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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1일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로 6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그날 이후 많은 노동자들이 트라우마로 고통받고 있다. 이번 글은 당시 사고로 형을 잃은 조선 노동자 김형태의 이야기다. [편집자말]
 
2017년 5월 2일 정의당 노회찬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 등이 크레인 붕괴사고로 31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2017년 5월 2일 정의당 노회찬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 등이 크레인 붕괴사고로 31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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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기사] 나, 조선소 노동자 열 번째 이야기①

구술 : 김형태 (가명 , 47세, 배관작업 )
기록과 글 : 박희정, 이은주


트라우마는 산재가 아니다?

장례식장에 있을 때 술을 안 먹으면 잠을 못 자겠더라고요. 사고 당시도 떠오르고, 형의 처참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밥도 안 먹고 매일 술만 먹고…… 그때 여동생이 저를 데리고 정신과 전문 병원에 갔어요. 입원하고 있을 때 다른 가족들은 다 장례식장에 있는데 혼자만 편하게 쉬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형이 많이 보고 싶었고 빨리 합의를 봐서 장례를 치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으니까 장례식장으로 돌아갔어요.

심리검사를 받으라고 선생님이 권유하셨거든요. 그때는 산재고 뭐고 이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어요. 장례식장에 한 달 가까이 있었어요. 장례식장을 저희가 제일 마지막으로 나왔으니까요. 하루에 한 끼 정도 먹었는데 나중에는 술을 계속 먹다 보니깐 음식물만 먹으면 토하더라고요. 원래 제가 술이 약한 편인데…… 잠을 자기 위해서 술을 먹었죠. 그때 이후로는 술을 입에 안 대고는 있는데……

2017년 5월 말에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했었어요. 공단에 찾아가서 사고 내용도 다 이야기를 했었고 공단직원도 가슴 아파하기는 했죠. 그런데 담당자가 '정신적인 트라우마는 산재로 인정받기가 힘들다. 받은 사례도 없을뿐더러 그걸 인정받기는 어렵고 오랜 기간이 소요된다'고 했었어요. 그래서 산재를 신청했다가 포기했었거든요. 6월경에 그랬어요. 당시에는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더라고요. 인정받기 힘들다고 하는데, 왔다 갔다 시간 낭비고, 그래서 포기했었죠.

사고 후에 보건소에서 연락이 2번 왔었어요. 거제에서 1번 연락이 와서 방문을 했었어요. 사고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설문지 작성하고, 그게 다였던 거 같아요. 삼성에서 크레인 사고 이후에 트라우마 관련해서 거제시와 협의를 했겠죠. 보건소 상담사랑 상담을 받는 거 외에는 다른 게 없었던 거 같아요. 수박 겉핥기 같다, 정말 필요한 도움은 없고 시간 낭비하는 거 같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이후에 제가 서울로 올라왔는데 00구 보건소를 연계를 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별로 도움이 될 거 같지 않아서 가지 않았어요.

요즘에는 수면제가 없으면 잠을 못 자요. 의사 선생님은 서서히 줄이라며 약을 안 먹으려고 노력하라고 하는데…… 저도 안 먹고 자면 좋지요. 그게 안 되더라고요. 이틀인가 약을 안 먹어봤는데 도저히 잠을 못 자겠더라고요. 자꾸 떠오르니까요…… 크레인이 떨어졌던 소리. '쿵' 하는 엄청나게 큰 굉음. 그 소리에 놀라서 아수라장이 되어서 물밀 듯이 서로 밀치면서 빨리 내려가려고 하는 사람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쓰러져서 신음소리를 내며 도와달라고 하고 그런 기억들……

불면증은 형 사고 이후에 쭉 있었어요. 심하면 새벽 4시 5시에 잠이 들고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출근하게 되죠. 수면제를 먹어도 2시 3시나 되어야 잠이 들더라고요. 음. 모르겠어요. 이상한 꿈을 꾸기는 하는데 그 꿈이 어떤 내용인지 기억은 안 나요.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무슨 꿈을 꿨지?'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내가 지금 뭘 해야 되지? 아 씻고 출근해야 되는 구나.' 그런 경우도 있고요. 저처럼 정신적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많을 거예요. 당장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세월이 지나면 잊히겠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잊으려고 하겠지요.

