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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갑차에 동승해 미군을 안내하는 일본군 모습이 이채롭다.
▲ 서울에 입성한 미 점령군  장갑차에 동승해 미군을 안내하는 일본군 모습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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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 이승만 정부 수립이 완료되자 미국은 군정시기 3년간 남한에 주둔해 있던 미 24군단의 완전철수를 결정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째서 주한미군의 철수를 전격적으로 단행했을까? 사실 미군의 철수조치는 종전 후 미국이 시종일관 견지했던 점령정책과 이후 한반도정책의 일관성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상할 게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미군은 '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떠나기 위해' 한반도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반도에 들어올 때나 나갈 때나 미국이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평가한 방식은 변화하지 않았다.

1946년 작성한 국무부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국의 한반도 점령정책은 다음 세 가지 원칙에 기반했다. 그것은 첫째, 외국의 통치로부터 독립하여 국제연합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자치적인 한국정부의 건설, 둘째, 그렇게 건설된 정부가 한국인의 자유의사를 전적으로 대표하는 민주적 정부가 되도록 보장하는 것, 셋째, 독립적인 민주국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건전한 경제와 적절한 교육체계를 확립하도록 한국인들을 지원하는 것(MacDonald, 2001:25)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위 원칙은 한반도만을 목표로 했다기보다 미국이 종전 후 모든 점령 지역에서 실시한 정책 목표로서의 국제주의 원칙이었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시급히 달성해야 할 정치적 과제를 목표로 삼았다면 해방 직후에는 신탁통치가 아니라 단일정부 수립에 모든 노력을 경주했어야 했다. 단일정부 수립이 실패로 돌아간 1948년에는 한반도의 안보위기를 불식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모색했어야 했다. 하지만, 역사가 입증하듯이 미국은 반대의 길을 걸었다.

한반도를 소련과 분할 점령한 상황에서 미국이 설정한 위의 세 가지 점령 원칙도 견지하기 어려운 목표였겠지만, 미소공위 실패가 최종 확인된 1948년에는 통일한반도라는 목표는 현실적으로 달성하기 더 어려워졌다. 유엔총회 결의에 따라서 1947년 유엔위원단이 총선거를 준비하기 위해 북한지역에 들어가겠다는 요청을 소련은 거부했다. 누가 보더라도 분단이 현실화되면서 남북 사이의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미 합동참모본부(JCS)는 "미국은 한국에 2만의 병력과 기지를 유지해야 할 전략적 이해관계가 없다"(MacDonald, 2001:25)는 입장을 표명했다.

합동참모본부의 판단에 의거하여 1948년 4월 2일, 국가안전보장회의 정책문서인 NSC-8은 미국이 실행할 수 있는 세 가지 행동방침을 열거했다. 첫째는 남한을 포기한다. 둘째는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미국의 인적, 금전적 개입을 청산하는 방식"으로 남한정부를 지원한다. 셋째는 필요하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남한의 영토를 보장한다(MacDonald, 2001:29).

이 가운데 두 번째 경로가 가장 유력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미군 철수 전에 "북한이나 기타 무력으로부터 남한의 안보를 책임질 수 있는 현지군사력"을 키우기 위한 훈련과 장비를 제공해야 했다. 동 문서는 1948년 12월 31일까지 미군의 완전 철수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간주했다. 그러면서 미군철수 후에 초래될 급격한 경제적 붕괴를 막기 위해서 미국의 경제원조가 필요함을 인정했다. 무엇보다도 이 계획의 핵심부분은 "정치, 경제적 안정을 증진하고, 정치적 전복이나 비폭력 수단을 통해 공산주의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도록" 신생 남한정부를 정책적으로 이끌어주는 것이었다.

이를 정리하면 정치, 경제적 관여는 계속 유지하되 군사적 개입은 한반도정책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은 미군철수시한을 6개월 늦춘 것을 제외하고 NSC-8의 결정을 실행에 옮겼다. 1949년 3월 22일 작성된 NSC-8/2는 미군철수의 완료시점을 1949년 6월 30일까지로 수정하면서 미군철수를 두 가지 관점에서 정당화했다.

