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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2월, 우리 가족이 일주일 동안 머문 네덜란드 인상기다. 짧은 여행이라 영혼을 깨우는 깊은 통찰은 기대하지 못하더라도 무뎌진 감각을 꼬집어 잠자는 감성 정도는 일깨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씁니다. - 기자말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는 중국에서 화물을 가득 싣고 귀향하던 포르투갈 상선 산타리나(Santarina)호를 대서양 세인트헬레나 섬 부근에서 습격했다. 기습은 성공했다. VOC는 산타리나호를 나포해 암스테르담까지 끌고 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적대국의 상선을 습격해 화물을 강탈하는 것은 엄연한 상행위에 속했다. 인도나 중국에 무역 거점을 확보하지 못한 네덜란드와 영국은 해양 루트를 충분히 개척해 놓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상선을 나포하는 것이 위험한 항해를 무릅쓰고 현지인과 무역하는 것보다 더 수익성이 좋다고 여겼다.

산타리나호의 화물을 보는 순간 VOC 감독관의 입이 딱 벌어졌다. 거기에는 생전 처음 보는 그릇이 있었다. 마르코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얘기한 전설로만 듣던 중국의 자기 그릇이다. 당시 네덜란드 사람들이 사용하던 생활 용품은 주석으로 만들거나 나무로 만든 그릇이 대부분이었고 간혹 귀족들은 마요르카라고 불리는 도자기(엄밀히 따지면 도기)를 사용했다.

마요르카는 스페인, 이탈리아를 거쳐(더 멀리 기원을 추적하면 사라센, 페르시아까지 닿는다) 북유럽에 전해진 고급 그릇의 대명사로 연질자기여서 경질자기에 비해 모양이 투박하고 색깔도 칙칙하다. 무엇보다 수분의 투과성을 완벽하게 차단하지 못해 깨끗한 물이나 고급 음료는 오래 보관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단점을 완벽하게 극복한 것이 중국의 자기(porcelain, 포슬린)였다. 투명할 것 같은 얇은 두께에 손가락으로 튕기면 탕, 하고 나는 청아한 소리. 순백의 순결성과 성모 마리아가 입었던 옷 색깔인 파란색의 고귀함. 이런 미학적 감성은 물론이거니와 어제 먹은 음식 냄새가 배어 있어 새 음식 맛까지 망쳐버리는 기존 그릇과 달리, 설거지하면 깨끗하게 닦이는 실용성 때문에라도 유럽인들은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1640년대 경덕진에서 생산된 자기 접시
 1640년대 경덕진에서 생산된 자기 접시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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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0년대 경덕진에서 생사된 화병
 1640년대 경덕진에서 생사된 화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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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가정이라면 하나쯤 갖고 있던 것

그들은 중국산 자기를 보고 세 번에 걸쳐 놀랐다. 첫째, 도자기 바탕이 하얀색이고, 둘째는 여태껏 보지 못한 신비한 파란색으로 그림을 그렸고, 마지막으로 이국적인 중국풍 그림였다.

동양의 신비한 그릇이 도착했다는 소문이 돌자 암스테르담의 상류층 사이에선 이를 구입하기 위해 VOC에 문의가 끊이지 않았다. 기회를 놓칠세라 VOC는 이 진귀한 물건을 경매에 부치기로 했다. 암스테르담 항구에서 중국산 자기(청화백자)가 경매에 나오자 사람들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청화백자는 단순한 그릇이나 이국의 신기한 물건이 아니라 아득한 동방의 신비한 나라, 그 환상과 로망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듬해 VOC가 포르투갈 상선 카타리나 호를 말라카 해협의 조호르에서 나포했을 때는 산타리나 호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자기가 실려 있었다. 10만점의 자기에 50톤이 넘는 무게였다.

소문은 빠르게 퍼져 카타리나 호가 암스테르담에 입항할 적엔 전 유럽에서 구매자가 모여 대기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화물을 경매에 부칠 것이라고 했다. 포르투갈은 노략질이라면서 배와 화물을 돌려달라고 강력히 항의했지만 VOC는 전리품이라서 돌려줄 수 없다고 했다.

프랑스의 앙리 4세, 영국의 제임스 1세 등의 국왕과 왕실 못지않은 재력을 뽐내는 귀족들도 눈독을 들였다. 값이 얼마든 상관하지 말고 구입해 오라는 왕실의 명을 받은 상인들은 초조하게 경매에 참여했다. 경매는 며칠 만에 '완판'됐고 VOC는 천문학적인 이익을 거두었다.

위험한 전투보다는 상행위가 낫다고 생각한 VOC는 이제 본격적인 무역에 뛰어든다. 물론 아직까지는 향신료가 최애 아이템였지만 도자기가 두 번째 아이템으로 등극했다. 영국과의 경쟁으로 향신료의 이윤율이 점차 떨어지자 VOC는 자기 수입에 더 비중을 두었다.

조용준의 <유럽 도자기 여행-북유럽편>에 따르면, 첫 경매 후 동인도회사의 배들은 1년에 10만 점이 넘는 중국 자기를 네덜란드로 실어 날랐다. 이 숫자가 당시 암스테르담 인구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놀라운 양이 아닐 수 없다.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네덜란드 가정은 너나 할 것 없이 중국산 자기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었다.
 