다시 조선소로

장례를 치르고서도 한참 동안 정말 매일같이 술을 먹었던 거 같아요. 지금은 술을 아예 끊었는데. 가장이 돼서 아이들이나 아내한테 이런 모습 보일 수는 없잖아요. 정신 차려야지 싶었던 거죠. 그래서 화성에 있는 삼성반도체에 갔어요. 조선소에는 갈 용기가 안 났으니까요. 반도체를 생산하는 여러 장비들이 있는데 그 장비들을 연결하는 일을 했어요. 조선소에서 배관하는 거랑 같은 일인데 규모만 좀 작았어요.

삼성반도체랑 하이닉스 청주공장 건설현장에서 한 5개월 일했던 거 같아요. 삼성반도체에 있을 때는 건물이 다 완공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중장비라고는 지게차 정도만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하이닉스는 달랐죠. 거기에는 크레인이 있었어요. 그때부터는 형 생각이 더 많이 나더라고요. 처음 저를 치료했던 선생님 말씀은 조선소를 떠나면 '형 생각이 나지 않거나 사고 당시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거나 하지 않겠냐'라고 하셨는데 아닌 거 같아요.

제가 청주에서 일하고 있을 때 막내 여동생한테 연락이 왔어요. '정신적인 트라우마로 인한 산재가 인정되었다고 하는데 혹시 알고 있느냐?'며 '오빠는 어떻게 되었어?' 하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런데 왜 내가 접수할 때는 안 된다고 했지? 억울한 마음도 들었어요. 그래서 산재신청을 다시 시도하게 된 거죠. 인정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고통받고 있다는 거를……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받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두 아이의 아빠인데, 가정을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고 싶어요.

지금은 조선소에서 일하고 있어요. 사실 거제는 다시 안 오려고 했는데, 제가 성격이 겁이 좀 없는 편이죠. 담담한 편이고, 침착한 편인데 '일단 가보자. 맨날 피한다고 피해지겠나. 다시 한번 가보고 정말 다시 갈 곳이 못 되는구나 생각되면 떠나자' 생각하고 내려왔죠. 오히려 사고 현장을 봐서 마음을 다잡고 치유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어요. 여기서 극복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요. 현실적인 이유도 있어요. 제 나이가 47살인데 새로운 일을 찾기가 쉽지가 않아요. 조선소만큼 정직하게 땀 흘려서 일정 수준의 수입이 보장되는 곳도 드물죠. 그래서 조선소를 많이 오는 거거든요.

처음에는 두려움, 불안증상이 컸어요. 워낙에 많은 크레인들이 있으니까. 저게 나에게 떨어지지 않을까…… 원래 조선소라는 데가 사람이 많이 다치기도 하고, 또 누군가 죽는 걸 직접 본 적도 있고 그랬으니 더욱 불안한 맘이 들었어요. 크레인이 움직이면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는데 지금은 멀리 돌아가거나 한참 지켜보거나 그래요. 혹시 붐대가 내 쪽을 향해 있는가? 혹시 저거 떨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이 자꾸 들더라고요. 사고 전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죠. 불면증도 심해지고. 심할 때는 거의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나간 적도 있어요.

지금 현재 같이 일하는 동료들은 제가 이런 일들을 겪었다는 걸 몰라요. 매주 월요일마다 조회 시간에 안전교육을 하는데 하루는 삼성 크레인 관련된 사고를 언급하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더라고요…… 제가 모르는 사람들이 그 사고와 관련된 얘기를 할 때가 있어요. 그때마다 많이 아파요……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저는 군 제대 후에 학교를 자퇴하고 빵, 케이크 만드는 일을 배웠어요. 그래서 SPC그룹에 입사해서 점장, 점포 관리를 했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내 장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잘 되었어요. 점포를 하나씩 하나씩 늘렸어요. 사업이 안정화되기 시작할 무렵에 뉴코아 아울렛이 파업을 했어요. 그 기간 영업을 못했어요. 두 달 가까이 못 했던 거 같아요.