첫째는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면 소련의 군사적 후원을 받는 북한정권이 군사적 공격이나 폭동 등으로 남한을 전복시키려 할 가능성이 있지만, 이러한 위험성은 가까운 장래 어느 때든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철수를 연기한다 해도 남한에 남은 미군이 대규모 공격을 받아 무너지든가 한국을 포기하게 될 위험성을 크게 감소시키지 못한다는 것이 합동참모본부의 관점이었다.

둘째는 맥아더 극동군 최고사령관이 한국군의 독자적 군비태세에 대해 내린 평가에 기초한다. 맥아더는 현행 계획 내에서 한국군이 실질적으로 수립되었으며 군대의 훈련 상태와 전투태세는 미군이 완전 철수해도 될 정도라고 보고하고 지금 남한에서 철수한다 해도 일본에서 미국의 지위에 부정적 효과를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적어도 군사전략적 측면에서만큼 '일본 우선(Japan first)'의 동아시아 정책과 한반도문제를 분리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이 미군철수 결정을 내린 시점이 공교롭게도 전 세계적 차원의 미소대결이 격화되는 시기와 묘하게 일치했다는 사실이다.

1947년 1월, 폴란드에서의 공산정권 수립을 시작으로 냉전으로 향해 가는 몇 가지 중요한 사건이 유럽에서 발생했다. 외몽고의 독립을 유지하고 만주에서 여순 항과 대련 항을 국제항으로 유지한다는 얄타협정의 문호개방 약속을 소련이 더 이상 준수하지 않을 것이라는 징후가 뚜렷해졌다(Elleman, 2015:156).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 직면해서 미국은 트루먼독트린과 마샬 플랜으로 대응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소련과의 협조노선을 공식적으로 포기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모든 사태에 종지부를 찍은 사건이 유럽의 미소 공동점령지역이자 또 다른 분단국가인 독일에서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1948년 6월부터 1949년 5월까지 1년 가까이 지속된 베를린 봉쇄였다. 베를린 봉쇄를 기점으로 미국은 소련의 행동을 한편으로는 팽창주의, 다른 한편으로는 문호폐쇄를 통한 공산주의 세계혁명 전략으로 이해했다.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책으로 나온 게 바로 '봉쇄정책'이었다. 봉쇄정책의 모토는 애치슨 국무장관이 표방한 대로 소련과의 전 세계적 대결에서 '힘의 상황'을 만들어 군사적으로 밀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압도적인 미국의 경제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군사력을 통해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겠다는 게 봉쇄정책의 목표였다. 이를 위해 미국은 1949년 4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했다. 국내적으로는 1950년 4월, 국제주의의 냉전형 버전인 NSC-68 채택으로 힘에 의한 소련의 억지전략, 곧 봉쇄정책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NSC-68은 그 함의에 있어 전 세계적이었지만 적용에 있어 유럽에 국한되었던 트루먼 독트린의 실질적인 확대를 의미했다. 이 문서는 미국이 세계경찰역을 담당해야 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했다(Ambrose, 1984:165).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봉쇄정책은 한반도를 비껴갔다. 주한미군이 최종 철수한 1949년 6월은 베를린 봉쇄에 이은 NATO 창설 등으로 세계적 차원의 봉쇄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미국이 미군철수를 단행한 것은 세계적 차원의 봉쇄정책에서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그만큼 낮게 평가한 것에 다름 아니다.

무엇보다 중국, 일본 중시라는 기존 동아시아정책을 지속함과 동시에 미국의 대외정책과 한반도문제의 분리, 곧 디커플링 노선을 견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안보에 중요하긴 하지만 필수적이지 않은 남한과 같은 지역에서, 소련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군사적 수단이 아닌 정치, 경제적 수단에 주로 의지해보려는 트루먼 행정부의 전략이 적용된 첫 사례였다(Matray, 1989:208).

미국의 새로운 동아시아·한반도 정책을 최종 확인시켜준 게 바로 1950년 1월 12일의 애치슨 국무장관이 프레스센터 연설에서 발표한 '애치슨라인' 선언이었다. 애치슨라인은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남한과 대만을 제외했다. 두 나라가 제외된 맥락은 군사적 이유에서는 동일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달랐다.

