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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대구를 떠나본 적이 없다. 언론인이 되려고 충북 제천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랬다. 초, 중, 고, 대학, 군대까지 모두 대구에서 지냈다. 물론 대구에서 한 평생 살아간 어르신들에게는 견줄 게 아니지만 27년 대구 물을 먹은 나는 전형적인 'TK 토박이'였다. 철새들이 돌고 돌아 고향에 다시 오듯, 다른 지역으로 떠나면 늘 대구가 그리웠다. 하지만 최근 그 애정이 식는다. 남은 건 초라한 'TK 자존심'이다. 대구를 떠나니 알았다, 내가 얼마나 변화를 두려워하고 자신을 고집했는지. 아직 진보도, 보수도 모르는 나에게 고향만 말하면 '보수 꼴통' 표식이 붙는 건 왜일까?

택시를 타면 세상을 느낀다. 중년 택시 기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세상 이야기에 맞장구 치며 흥분해서 전달하는 걸 볼 때면 꽤 즐겁다. 택시를 타면 적어도 열에 세 번 정도는 그렇다. 기사들이 듣거나 보는 미디어 채널은 다양하다. 하지만 내 고향 대구는 한결같다. 방향을 안내해야 할 내비게이션은 TV조선이나 채널A 방송으로 대체돼있고, 라디오는 문재인 정부를 비난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택시 기사는 나에게 말한다. '경제가 파탄 났다'고. 대북 정책은 의견이 갈린다. '평화통일은 해야지'라고 말하는 택시를 낮에 탔다가도, 몇 시간 뒤 돌아오는 다른 택시에서는 '북한한테 나라를 다 갖다 바치게 생겼다'고 한다. 내가 '언론'을 공부한다고 하자 몇몇은 말한다. "나중에 어디 들어가면 정확한 정보를 좀 전달해라"고. 그 다음 문재인 정부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데, 그냥 침묵을 지킨다. 
 
 택시를 타면 세상을 느낀다.
 택시를 타면 세상을 느낀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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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철만 되면 빨간색, 파란색이 지도를 수놓는다. 대구는 언제부터인가 빨간색 일색이다. 그리고 뉴스 헤드라인에는 이렇게 뜬다. '보수 심장, 자존심을 지키다' '지역 통합, 해결해야 할 과제'… 지난 1월, 자유한국당 당권 경쟁에서도 그랬다. 보수를 대표하는 자들은 대구를 가장 먼저 찾았다. 황교안 전 총리는 "통합 진보당을 해산한 사람이 누굽니까"라며 대구 민심을 자극했고, 김진태 의원은 5.18광주 민주 항쟁 역사를 왜곡하는 지만원 씨를 격정적으로 소리치며 옹호했다. 김문수 전 지사는 '문재인이 문제다'라는 구호를 단체로 외치자고 했다. 그들은 대구시민이 느끼는 불편함에 관해서는 묻지 않는다. 정책 설명도 없다. 그냥 대구와 보수가 연결된 지점은 '의리'다.

나는 이런 고향 대구가 부끄럽다. 사랑하고 자랑스러운 내 고향이기에 더 그렇다. 식당을 가도, 카페를 가도, 술집을 가도 하나같이 들리는 '문재앙' 이야기. 곳곳에는 온통 <조선일보>와 <매일신문>같은 보수 신문이 판을 친다. 고향 친구들에게 물어도 마찬가지다. 몇 번 얘기하다 보면 어느새 난 '좌빨'이 돼있다. 술에 만취한 어떤 친구는 "김정은 욕 한 번 해보라"고 한다. 대구 밖으로 나가면 '꼴통 보수'로 낙인 찍힌 내가 고향 대구에 오면 '종북' '빨갱이'가 되어 있으니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다. 도대체 보수가 뭐고, 진보가 뭐길래 나는 온전한 나로 보일 수 없는 걸까? 택시 창 밖으로 보이는 고향 길 태극기는 오늘 따라 원망스럽다.

'의리'가 나쁜 것은 아니다. 지역 브랜드가 '보수'이고 대구 사람들이 그 성향이라면 지킬 필요가 있다. 다만 '의리' 앞에서 뒤통수 맞으면 안 된다. 정치인이 외치는 '보수 심장'에 감정적으로 동요해서는 안 된다. 감정적 군중심리는 '배신의 정치'라는 배척의 말을 낳고, 다양한 의견을 묵살한다. 보수라고 해서 오로지 '군사독재' 정권 시절처럼 한 뜻으로만 마음이 모아진다면 그것은 '가짜 보수'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진짜 보수'가 필요하다. 시장주의자들이 자주 언급하는 애덤 스미스도 마냥 개인의 자유를 찬양하지는 않았다. 그는 '공공재'의 필요성을 얘기했고, 평등과 양극화 해소를 자유주의의 기본 전제로 삼았다. 영국 '보수당의 아버지'라 불리는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역시 "노동조건의 개선 없이 인민의 조건이 개선될 수 없다"고 말하며 노동자 선거권 부여, 공장 환경개선, 공중보건, 공공교육 등에 힘썼다. 21세기 들어와 신자유주의의 대표격인 '시카고학파' 태두 밀턴 프리드먼 역시 고소득자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저소득자에게 보조금을 주는 '음의 소득세'를 주장했다. 이게 바로 말이 통하는 '합리적 보수'이며 '진짜 보수'가 아닐까?

보수가 바로 서려면, 보수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절제와 겸손, 성실과 의무, 신중함과 진정성 등 진보진영에서 상대적으로 덜 우선시하는 가치들을 내세워야 한다. 마냥 "문재인은 빨갱이"라고 외치고, "5.18은 북한군 소행이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보수주의자를 대표해서는 안 된다. 가족애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적 가치와 전통을 옹호하는 '진짜 보수'가 태극기집회 뒤에 가려서는 안 된다. <한겨레>와 <경향>은 '빨갱이 신문'이라 말하며 <조선>을 압도적으로 구독하는 행태로 가서는 안 된다. '가짜뉴스'의 중심지인 유튜브 채널만 보며 확증편향에 빠져서도 안 된다. 다가올 2020년 총선에서 대구만 빨간색을 지킨다 하더라도 마냥 '의리를 지켰다'고 좋아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 대구를 위한 길인지 알아야만 고립되지 않는다. 무상급식이 제일 늦은 올해시작되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교사는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교육도시 대구'가 이제는 바뀌길 바란다. 다음에 고향에서 타는 택시에서는 TK 냄새가 덜 묻어나길 바란다. 꽃 향기도 적당해야 향기지, 넘치면 냄새고, 과하면 '악취'다. 내가 지키고 싶은 TK 자존심은 '진짜 보수'의 향기다. 그래야 어디 가서 '꼴통' 소리 안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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