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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조선일보>는 한국전쟁(6·25전쟁) 70주년인 2020년을 맞아 국방부가 남북 공동 기념사업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국방부가 발주한 '6·25전쟁 70주년 국방사업 기본구상 연구' 용역 보고서를 근거로 "국방부가 2020년을 목표로 각종 남북한 관련 공동 프로젝트를 실행할 계획"이라면서 이렇게 보도했다.
 
현 정부의 평화 기조에 맞추느라 여전히 '북침(北侵)'을 주장하는 북한과 6·25를 함께 기념하자는 것이다. 6·25로 17만명의 국군·유엔군이 사망하고 수백만의 실향민이 생긴 만큼 거센 반발과 사회적 논란이 예상된다. 
'6.25전쟁 70주년 남북 공동기념 검토' 내용을 보도한 <조선일보> 7월 4일자 기사
 "6.25전쟁 70주년 남북 공동기념 검토" 내용을 보도한 <조선일보> 7월 4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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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군에서는 '6·25전쟁 때 수많은 희생자를 낸 군(軍)을 총괄하는 국방부의 '정권 코드 맞추기' 행태가 도를 넘었다'는 얘기가 나왔다"라며 "한 군 관계자는 '이런 행사를 하게 되면 6·25전쟁이 마치 쌍방 과실인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6·25 전몰장병에 대한 모욕'이라고 했다"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당일자로 입장자료를 내어 "6·25전쟁 70주년 기념행사의 남북 공동 개최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라고 부인했다.

남북이 전쟁이 아닌 평화로, 한 쪽의 일방적 주도가 아닌 쌍방의 대등한 참여로 평화를 이루고 통일을 이루고자 한다면, 과거의 앙금을 푸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다. 앙금을 그대로 둔 채 어물쩍 넘어가며 손부터 덥석 잡는다면, 손에서 뇌로 전달되는 낯선 이질적 느낌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낯선 느낌이 머리에 남아 있다면, 맞잡은 손은 언제든지 떼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낯선 느낌을 피하고 손을 꼭 잡고자 모범적 사례를 남긴 두 나라가 있다. 바로 베트남과 미국이다. 베트남전쟁 때 치열하게 싸웠던 두 나라는 양국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한 시기에 그 같은 견고한 화해의 선례를 남겼다. 

베트남-미국 모두 큰 상처 입은 전쟁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미군.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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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북베트남과 자본주의 남베트남-미국이 싸운 베트남전쟁은 1960년 발발해 1975년 종결됐다. 15년이라는 기간만큼 피해 규모도 상당했다. 북베트남과 베트콩(베트남판 빨치산)은 민간인 사망자가 6만 5천 명, 군인 전사자가 최고 110만, 군인 부상자가 60만 이상이었다.

남베트남은 민간인 사망자가 최고 43만, 군인 전사자가 최고 31만 3천, 군인 부상자가 최고 117만이었다. 미국은 군인 전사자가 약 6만, 부상자가 약 30만이었다. 한편 한국군 전사자는 약 5천, 부상자는 약 1만 1천이었다. 그 외 참전국인 북한·중국과 호주·태국·뉴질랜드·필리핀에서도 인명 손실이 나왔다.

북베트남은 세계 최강 미국을 물리쳤지만 군인 전사자 숫자는 110만이나 됐다. 미군 전사자 6만을 근 20배 가까이 상회했다. 승자 베트남에도 큰 상처가 남았던 것이다.

미국은 전사자는 훨씬 적지만 세계 지배권과 위신에 손상을 입었다. 패전의 상처만 입은 게 아니라 '부도덕한 참전을 했다'는 비판 여론 속에 도덕적 권위까지 실추됐다. 세계전략 차원에서도 이러저러한 양보를 해야 했다. 일례로 아시아·태평양과 관련해서는 중국의 핵 보유를 묵인하는 한편 중국과 더불어 지역 패권을 어느 정도 분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베트남전쟁은 1960년 발발했지만 미국이 개입한 것은 1964년이었다.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 때는 1960년이고,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남베트남 편을 들면서 본격 개입한 것은 1964년이다.

그해 8월 4일의 통킹만 사건은 '북베트남 수도인 하노이 앞바다를 순찰하던 미국 구축함들이 공해상에서 북베트남군의 공격을 받았다'고 미국이 주장한 사건이다. 북베트남은 이런 주장을 부인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빌미로 전쟁에 전면 개입했고, 이로써 베트남전쟁은 '북베트남 대 남베트남'이 아니라 '북베트남 대 미국'의 대결로 바뀌었다.

베트남-미국 하노이 대화, 사과부터 요구했다면 무산됐을 것 
 
베트콩 전사.
 베트콩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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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간에 걸쳐 대규모 인명피해를 겪으며 전쟁을 벌인 양국은 종전 20년 뒤인 1995년 7월 11일 수교했다. 미국은 1991년 소련 붕괴 뒤 강력해진 중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베트남은 경제협력을 할 목적으로 관계정상화를 이루었지만, 이런 실용적 목적만으로는 양국관계를 정상궤도에 올려놓기 어려웠다. 수많은 양국 국민이 희생된 베트남전쟁 때의 앙금을 그대로 두고서는 양국 관계를 전면적으로 발전시키기 힘들었다.

