료기기)과에 입학했다.

자격증 생기자 취업 길 술술 열렸다
 
서울북부기술교육원 바이오메디텍 과정을 거친 전정남(68)씨가 2일 서울 상계주공2단지 아파트 관리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울북부기술교육원 바이오메디텍 과정을 거친 전정남(68)씨가 2일 서울 상계주공2단지 아파트 관리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손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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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기술교육원은 서울에 거주하는 만 15세 이상 청년 및 실업자 등에게 직업 훈련의 기회를 부여하는 시설로, 4곳(동부, 남부, 북부, 중부) 중에서 북부기술원이 등하교가 가장 편했다.

당초 희망했던 전기시스템제어과에 정원이 다 찼지만 "바이오메디텍(의료기기)과에서도 전기 과목을 공부할 수 있다"는 얘기에 전공을 바꿨다.

"내게는 학위가 아니라 자격증 취득이 중요했기에 전공은 중요하지 않았죠. 앞길이 막막했던 나로서는 참으로 좋은 제도예요. 무엇보다 교수들이 친절하고 학비와 교재, 실습재료비, 점심 식사까지 무료로 제공해서 부담 없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어요."

전씨는 한 해가 가기 전에 방화관리사와 전기기능사, 승강기기능사 자격증 3종을 모두 취득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일단 자격증이 생기자 취업 길도 술술 열렸다.

올해부터 출근한 상계동 주공2단지 아파트 관리사무소장은 그의 이력서를 본 뒤 "필요한 (자격) 서류는 다 준비된 듯하니 바로 출근하라"고 환대했다. 그는 2029세대에 이르는 아파트의 고압선과 승강기를 제어하고 있다. 이틀에 한 번 24시간 연속근무를 해야 하는 격무지만 그는 현실에 만족하는 눈치다.

"맨주먹으로 대한민국에 왔는데 아들딸 모두 취업시키고 결혼시켰으면 된 것 아니냐? 늦은 나이에 국가자격증 따서 직장 다니는 아버지를 보고 자식들도 삶의 자극을 더 받는 것 같아서 뿌듯하다."
 
서울시 기술교육원, 하반기 교육훈련생 모집
서울시 기술교육원은 7월 8일부터 8월 23일까지 2019년 하반기 직업교육훈련생을 동부·중부·북부·남부 기술교육원 4곳에서 모집한다(총 56개 학과 1895명 - 주간 460명, 야간 1095명, 단기 310명).
 
수강료와 교재비, 실습비 등 훈련비는 무료(예치환불제 시범운영 학과 제외)이고 1일 5교시(월 100시간) 이상 훈련과정 식사도 제공된다. 기술교육원 재학 중 국가기술자격시험 기능검정료를 지원하고, 수료 후에는 사후관리를 통해 취업도 알선한다.

정원의 30%는 사회적 배려계층을 우선 선발하며 교육훈련은 실제 취업과 연결되는 실용학과 중심으로 이뤄진다. 만15세 이상 서울 시민이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으며 서류전형 15점과 면접 85점으로 학과별 정원 내에서 합계 점수가 높은 순으로 선발할 예정이다.
 
자세한 사항은 다산콜센터(☎120)와 동부·중부·북부·남부 기술교육원의 각 교학과에 문의하면 된다.

태그:#서울기술교육원, #전정남, #탈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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