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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계의 풍운아' 정두언 전 국회의원이 지난 16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년 62세. 특정 정파를 떠나 불의의 권력에 맞서 쓴 소리와 대안을 아끼지 않은 그였기에 대중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숨진 날 오전에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국회 선진화법 관련 토론을 벌였던 고인이다.

2000년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한 정 전 의원은 17대 국회의원(2004)을 시작으로 내리 3선을 지냈다. 2007년에는 17대 대통령 당선인 비서실 보좌역으로 이명박 정부 탄생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이어 2010년 당 최고위원까지 올라 여당의 핵심 실세로 부상했다. 하지만 2년 뒤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10개월간 수감생활을 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도 패해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고 한다.

그는 언론을 통해 우울증과 자살 시도 등을 알리며 자신의 흠결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평론가와 식당 대표 등으로 활약하며 '인생 2막'을 성공적으로 개척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화려하면서도 굴곡진 그의 인생사는 말하지 못한 사정이 있어 보인다. 한때 정권 실세로 '권력의 단맛'을 봤지만 구속 수감 등 불의의 사건으로 정치권에서 멀어지면서 쌓인 분노와 우울증, 스트레스 등이 그의 삶을 옥죄었을 가능성이 높다.

경찰도 유서에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취지의 유서가 발견됐다는 점 등으로 미뤄 타살 흔적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유가족은 부검하지 않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감이 클수록 우울증을 앓기 쉽다고 진단했다. 우울증이 극단적 선택을 이르게 할 수 있는 만큼 이 질환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유능하고 강직한 사람도 우울증을 앓으면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임 교수는 "유명인이 받았던 관심이 상대적으로 줄어들면 섬처럼 고립되는 기분이 들 수 있다"며 "상실감이 커질 경우 자칫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홍진표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도 "건강상 문제가 있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등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자살 충동이 높아질 우려가 있다"며 "사회적으로 명예가 있거나, 관심을 받던 사람일수록 그런 경향이 있다"고 했다.

 
보건복지부가 2017년 9월 보도자료를 통해 배포한 우울증 진단표.(사진=보건복지부 제공)
 보건복지부가 2017년 9월 보도자료를 통해 배포한 우울증 진단표.(사진=보건복지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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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가 10명 중 9명 "우울증, 심각한 사회 문제"

'우울증'은 2주 이상 우울한 기분이 들고 활동에 흥미나 즐거움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우울증을 앓으면 식욕이나 수면시간 변화, 불안, 집중력의 감소가 나타날 수 있다. 심하면 자살 생각으로 번지기도 한다.

임상진료지침정보센터가 2008년 마련한 '우울증 진료지침'에서는 우울증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했다. 우울증 정도가 가장 낮은 수준인 '경도 우울증'과 강도가 심해지는 '중등도 우울증', '심각한 우울증', '정신병적 양상을 동반한 심각한 우울증' 등이다. 처음에는 교육과 상담 등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자살로 이어질 수 있는 '정신병적 우울증'은 항우울제와 항정신병약물 병합 등 전문 의약물 치료가 필요하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한국의 우울증 환자는 성인 인구의 4.5%인 214만5000여 명에 달한다. 자살자의 88.4%가 우울증 등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진 만큼 자살률 해소를 위해 우울증 치료는 선행조건이다. 하지만 꾸준히 약물치료를 받은 우울증 환자 비율은 15%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우울증이 사회적으로 심각한 수준이라고 보면서도 문제해결의 합의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실제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이 2012년 펴낸 '한국보건의료연구원 국내 정신질환 관련 연구현황 파악 및 우울증 자살에 대한 연구'를 보면 정신과 전문의 379명 중 33.77%가 우울증이 사회적으로 '매우 심각하다'고 했다. '심각하다' 응답도 56.46%에 달했다. 정신과 전문의 10명 중 9명이 우울증을 사회적 문제로 인식한 셈이다.

우울증 예방과 치료 해법은 미비한 상태다. '우울증의 예방 및 해결을 위해 필요한 조치들이 취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 82%가 '잘 안 되고 있다'거나 '전혀 안 되고 있다'고 답했다.

우울증 예방 및 해결이 어려운 이유는 '우울증 진료지침 인식 부재'가 가장 많았으며, '중앙정부의 지원 및 전략 부재', '전문적인 진료지침에 대한 합의 부족'이 그 뒤를 이었다. 우울증 치료의 중요성을 알고 있지만 병원 현장에선 진료지침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우울증을 앓는 환자들은 정신과 진료 이외 치료법에 대해 잘 모르거나 경험한 적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며 "약물치료뿐만 아니라 다양한 치료법에 대한 건강보험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지역사회의 교육과 홍보 등을 통해 우울증 진료지침을 보급해야 한다"고 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1월 22일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자살예방 국가 행동계획’ 사전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사진=정책브리핑)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1월 22일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자살예방 국가 행동계획’ 사전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사진=정책브리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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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 '정신건강 종합대책' 마련하기도

정부는 우울증을 정신질환의 하나로 보고 국가적 차원의 해법을 찾고 있다. 2001년부터는 5년마다 실태조사를 통해 정신질환의 문제점과 심각성을 알리고,실질적인 해법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지난 2016년 2월에는 '정신건강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국민 정신건강 증진과 자살 예방, 중증 정신질환자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해법 등을 담았다. 그중 자살 예방 대책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점이 눈에 띈다. 정부는 보건복지콜센터(129)와 정신건강 위기 상담 전화(1577-0199)를 통한 자살 위기 상황에 대한 24시간 긴급 대응 체계를 갖추기로 했다.

국립병원은 '심리지원 이동 버스'를 통해 학교와 사업장에서 자살 예방을 위한 심리지원 서비스를 제공한다. 재난 발생 시 현장에 파견해 상담 등 재난 심리지원도 갖는다.

같은 해 5월에는 '정신건강복지법'이 전면 개정돼 국민 정신건강 증진 사업이 법제화됐다. 개정안에 따라 국가와 지자체는 국민의 정신건강 증진을 위한 공간 마련과 정신질환 복지서비스 지원에 대한 계획을 수립해야한다. 정신건강 문제의 조기발견을 비롯해 국가와 지자체의 정신건강사업 추진, 학교 등에서의 정신건강 증진 사업 진행 등도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대부분 조현병(정신분열) 등 중증정신질환자에 대응한 점이 한계로 지적된다. 우울증을 앓더라도 치료에 나서는 이가 10명 중 2명도 채 안 되는 상황에서 진료 상담의 문턱을 낮춰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단순 불안 증세로 판단하기보다 국가 차원의 예방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홍진표 교수는 우울증 환자가 편하게 상담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 교수는 "정신과 치료를 받을 때 사회적으로 불이익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안심시켜줘야 한다"며 "정신과 치료를 방해하는 사회제도와 편견을 줄여야 한다. 쉽고 편하게 상담 받을 수 있는 의료보험제도장치의 장벽을 낮춰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우울증이 의심되는 경우 정신건강의학과나 정신건강복지센터를 찾아 전문가 도움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며 "쉽게 용기를 내기 어려운 사람은 정신건강 위기 상담 전화(1577-0199)를 통한 유선 상담을 권한다"고 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톱데일리(http://www.topdaily.kr)'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우울증, #우울증치료, #자살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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