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9일 방송된 < MBC 스페셜 > '이 남자 분노하다'편 중 한 장면

2019년 7월 29일 방송된 < MBC 스페셜 > '이 남자 분노하다'편 중 한 장면 ⓒ MBC

 
며칠 전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 넌 페미니즘이 뭐라고 생각해?"
"누구나 자기 자신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거."
 

초등학교 5학년생인 아들은 이렇게 답했다. 물론, 페미니스트 엄마 덕에 일찌감치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접해 왔고, 초등학생치고는 성평등에 대한 책도 여러 권 읽은 아이이긴 하다. 하지만 초등생 아이가 이토록 명확하게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이니 페미니즘 자체가 어려운 개념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아들도 이해한 그 가치를 담은 글을 쓸 때마다 나는 악플 세례를 받곤 했다. 댓글에 거론되는 표현 중 '메갈X', '된장녀', '김치녀', '맘충' 등 여성을 폄하하는 다양한 단어 정도는 '그나마 양반'에 속할 수준이었다. 마치 성희롱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폭력적인 댓글들도 꽤 있었기 때문이다.

댓글을 접한 후 처음엔 내 글의 표현들을 돌아보며 다시 검토했다. 이렇게까지 분노를 살 만한 표현이 있는지 자꾸만 들여다 봤다. 하지만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분명 나는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지도, 남성을 폄하해 여성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쓰지도 않았다. 그런데 내 글은 늘 오해를 받았고, 댓글을 작성한 많은 남성 독자들은 화부터 냈다. 궁금했다. 왜 이토록 남자들은 페미니즘에 분노하는가. 

지난 29일 방영된 < MBC 스페셜 > '이 남자 분노하다' 편은 내가 가진 의문과 같은 차원의 질문에서 시작한 다큐멘터리였다. 20대 남성들의 분노를 다룬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나는 남자들의 분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페미니즘에 대한 감정적 반응
  
 2019년 7월 29일 방송된 < MBC 스페셜 > '이 남자 분노하다'편 중 한 장면

2019년 7월 29일 방송된 < MBC 스페셜 > '이 남자 분노하다'편 중 한 장면 ⓒ MBC

 
다큐멘터리는 평범해 보이는 한 젊은 남성의 일과에서 시작했다. 식당에서 성실히 일하고 귀가한, 선량한 인상의 이 남자는 카메라가 설치된 TV 앞에 앉더니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1인 방송을 시작한다. 그가 말에 담아내는 단어들이 너무나 직설적이라 방송 자막에선 순화시켜 내보내야 할 정도였다.
 
이어서 카메라는 한 대학의 캠퍼스로 옮겨간다. 이 대학에서 성평등을 지향하는 페미니즘 동아리가 내건 현수막은 누군가에 의해 수시로 찢겨지고, 학내 게시판에는 여성혐오가 담긴 글들이 끊임없이 올라오는 상황이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또한 다큐 중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20대 남성들의 반응은 빅데이터 분석에도 나타나듯 분명 감정적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바로 '분노'였다. 

그렇다면 20대 남성들은 왜 이렇게 분노하는 것일까. 다큐멘터리 속 '안티 페미니스트' 남성들은 최대한 논리적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애썼다.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이 겪어보지도 못한 불만을 페미니즘에 다 넣어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라고 주장한다', '여자들은 약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쉽게 무언가를 얻어 낸다'라는 주장에서부터 '요즘 20대 남자들은 다르다. 우리는 힘도 빠졌고 성격도 대범하고 그러지 않는다. 그런데 여자들은 아직도 변화된 남성들의 형태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주장까지. 그리고 '밤길 다니는 것 남자들도 무섭다. 범죄 희생자의 상당수는 남자다. 그런데도 여자들은 남자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한다' 등 이들은 자신들이 분노하는 이유를 나름대로 조목조목 설명했다.
 
20대 젊은 남성들의 설명을 듣다 보니 어느 정도 수긍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부모보다 못 사는 세대'로 설명되는 현재 20대 남성들의 상황을 보면, 분명 사는 것이 녹록지 않아 보였다. 아무리 스펙을 쌓고 노력해도 취업하기 힘든 세상에서,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윗세대의 압력은 여전한 사회. 게다가 남성 가장으로서 누리는 특권은 점점 사라져가고만 있었다. 20대 남성들의 어려움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꼭 화를 내야 하는 일일까 
 
 2019년 7월 29일 방송된 < MBC 스페셜 > '이 남자 분노하다'편 중 한 장면

2019년 7월 29일 방송된 < MBC 스페셜 > '이 남자 분노하다'편 중 한 장면 ⓒ MBC


그런데 이들에게 공감이 되면서도 의아한 점이 있었다. 본인들도 살기 힘든 상황인 건 알겠는데, 도대체 왜 이게 꼭 여성들을 향한 '분노'여야만 하느냐는 점이었다. 살기 힘들다는 것. 노력해도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 이런 인식들은 분명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조건들이다. 세상에 대한 이런 부정적 인식은 우울, 무기력, 절망, 슬픔, 불안 등 다양한 감정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20대 남성들은 이 감정들을 한결같이 '분노'로만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이들의 분노를 보면서 이들 역시 가부장제의 피해자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여성에게 '여성다움'을 강요하듯 남성에겐 '남성다움'을 강요한다. 여기서 남성다움이란 '강하고 이성적'인 것을 의미한다. 남성들에게 슬픔과 같은 나약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가부장제에서 남성들에게 허용된 감정은 강하게 보일 수 있는 '분노'뿐이었다. 때문에 자녀가 아팠을 때 슬퍼하기보다는 아내에게 화를 내는 아버지들이 그토록 많았던 게 아닐까.