그래서 두 나라가 벌인 일이 일종의 '공동사업'이다. 바로 베트남전쟁의 잘잘못을 따지는 대화의 장을 만드는 것. <조선일보>에 보도된 공동 사업보다는 낮은 수준이지만, 베트남과 미국은 지난날의 앙금을 풀고자 허심탄회한 대화의 장을 마련했다. 그것이 1997년 6월 20일부터 23일까지 열린 '하노이 대화'다. 행사가 열린 곳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만난 메트로폴 호텔이다.

(메트로폴 호텔에서 하노이 대화가 열렸다는 점은 지난 2월 28일자 기사 '메트로폴 호텔의 마술, 김정은·트럼프에게도 통할까' (http://omn.kr/1hlrk)에서 부분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그 기사에서는 메트로폴 호텔에 투숙한 미국 정치인들을 설명하는 기회에 '하노이 대화'의 미국 대표단을 소개했다. 이 기사에서는 그때 소개했던 대화 내용과 더불어 좀더 구체적인 내용들을 다루고자 한다).

지난 4일 국방부가 입장자료를 내자 <뉴데일리>는 이날 오후 기사에서 "군 안팎에선 6·25에 대한 북한의 사과도 없는 상황에서 군이 70주년 행사를 같이 한다는 발상부터가 큰 문제라는 지적이 있다"고 보도했다. 북한의 사과를 먼저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만약 베트남과 미국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하노이 대화는 애초에 성사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앙금을 풀려고 대화를 시작하는 마당에 대화가 열리기도 전에 사과부터 하라고 했다면 하노이 대화는 무산됐을지 모른다. 앙금이 풀리기도 전에 사과를 요구해서 받아냈다 해도, 그 사과에는 진정성이 담기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앙금이 풀린 상태에서 사과해야 사과의 진정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 당시 당국자들 출동... 통킹만 사건, 미 정부의 착각으로 결론  
 
1965년 남베트남을 방문한 맥나마라 국방장관(중앙).
 1965년 남베트남을 방문한 맥나마라 국방장관(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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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대화에는 전쟁 당시에 양국 정부나 군대를 이끌었던 당국자들이 출동했다. 베트남 대표단은 응우옌 고 탁 전 외무차관이 이끌고, 미국 대표단은 로버트 맥나마라 전 국방장관이 이끌었다. 대표단 숫자는 양국 똑같이 13명씩이었다.

양국은 이 회담을 비공식으로 진행했다. 전직 관료나 군인들이 참가하는 비공식 자리로 만들었던 것이다. 정부의 위임을 받은 공식 회담이 아니었기 때문에 양국 대표단은 토론의 승부에 연연하지 않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 26명은 베트남전쟁에 대한 불편한 감정들을 죄다 털어놓았다. 그들은 이 비극을 예방할 수 없었는지도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측이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베트남전쟁 이전에 베트남은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 부른다. 베트남전쟁은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제1차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5년,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 호찌민 주석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우호관계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미국이 프랑스가 아닌 자국을 돕도록 만들기 위한 시도였다. 하지만 트루먼은 거절했다.

2월 28일자 기사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노이 대화를 정리한 히가시 다이사쿠 조치대학 교수의 <적과의 대화>에 따르면, 전쟁 당시 외무부 대미정책국장이었던 쩐꽝꼬는 서신 발송 및 거절을 '최초의 놓쳐버린 기회'로 규정했다. 

쩐꽝꼬는 "만약 트루먼 대통령이 1945년 9월 호찌민 주석이 보낸 편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로 만들려는 프랑스에 반대했다면, 베트남의 독립은 미국·프랑스와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달성됐을 것"이라며 서운함을 표시했다. '그때 좀 도와주지 그랬어?'라는 애교 섞인 항의 표시였던 셈이다.

1945년에 미국이 베트남을 도와줬다면 1949년에 프랑스 꼭두각시인 베트남국(1949-1955)이 베트남 남부에 수립되기 힘들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전쟁을 벌이고 그 와중에 미국이 개입하는 일도 없지 않았겠느냐는 하소연이었다.

미국의 베트남전 본격 개입의 빌미가 된 통킹만 사건도 의제가 됐다. 이것은 본회담 이전의 준비회담에서 거론됐던 쟁점이다. 맥나마라는 베트남전 영웅으로 '붉은 나폴레옹'이란 별명을 갖고 있는 보응우옌잡 장군에게 그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보응우옌잡의 한자 이름은 기억하기 쉽다. '무예가 으뜸이고 최고'라는 뜻으로도 풀이될 수 있는 무원갑 武元甲은 '붉은 나폴레옹'이란 별명과 걸맞은 이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붉은 나폴레옹'에게 맥나마라가 던진 질문은 이렇다.
 