임대료 같은 매달 나가는 고정금액이 있잖아요. 손해가 나니까 뉴코아 매장을 접게 되고 홈플러스만 했었는데, 거기 담당과장이 엄청 까다로운 사람이었어요. 청과면 청과, 공산품이면 공산품 담당 과장이 있거든요. 원 플러스 원이나 50% 할인 같은 거 하잖아요. 그런 걸 담당 과장이 많이 압박하거든요. 그래서 힘들었어요. 결국, 하나씩 정리하다 보니까 처음에 투자했던 금액에도 못 미치는 돈을 들고 그냥 나오게 되더라고요. 빚이 좀 많이 생겼죠.

집을 팔고도 빚을 다 못 갚고 5년 동안 개인회생을 했어요. 부모님께 손을 벌리기는 죄송스럽고 혼자 해결하고 싶었어요. 뭘 해야 될까 생각을 하던 차에 '조선소 와서 배관일 한번 배우지 않을래'하고 연락이 왔던 거죠. 친구가 대우조선소에 하청업체 반장을 하고 있어서 친구 소개로 오게 되었죠. 보통 하청업체에서 구인광고를 내는데, 대부분 소개해서 오는 경우가 많아요.

처음 조선소 내려왔을 때만 해도 남들한테 뒤처지지 않도록 정말 열심히 했어요. 조선소 내려와서 정확하게 1년 3개월 만에 반장을 달았어요. 빨라야 5년, 보통 10년 정도 일한 사람들이 반장을 하더라고요. 관리자들이 페이 많이 받으려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고 경력도 속이려 하기도 하는데. 손으로 하는 기술이라는 게 속일 수가 없어요. 일하는 걸 보면, 이 사람은 일을 어느 정도 했겠다 알게 되는 거죠.

어떻게든 자리 잡고 잘해봐야 하겠다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했죠. 남들보다 빨리 배우려고 노력했죠. 이거 받아서 생활비 주기도 힘들다, 빨리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배관과 관련된 책들이 일반서점에는 없더라고요. 서울에 있는 교보문고나 가야 있더라고요. 관련 책들을 사서 보고 일부러 숙소도 사수 숙소로 옮겨서 모르는 거 물어보고 그랬어요. 저는 스물일곱 살부터 계속 관리자만 했거든요. 내 사업을 하면서 직원을 직접 뽑고 월급 주는 입장에 있다 보니까 자신감이 항상 있었어요.

그런데요, 지금은 건망증이 심해졌다고 해야 하나? 같이 일하던 동료들한테 물어봐요. 내가 안경을 어디에다 두었지? 도면을 어디에다 두었지? 멍 때린다고 하죠. 그런 현상이 뜨문뜨문 찾아오더라고요. 기억력도 떨어지고 집중력도 많이 떨어지고요. 이 부속품 이름이 뭐였지? 부사수 이름이 뭐였지? 갑자기 생각이 안 나고 그래요. 불면증이 오면서 더 심해졌고요. 그전에는 일을 거침없이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지금은 걱정이 많이 커졌어요. 일하다 실수를 하면 다칠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드니까요. 항상 먼저 살피고 일을 하죠. 길을 걸어가다가 천장을 자꾸 보게 되더라구요.

사람이 안 죽었으면 좋겠어요

 
2017년 5월 1일 오후 거제 삼성중공업에서 타워크레인이 무너져 사상자를 병원으로 옮기고 있다.
 2017년 5월 1일 오후 거제 삼성중공업에서 타워크레인이 무너져 사상자를 병원으로 옮기고 있다.
ⓒ 김경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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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부터 조선소 일을 했는데, 대우에서 한 8개월 일하다가 삼성에서 2016년 8월까지 했어요. 그 이후에 다시 대우를 갔다가 다시 2017년 삼성으로 왔는데 그때 들어간 데가 마틴링게 건조에 참여하고 있던 물량팀이었어요.

제가 조선소 일 시작한 지 3년쯤 되었을 때 형이 거제로 내려왔어요. 형도 저처럼 사업을 하다가 사기를 당해서 좀 많이 힘들 때였어요. 작게나마 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자영업자들이 힘들잖아요. 그래서 제가 권유를 했어요…… 지금 현재보다는 나을 거 같은데 해보지 않겠냐. 그때 제가 삼성의 경일기업이라는 하청업체에서 반장으로 있을 때였어요. 형한테 일할 때만큼은 잔소리도 많이 하고 못되게 대했거든요.