나는 다큐멘터리 속 20대 남성들이 표현하는 분노가 아픈 자녀를 두고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아버지들이 표현했던 분노와 유사하게 느껴졌다. 심리학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이들 남성들은 힘겨운 세상에 대해 슬퍼하고 있었다. 이들의 하소연 속에는 힘겨운 현실에 대한 슬픔과 절망, 무기력이 함께 느껴졌다. 하지만, 가부장적인 '남성다움'에 길들여진 이들 젊은 남성들이 표현해 낼 수 있는 감정은 '분노'밖에 없는 듯했다. 슬픔도, 무기력도, 절망감도 오직 다른 대상을 향한 분노로만 표현됐다. 자신의 감정을 무엇이고, 그 감정이 드는 이유가 뭔지 세밀하게 구분해내지도 못하고 그저 화만 내는 이들이 안쓰러워 보였다.
  
 2019년 7월 29일 방송된 < MBC 스페셜 > '이 남자 분노하다'편 중 한 장면

2019년 7월 29일 방송된 < MBC 스페셜 > '이 남자 분노하다'편 중 한 장면 ⓒ MBC

  
 2019년 7월 29일 방송된 < MBC 스페셜 > '이 남자 분노하다'편 중 한 장면

2019년 7월 29일 방송된 < MBC 스페셜 > '이 남자 분노하다'편 중 한 장면 ⓒ MBC

 
분노가 향하는 곳

분노는 머무는 감정이 아니다. 슬픔이나 우울, 절망이 내면에 머물러 있는 감정이라면, 분노는 어떤 대상을 향하는 감정이다. 상대가 있어야 분노할 수 있고, 그래야 분노는 정당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 20대 남성들은 자신의 분노가 향할 곳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여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큐멘터리 속 한 남성은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는 남자 인권이 좀 더 높다고 생각했었는데 요즘엔 여자가 남자를 끌어내리려고 한다"고. 인권에도 높고 낮음이 있고, 누가 누구를 끌어 내린다는 발상 자체가 가부장적으로 들렸다. 스스로 '맨박스(강인하고 성공해야 한다는 가부장제의 남성에 대한 고정관념)' 안에 갇힌 이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부정적 감정들을 모두 분노로 치환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여성은 여전히 자신들의 분노를 함부로 표현해도 되는 손쉬운 존재였던 것 같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오늘날 스펙을 쌓아도 취업이 되지 않고, 점점 살기 어려워지는 것이 과연 여성들 때문일까? 사회 구조적으로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자본주의의 폐해가 커져가는 것이 과연 여성을 탓할 문제일까? 결혼을 생각한다면, 대다수 젊은 남성들이 이런 힘겨운 세상에서 함께 경제적 짐을 나눠질 수 있는 맞벌이가 가능한 여성을 원할 것이다. 여성들은 힘겨운 세상을 함께 헤쳐 나가고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힘을 합쳐 나가야 할 존재지, 남성들이 살기 어려운 조건을 만들어 낸 존재가 아니다. 이들이 분노해야 할 대상이 있다면 이런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낸 부패한 권력이어야 했다.
 
 2019년 7월 29일 방송된 < MBC 스페셜 > '이 남자 분노하다'편 중 한 장면

2019년 7월 29일 방송된 < MBC 스페셜 > '이 남자 분노하다'편 중 한 장면 ⓒ MBC

  
 2019년 7월 29일 방송된 < MBC 스페셜 > '이 남자 분노하다'편 중 한 장면

2019년 7월 29일 방송된 < MBC 스페셜 > '이 남자 분노하다'편 중 한 장면 ⓒ MBC

 
다큐멘터리는 '20대 남성은 ○○○다'라는 문장을 완성시키며 마무리된다. 이 질문을 받은 어느 20대 남성은 '20대 남성은 햄버거 패티'라고 답한다. 이에 대해 그는 "여성들에게는 동등성을 요구받고, 윗세대에게는 맨박스를 요구받는 햄버거 패티"라고 설명했다. 20대 남성들이 겪는 혼란과 어려움을 절묘하게 표현해낸 말이었다.

하지만 이는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하게 일하고 성공할 것을 요구받으면서도, 전통적인 여성상에도 충실할 것을 요구받는다. 서로 상충되는 두 가지 조건 사이에 끼여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 여성과 남성이 다르지 않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여성과 남성이 힘을 합쳐 이 '햄버거 패티 같은' 상황에서 함께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려면 '맨박스'에도 '유리천장'에도 갇히지 않고, 누구나 나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 답은 성평등을 담은 페미니즘에 있다. 그러므로 분노하는 남성들에게도 페미니즘은 필요한 것이다. 다큐멘터리 속 '남성과 함께 하는 페미니즘' 모임에 참여한다는 20대 남성의 말처럼 말이다.

"남성들은 페미니즘이 자신의 언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파편화되어 있는 모양이지만, 사실, 청년 남성에게도 유효한 언어이고 (중략) 굉장히 유효한 거울, 렌즈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렌즈를 통해 바라본다면 여성들과 분리되지 않고 함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2019년 7월 29일 방송된 < MBC 스페셜 > '이 남자 분노하다'편 중 한 장면

2019년 7월 29일 방송된 < MBC 스페셜 > '이 남자 분노하다'편 중 한 장면 ⓒ MBC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에도 실립니다.
페미니즘 남성 분노 여성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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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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