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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꽃과 연못이 아름다운 옛 정원, 전라남도 담양의 명옥헌. 대한민국 명승 제58호입니다
 배롱꽃과 연못이 아름다운 옛 정원, 전라남도 담양의 명옥헌. 대한민국 명승 제58호입니다
ⓒ 담양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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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와 말복이 지났지만, 연일 기록을 갈아 치우는 폭염에 몸과 마음이 지쳐가고 있습니다. 이웃 나라 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촉발된 한·일 양국 관계는 일부 극우 인사들의 혐한 발언으로 점점 더 멀어져 가며 악화 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이래 저래 잠 못 드는 밤을 보내고 있는 요즘, 남도 땅은 붉디붉게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사찰이나 공원, 누정, 서원, 향교, 고택, 무덤, 심지어는 도로까지도 붉게 물들이는 주인공은 뜨거운 여름날에 피는 가장 화려한 꽃, 목백일홍입니다.

여름에 피는 가장 화려한 꽃
 
요즈음 남도 지방에는 어디를 가든 배롱꽃을 볼 수 있습니다. 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는 고택, 김용학 가옥의 연못에도 배롱꽃이 피었습니다
 요즈음 남도 지방에는 어디를 가든 배롱꽃을 볼 수 있습니다. 광주광역시 북구에 있는 고택, 김용학 가옥의 연못에도 배롱꽃이 피었습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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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대부분의 나무들은 열매를 맺기 시작하며 풍성한 가을을 준비합니다. 때문에 여름에 꽃을 피우는 나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들판이나 산기슭의 양지바른 곳에서 고운 명주 실타래를 풀어놓은 듯 가는 꽃을 피우는 자귀나무와 여름 내내 피고지기를 반복 하는 나라꽃, 무궁화 정도가 우리 눈에 흔하게 보이는 여름 나무꽃 입니다.

무궁화 꽃처럼 끈질기게 초 여름부터 가을의 문턱까지 태양처럼 붉은 꽃을 피워 내는 나무가 있습니다. 바로 배롱나무입니다. 여름철 내내 백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 하여 백일홍 나무라고도 부릅니다. 사람들이 백일홍, 배기롱 하다가 소리 나는 대로 부르기 좋게 '배롱' 나무가 되었다 합니다.
 
배롱나무의 붉은 꽃은 변하지 않는 붉은 마음, 단심(丹心)을 상징합니다. 사당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배롱나무의 붉은 꽃은 변하지 않는 붉은 마음, 단심(丹心)을 상징합니다. 사당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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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 문씨 사당, ‘균산정’의 배롱나무가 유난히 화사 합니다
 남평 문씨 사당, ‘균산정’의 배롱나무가 유난히 화사 합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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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여름은 배롱꽃과 함께 시작됩니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6월 말부터 피기 시작하는 배롱꽃은 더위가 절정을 이루는 8월 중순경에 지글거리는 태양에 맞서 '붉음의 절정'을 토해 냅니다. 이후 9월 말까지 석 달 열흘 동안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백일홍은 남도의 여름을 상징하는 꽃입니다.

그러다 여름이 끝나가는 초가을 무렵, 벼가 익어 갈 때쯤 되면 서서히 '백일 간의 붉음'을 퇴색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남도 사람들은 이 꽃이 지고 나면, 비로소 쌀밥을 먹을 수 있다 하여 '쌀밥 나무'라고도 부릅니다. 가난하고 배고팠던 옛 시절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무등산 증심사 오백전에서 바라본 배롱나무입니다
 무등산 증심사 오백전에서 바라본 배롱나무입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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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빈정사 극락전 옆의 배롱나무는 망자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문빈정사 극락전 옆의 배롱나무는 망자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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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하는 말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합니다. 아무리 붉고 아름다운 꽃도 십일을 넘기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꽃에게는 '화무백일홍'이란 말이 더 어울릴 듯합니다. 그렇다고 한 꽃이 백일 동안 피어 있는 건 아닙니다.

배롱꽃은 무궁화처럼 한 꽃이 지고 나면 다른 꽃들이 차례로 피고 지기를 반복하며 마치 릴레이 경기를 하듯이 꽃을 피워 내기 때문에 오랫동안 피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찰이나 향교 서원에 배롱나무를 심어놓은 뜻은 백일홍처럼 꾸준히 학문과 수양에 힘쓰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사찰이나 향교 서원에 배롱나무를 심어놓은 뜻은 백일홍처럼 꾸준히 학문과 수양에 힘쓰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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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밖의 배롱나무가 절안을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담장 밖의 배롱나무가 절안을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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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초목이 온통 초록으로 덮여 있을 때 붉은 꽃을 피워 한층 더 돋보이는 배롱나무의 고향은 우리나라가 아닙니다. 따뜻한 남쪽 나라, 중국의 남부지방에서 온 귀화 식물입니다.

당나라 장안의 자미성에서 많이 심었기 때문에 '자미화(紫微花)'라고도 합니다. 고향 자미성과 기후가 비슷한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 배롱나무를 많이 불 수 있는 까닭입니다.