"나에게는 오늘 이 순간까지 계속 품어온 의문이 있습니다. 1964년 8월 2일 미국의 구축함 매독스에 대한 첫 번째 공격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 내가 의문이라고 한 것은, 그에 이어 8월 4일에 행해졌다고 하는 두 번째 공격입니다. 과연 그때 베트남은 공격했습니까, 아니면 하지 않았습니까?"  
 
보응우옌잡.
 보응우옌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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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4일에 왜 공격했냐?'고 묻지 않았다. 그런 사실이 있었냐고 물었다. 베트남이 어떻게 대답할지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그렇게 질문한 것이다. 화해를 목적으로 하는 대화였기에 이런 식의 질문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적과의 대화>에 따르면 붉은 나폴레옹은 '적'에게 이렇게 말했다.
 
"8월 2일 매독스호가 베트남 영해에 침입하여 북베트남군이 공격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4일 공격은 완전히 날조된 것입니다. 우리는 8월 4일에 공격 따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이런 식의 대화가 오고간 끝에 맥나마라는 '북베트남이 공해상에서 미국 구축함을 공격한 사실이 없다'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고나서 그는 "베트남 측의 증언을 역사적 사실로서 존중한다"는 뜻을 표시했다.

그는 '1964년 당시의 미국 연방정부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노라'고 말했다. 일선 장교들이 허위 보고를 해서 연방정부가 착각하게 된 모양이니 양해해 달라는 식으로 봉합한 것이다. 만약 화해를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면 베트남도 이런 식의 봉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자리를 만드는 게 얼마나 필요한지 절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국전쟁 70주년 남북이 허심탄회한 대화 한다면  
 
남북이 22일 오후 공동유해발굴을 위한 지뢰 제거 작업이 진행 중인 강원도 철원 비무장지대(DMZ) 내 화살머리고지에서 전술 도로를 연결한다고 국방부가 밝혔다. 사진은 최근 도로연결 작업에 참여한 남북인원들이 군사분계선(MDL) 인근에서 인사하는 모습.2018.11.22 [국방부 제공]
▲ 인사하는 남-북 군인들 남북이 22일 오후 공동유해발굴을 위한 지뢰 제거 작업이 진행 중인 강원도 철원 비무장지대(DMZ) 내 화살머리고지에서 전술 도로를 연결한다고 국방부가 밝혔다. 사진은 최근 도로연결 작업에 참여한 남북인원들이 군사분계선(MDL) 인근에서 인사하는 모습.2018.11.22 [국방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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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간의 대화를 마치는 자리에서 맥나마라는 '처음부터 잘못된 전쟁'이었다는 탄식을 내뱉었다. 베트남전쟁 때 미군을 지휘했던 전 국방장관 입에서 '잘못된 전쟁'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일종의 간접적인 사과 표명이었던 셈이다.

만약 하노이 회담에 앞서 사과부터 하라고 요구했다면, 그나마 이런 사과 표명도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일단 '공동 행사'부터 열어놓고 대화를 했기에, 이런 사과가 자연스레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유감을 표명한 뒤 맥나마라는 '쌍방의 오해가 전쟁을 낳았다'고 진단했다. 미국은 북베트남을 소련과 동일시했고 북베트남은 미국을 프랑스와 동일시했기에 1964년의 확전이 벌어졌다면서,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프랑스와 소련을 제물로 삼아 화해를 추구했다.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인 줄 알고 주먹을 날린 것'이라는 식의 변명을 했던 것이다.

맥나마라는 '오해 때문에 전쟁을 하게 됐고, 오해 때문에 전쟁 종결이 지연됐노라'고 강조했다. 오해만 없었다면 우리가 싸울 이유가 있었겠느냐는 애교성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지난 2월의 북·미 하노이 회담은 노딜로 끝났지만, 1997년의 베·북 하노이 대화는 이처럼 '스몰 딜' 이상의 성과를 산출했다. 묵은 오해를 풀고 상호 이해를 증진하는 방향으로 양쪽을 화해시키는 대화였던 것이다.

이 공동 행사는 양국이 지난날의 아픔을 치유하고 경제협력에 박차를 가하는 데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이런 류의 행사가 전쟁 상처를 치유하는 데 얼마나 유효한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노이 대화는 낮은 수준의 '공동 행사였'다. 2020년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남북이 '이승만이 분단을 획책하지 않았다면', '김일성이 남침을 개시하지 않았다면', '맥아더가 인천상륙 뒤 38도선을 넘지 않았다면', '북한이 중공군을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등등을 놓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하노이 대화 같은 '낮은 수준의 공동 행사'라 할 수 있다.

만약 남북이 그 수준을 뛰어넘어, <조선일보> 보도대로 공동 추모제나 공동 보훈 등의 '높은 수준'의 공동 행사까지 열게 된다면, 남북의 화해와 협력은 그야말로 급물살을 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1997년 이후의 베트남-미국 관계 증진보다 훨씬 속도감 있는 남북관계 증진을 우리 시대에 목도하게 될 것이다.

태그:#6.25전쟁, #한국전쟁, #한국전쟁 70주년, #베트남전쟁, #하노이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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