17세기 중반 유럽에 수출되었던 명나라 화병. 그림 내용은 수호지 장면 중의 하나로 추정
 17세기 중반 유럽에 수출되었던 명나라 화병. 그림 내용은 수호지 장면 중의 하나로 추정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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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때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중국이 정치적 격변에 휘말린 것이다. 신종 만력제 사후 명나라는 안으로 가뭄과 학정으로 인해 내란이 발생했고, 밖으로는 여진족의 발흥으로 외변이 잦아졌다. 1639년 이자성의 난, 1644년 청나라 북경 입성, 1673년 삼번의 난 등으로 이어지는 혼란으로 사회는 피폐해지고 생산력은 극도로 침체됐다.

도자기라고 이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생산량이 급격히 줄었다. 특히 양자강 이남이 주전장(主戰場)이 된 삼번의 난 때는 자기 생산의 메카인 경덕진(景德鎭)이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당시 네덜란드가 중국 무역의 근거지로 삼고 있었던 곳은 포르투갈을 밀어내고 차지한 타이완이었다. 그러나 멸청복명(滅淸復明)의 기치를 내걸고 봉기한 정성공(鄭成功, 1624~1662) 세력이 타이완으로 밀려들어 왔다. 전투에 패한 네덜란드는 타이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자기의 등장
 

이런저런 사정으로 중국 자기 구입이 원활치 못하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중국 자기를 대체할 수 있는 대용품을 찾았다. 그러다가 일본이 눈에 띄었다. 마르코폴로가 황금의 나라라고 칭한 곳.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일본에서 은을 가져오는 것에 혈안이 됐지만, 네덜란드는 자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포르투갈은 일본을 포교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네덜란드는 오로지 상행위만 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이렇게 해서 네덜란드는 막부(幕府)와 번주(藩主, 다이묘)로부터 자기 교역을 허락받았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끌고 온 조선 도공의 기술 전수로 자기 생산이 막 개화할 즈음였다. 임진왜란 전까지 일본은 자기를 생산하지 못했다. 기술적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자기를 생산하는 곳은 전 세계에 중국과 조선밖에 없었다. 일본을 통일해 전국시대에 마침표를 찍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팽배해 있는 전쟁문화를 순치할 요령으로 다도(茶道)를 유행시킨다.

다도를 즐기기 위해선 다기가 필요한데 다도의 원조이자 거성인 센리큐(千利休)는 중국 자기는 너무 비싸니 조선의 자기를 추천한다. 지방 영주(다이묘)이자 무장들은 새로운 시대적 흐름에 편승하고 문화적 교양인으로 치장하기 위해 너도나도 자기를 구입해 다도에 입문했다.

함께 모여 차를 마시고 다완(茶碗)을 감상하는 다회(茶會)는 칼이 아닌 차로 대결하는 또 다른 정치 공간이었다. 고급 다완을 원하는 다이묘 때문에 자기 값이 천정부지로 솟았다. 이러니 조선에 출병하자마자 도공을 찾는 데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전쟁이 흐지부지 되자 다이묘들은 조선에서 퇴각하면서 닥치는 대로 도공을 잡아갔다.

큐슈 사가현의 아리타는 조선 도공 출신 이삼평(李參平)이 일본 자기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는 곳이다. 이곳 아리타에서 생산한 자기를 네덜란드 상선들이 주로 수입했는데 자기를 선적하는 항구가 이마리(伊萬里)여서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마리 자기'라고 불렀다. 이마리 자기 역시 중국 자기 이상으로 네덜란드에서 인기를 끌었다.
 
초기 이마리 자기, 1630년대
 초기 이마리 자기, 1630년대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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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자기를 처음 수출한 해는 1650년으로, 샘플용 145개를 보냈다. 암스테르담 상인들의 반응은 괜찮았다. 중국 경덕진에서 만든 것만큼의 수준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동양의 자기라고 인정할 만했다. 그런 일본산 자기가 순식간에 양적 질적으로 급성장해 중국 자기 이상의 상품이 됐다. 조선 출신 도공의 활약과 우수한 품질의 태토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상인의 주문이 급격히 늘었다.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관이 있는 곳에도 일본산 자기 주문이 쇄도했다.

기록에 의하면 1659년에만 5만 여점의 자기가 수출됐다. 아라비아의 항구도시 알무카(al Mukā)로 납품하는 5만 6000개의 자기 주문 계약서가 남아 있고, 이스탄불의 토카프 궁전엔 아리타 자기 2천여 점이 소장돼 있다고 한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유럽으로 들여온 아리타 도자기는 17세기 초에서 18세기 초까지 100여 년 동안 공식 기록만 해도 120만여 점이 넘는다. 비공식적인 것까지 합치면 이의 2~3배가 넘는다고 봐야 한다.

일본의 도공들은 청색 하나로 이미지를 나타내는 모노크롬(청화백자)보다 여러 가지 색을 입히는 폴리크롬(다채색)을 개발했다. 자체적으로 기술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그중에서도 사카다 가키에몬이 디자인한 폴리크롬 자기는 특히 인기가 있어 중부 유럽 귀족들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 되었다. 아리타 도자기에 대한 유럽 왕실 수요가 넘치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중국인에게 아리타 스타일의 도자기를 주문하여 '중국산 아리타 도자기'라는 정체불명의 브랜드가 돼서 유럽시장으로 흘러들었다.
 
화련한 완숙미를 자랑하는 이마리 자기(17세기 후반)
 화련한 완숙미를 자랑하는 이마리 자기(17세기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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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PERDIX, #홀란드 인문산책 , #델프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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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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