미국의 봉쇄정책에서 비어있던 지점이 바로 중국이었다. 이에 대한 미국의 구상이 바로 '애치슨선언'에서 구체화된 것이다. 만주를 소련 영토로 인정하고 국민당 정권을 중국 내 유일합법정부로 인정해주는 조건으로 스탈린은 장개석과 중러밀약을 체결했다. 이 때문에 모택동은 스탈린을 불신했고, 양국 사이에는 갈등이 감지됐다(도진순, 2002). 미국은 일종의 쐐기전략의 일환으로 애치슨선언을 통해 양국의 틈새를 파고들고자 했다. 한마디로, 대만을 미국 방위선에서 제외함으로써 모택동 정권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한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의 경우, 소련의 직접적 공격목표가 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에 애치슨라인에서 제외했다. 애치슨선언은 북한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않겠다는 의도와 함께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과 같은 모험주의적 군사행동 저지를 동시 목표로 설정했다(Matray, 1989:226~227). 애치슨이 이런 판단을 내리기까지 1948년에 작성된 NSC-8이 주요근거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NSC-8은 "미국은 유엔이 지속적으로 한반도문제에 개입하도록 만들고, 유엔과의 협조 아래 한반도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은 그럴 필요가 있다면 통일문제를 가지고 소련과 협상해야 하며 "남한 내 무장세력이나 북한이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하는 이유로 삼을 만한" 한반도에 대한 개입은 피해야 한다고 적시했다(MacDonald, 2001:29-30).

결국, 미군철수와 애치슨라인 선언은 미국의 전후 점령정책이 종결됐음을 의미한다. 한반도 점령을 위해 들어온 미군과 소련군이 모두 철수함으로써 한반도에는 일종의 '힘의 공백'이라 할 만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 상황은 갑신정변 직후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천진조약' 체결로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동시 철병했던 상황과 대단히 유사했다.

당시 청나라군과 일본군의 동시철병 조치로 조선에서 정치, 사회적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얼마 되지 않은 골든타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군과 소련군의 동시철수로 한반도문제에 있어서 남북의 자율성이 급격히 확대되는 예외적 조건이 마련됐다. 따라서 맘먹기에 따라 남과 북은 분단을 해소하고 통일국가를 수립하는 문제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나름의 정치적 시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통일이라는 민족공통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민족 내부의 구심력으로 미국과 소련을 포하만 주변 강국의 원심력을 얼마만큼 극복해낼 수 있느냐에 달려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과 북의 생각은 달랐다. 민족 내부의 구심력을 강화하기보다는 세계적 차원의 냉전 체제를 확대, 강화하는 방향으로 몸을 맡겼다. 그에 따라 한반도는 심각한 군사적 위기상황으로 접어들었고, 결국에는 한국전쟁으로 폭발했다.

■ 참고문헌
Acheson, D. G. 1950. "Crisis in Asia; An Examination of United States Policy." Department of State Bulletin 22.551(23 January).
Ambrose, S. E. 1984. Rise to Globalism: American Foreign Policy since 1938. New York: Penguin Books.
Elleman, B. A. 2015. International Competition in China, 1889~1991: The Rise, Fall, and Restoration of the Open Door Policy.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Hopkins, M. F. 2012. "Dean Acheson and the Place of Korea in American Foreign and Security Policy, 1945-1950." 『미국학』 35권 2호.
MacDonald, D. S. 2001. 『한미관계 20년사: 1945~1965년』. 한국역사연구회 1950년대 반 옮김. 한울아카데미.
Matray, J. M. 1989. 『한반도의 분단과 미국: 미국의 대한 정책, 1941-1950』. 을유문화사.
Matray, J. M. 2002. "Dean Acheson's Press Club Speech Reexamined." The Journal of Conflict Studies vol. XXII No. 1.
도진순. 2002. "1950년 1월 애치슨의 프레스클럽 연설과 하나의 전쟁 논리". 『한국사연구』 119호.

태그:#일반명령1호, #애치슨선언, #NSC-8, #베를린위기, #봉쇄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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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 정치이론, 한국정치, 국제관계, 한미관계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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