요즈음 남도 지방에는 어디를 가든 배롱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배롱꽃과 연못이 아름다운 옛 정원이 있습니다. 담양의 '명옥헌(鳴玉軒)'이 그곳입니다. 대한민국 명승 제58호로 지정될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명옥헌 원림에는 고목의 배롱나무가 연못과 정자와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여름날의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꽃비가 만들어낸 레드카펫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명옥헌 원림에는 고목의 배롱나무가 연못과 정자와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여름날의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연못 한가운데 둥그런 천상의 섬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명옥헌 원림에는 고목의 배롱나무가 연못과 정자와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여름날의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연못 한가운데 둥그런 천상의 섬이 있습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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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을 중심으로 가장자리 둑방 길을 따라 오래된 배롱나무가 가지마다 붉은 꽃무리를 달고 연못을 뒤덮고 있습니다
 연못을 중심으로 가장자리 둑방 길을 따라 오래된 배롱나무가 가지마다 붉은 꽃무리를 달고 연못을 뒤덮고 있습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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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여 년 전에 지어진 옛 선비의 별서 정원, 명옥헌에는 두 개의 연못이 있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계곡물이 흘러 위쪽 연못을 채우고 그 물은 다시 아래의 연못을 채웁니다. 이때 물 흐르는 소리가 마치 옥구슬 구르는 소리와 같다 하여 '명옥헌(鳴玉軒)'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연못을 중심으로 가장자리 둑방 길을 따라 오래된 배롱나무가 가지마다 붉은 꽃무리를 달고 연못을 뒤덮고 있습니다. 연못에 풍덩 빠진 배롱나무는 꽃물결을 일렁이며 붉은 파장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떨어지는 꽃잎은 붉은 꽃비가 되어 레드카펫을 깔아 놓았습니다.
 
스스로 껍질을 벗는 배롱나무는 겉과 속이 똑같습니다. 원숭이도 이나무에서는 떨어진다 하여 ‘미끄럼 나무’라고도 합니다
 스스로 껍질을 벗는 배롱나무는 겉과 속이 똑같습니다. 원숭이도 이나무에서는 떨어진다 하여 ‘미끄럼 나무’라고도 합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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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등지고 향리로 돌아온 선비는 네모진 연못 한가운데에 둥근 섬을 하나 만들어 놨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옛사람들의 세계관,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을 반영 해 놓은 것입니다.

은둔의 처사는 둥근 천상의 이상 세계를 곁에 두고도 평생을 그리워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늘의 섬을 바라보며 무릇 이상(理想)이란 네모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은 미지의 세상임을 깨달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명옥헌의 연못에 떨어진 붉은 꽃잎이 처연합니다
 명옥헌의 연못에 떨어진 붉은 꽃잎이 처연합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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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남도 지방의 누정(樓亭)들이 그러하듯이, 명옥헌도 아름다운 풍경의 이면에는 현실정치에 절망하여 낙향한 옛 선비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조선 중기 광해군 시절에 '맑은 계곡'이라는 호를 가진 명곡(明谷) 오희도(吳希道 1583∼1623)라는 선비가 있었습니다.

패거리들끼리 붕당을 지어 죽고 죽이는 '사화와 당쟁'의 시기였습니다. 자신의 왕좌를 위협하는 어린 동생을 방에 가둬 놓고 불을 때서 죽이고 어머니마저 폐위시킨 '폐모살제(廢母殺弟)'의 죄를 저지른 폭군, 광해군의 폐륜 정치에 환멸을 느낀 명곡 오희도는 현실 정치를 떠나 낙남(落南)하여 담양 후산리에 '망재(忘齋)'라는 조그만 서재를 짓고 은둔하며 여생을 보냅니다.
 
광해군의 패륜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낙남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오이정(1619~1655)이 선친의 뜻을 이어 은거하면서 아버지가 머물던 곳에 정자를 짓고, 주변의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옥구슬 구르는 소리와 같다 하여 정자 이름을 ‘명옥헌’이라 하였습니다
 광해군의 패륜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낙남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오이정(1619~1655)이 선친의 뜻을 이어 은거하면서 아버지가 머물던 곳에 정자를 짓고, 주변의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옥구슬 구르는 소리와 같다 하여 정자 이름을 ‘명옥헌’이라 하였습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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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죽고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아들 오이정(1619~1655)이 선친의 뜻을 이어 은거하면서 아버지가 머물던 곳에 정자를 짓고, 주변의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옥구슬 구르는 소리와 같다 하여 '명옥헌'이라 하였습니다. 그 후 후손들이 연못을 파고 주위에 적송과 배롱나무를 심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오희도의 후손들이 명옥헌에 배롱나무를 심어놓은 뜻은 무엇일까요. 한 여름 뙤약볕 아래서 배롱나무는 '제 안에 소리 없이 꽃잎 시들어가는 걸 알면서 온몸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며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있습니다.

도종환 시인의 시 한 편에서 옛 선비들의 마음을 읽어봅니다.
 
피어서 열흘을 아름다운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사랑받는 사람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한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석 달 열흘을 피어 있는 꽃도 있고
살면서 늘 사랑스러운 사람도 없는 게 아니어

함께 있다 돌아서면
돌아서며 다시 그리워지는 꽃 같은 사람 없는 게 아니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수없는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 올려
목 백일홍 나무는 환한 것이다.
꽃은 져도 나무는 여전히 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제 안에 소리 없이 꽃잎 시들어가는 걸 알면서
온몸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며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거듭나는 것이다


(도종환의 시 '목백일홍'전문. 시집 '부드러운 직선' 중에서. 2013 창비)
 

태그:#남도의 여름꽃, #목백일홍, #명옥헌, #배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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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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