형을 빨리 가르쳐야 했어요. 기량에 따라서 급여를 지급해야 되니까요. 관리자라고 하더라도 임의대로 하는 건 한계가 있거든요. 보통 사내업체 같은 경우에는 이 정도 일을 했으니 '이 정도 급여 주십시오'하고 기성금(공사대금)을 올려요. 원청에서는 올린 기성에 안 좋을 때는 한 40%, 많이 줘야 60~70% 그 정도만 지급한단 말이죠. 그래서 사내업체가 도산하는 경우도 많이 있고 폐업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죠.

사고 나던 해에 원래는 형하고 같이 서울로 올라오려고 했었어요. 당분간 반도체 쪽 일하다가 다시 다른 장사를 해보던가 할 생각이었죠. 조선소 일이 힘들거든요. 7월, 8월, 그쯤이면 올라올 생각이었어요. 조선소로 형을 데려오지 않았으면 형을 보내는 일이 없었지 않았을까, 사고 직전에 미리 전화 한 통화를 했으면 그날 사고가 나지 않았지 않았을까…… 그런 후회를 해요.

단 하루도 형 생각이 나지 않은 날이 없어요

세상이 뭐라 하던 나는 잘못했다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식으로든 위로받고 싶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 말 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형이 사고 난 게, 사망한 게, '니 잘못이 아니다. 형 좋은데 갔을 거다.' 흐윽... 그 말이 듣고 싶어요. 그렇다고 해도 죄책감은 그대로...(흐느낌) 아마 평생을 가지 않을까요. 죽을 때까지... 기억이 나고, 미안함 가지고 살겠지요 ... '내가 좀 더 빨리 연락을 했더라면 우리 형이 아직도 내 곁에 있을 텐데' 이런 죄책감은 계속 있어요......

제가 일하는 곳에서 얼마 전에 추락사로 돌아가신 분이 있어요. 며칠 전에도 사고가 있었어요. 조선소에는 추락사고가 엄청나게 잦거든요. 제가 조선소에서 2013년 처음 일했던 대우조선소에서 입사교육을 받는 날 사망자가 한 명 있었어요. 갓 대학을 입학한 알바생이었는데 출근 첫날 떨어져서 사망했다고 들었어요.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만 들리면 며칠 조용하다가 다시 언제 그랬냐는 식이에요. 일하다가 사망사고를 너무 많이 접하게 돼요.

제발 사람이 안 죽었으면 좋겠어요……
하루아침에 자기 부모형제를 영영 못 보게 되는, 그런 거잖아요…… (끝)
 
삼성중공업 크레인사고 경과설명
2017년 5월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7안벽 조립장 마틴링게 프로젝트 프로세스 모듈 건조현장 800톤 골리앗 크레인과 32톤 지브형 크레인이 충돌했다. 크레인 사고로 6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고, 25명의 노동자가 다쳤다. 부상을 당하고도 은폐되고 치료받지 못한 노동자도 있다. 한 두 발걸음 거리로 죽음과 삶이 나뉘었다. 참담한 현장은 살아온 노동자들의 몸에 흩어진 파편처럼 새겨져 있다. 수 백명의 노동자가 크레인 사고의 트라우마로 고통받고 있지만 산업재해로 인정받은 노동자는 단 14명 뿐이다.

2019년 5월 7일 1심 선고에서 삼성중공업 안전조치의무 무죄와 300만원의 벌금이 선고되었다. 사고의 책임을 모두 현장의 노동자에게 전가하였다. 2017년 5월 1일 삼성중공업에 출근한 노동자는 총 1623명이다. 이중 1464명, 90%가 비정규직노동자였다. 다치고 죽어간 노동자 모두 하청의 하청 비정규노동자였다. 이윤을 위한 외주화는 노동자들을 죽고 다치고 병들게 만든다. 노동자 자신의 생명권에 대한 권리를 온전하게 갖고, 이윤보다 생명의 가치가 우선되지 않는 한, 노동자 죽음의 행렬을 결코 막을 수 없다.

 

태그:#삼성중공업, #산업재해, #조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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