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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한 사람들은 당대에 떵떵거리며 자식을 유학 보내면서 해방 후에도 후손이 잘 살 수 있었고, 독립운동 하신 분은 가족을 제대로 못 돌봐 뿔뿔이 흩어지거나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해 자식까지 오랜 세월 고생해야 했습니다.... 아주 먼 여러 나라에서 이렇게 흩어져서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이 겪어야 했던 여러 가지 고생들을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우리 정부가 독립운동가들을 더 많이 발굴하고, 후손들을 제대로 모시기 위해 더욱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지난 3월 4일 문재인 대통령이 해외 8개국 거주 64명의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한 다짐이다.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않았으나 현재 해외에는 상당수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살고 있다. 미주 한인사회만 하더라도 삼일절 또는 광복절 기념식 등에서 독립 운동가 후손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는 정부로부터 독립 유공자 후손으로 일찍 인정을 받은 분들이 있는가하면, 이런 저런 규정 때문에 방치되어 있는 유공자 후손들도 있다. 삼일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들과 해외에 살고 있는 그 후손들의 삶을 일곱 차례에 걸쳐 추적해 본다.    <기자 주> 

 
독립지사 박회락의 가족사진. 앞줄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분이 박희락 지사. 그 옆 두 남자 아동 가운데 큰 아이가 장손 박정환(현재 미국 탬파 거주)이다.
 독립지사 박회락의 가족사진. 앞줄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분이 박희락 지사. 그 옆 두 남자 아동 가운데 큰 아이가 장손 박정환(현재 미국 탬파 거주)이다.
ⓒ 박정환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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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19년 춘삼월, 일제의 폭압정치에 찌든 조선 민중의 분노가 삼일독립항쟁의 불씨가 되어 전국 각지로 번지고 있었다. 비쩍 마른 야산에 붙은 불을 투닥 투닥 끄려다 튀긴 불꽃이 산지사방에 번지듯 거센 독립항쟁의 불길은 일제의 총칼에도 불구하고 더욱 그 외연을 넓히고 있었다.

경상도 명망가 박희락은 동료 정규화, 서삼진, 이상화, 남세혁 등과 함께 3월 18일 오후 1시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읍 장터 한복판에 서서 미리 준비한 '삼일선언문'을 읽어 내렸다. 그리고는 굵은 팔뚝을 하늘 높이 치켜 세우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하루 전 비밀리에 배포된 격문과 태극기를 품고 있던 수 천 명의 주민들이 일제히 그를 따라 구호를 외쳤다. 한 손에 태극기, 다른 손에 삽, 곡괭이, 낫 등을 치켜든 시위 군중들은 영해 소학교를 지나 경찰 주재소, 면사무소, 우편국 등을 공격하여 내부의 공문서 기물 등을 부수었다.

'폭동'은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혼비백산하여 도망친 주재소 순경들의 연락을 받은 영덕경찰서는 대구의 보병 18연대의 지원을 받아 무차별 발포로 가까스로 사태를 진압할 수 있었다. 이로인해 수많은 시위군중들이 사상 처리됐고, 박희락과 그의 동료들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장로' 박희락, 기물 파괴-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다

박희락은 소요, 건조물 손괴, 기물 파괴, 공문서 훼기, 보안법 위반 혐의 등의 죄목으로 12년형을 받았으나, 문중과 지인 및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7년형으로 감형되었고, 나중에 '유화정책' 덕분에 4년형으로 최종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박희락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재산몰수를 겨냥한 1377원의 벌금형까지 받았다. 소 한 마리 값이 5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그야말로 알거지 신세가 된 것이다. 한참 후에서야 안동의 외가와 문중, 그리고 지인들의 도움으로 벌금을 갚았다.

박희락은 1882년 11월 14일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동에서 무안 박씨 종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선조 가운데는 임진왜란 당시에 비격진천뢰(일종의 시한폭탄)를 사용하여 경주성 탈환의 수훈을 세운 박진 장군이 있다. 결국 박희락은 대를 이어 일본과 싸워 온 것이다.

1919년 삼일운동 당시 일제에 항거한 박희락은 결코 폭력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힘이 장사였고 술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8세 때부터 한학을 공부했고 어느날 안동에서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 후로는 신앙에 정진하였다. 후에 박희락은 변곡면 원황동으로 이주, 최초로 교회를 세워(원황교회) 초대 장로가 되었다.

장로 박희락은 성품이 강직하면서도 도량이 넓고 학문이 깊어 주변에서 존경을 받으며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교회는 그가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며 독립운동에 뜻을 갖게 한 요람이었다. 삼일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의 반수 가까이(16인)가 기독교 지도자들이었고, 당시 전체 인구의 1.3∼1.5%에 불과한 기독교인 가운데 20% 이상이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한 사실(이만열 강연록, <삼일운동과 기독교>)을 고려하면 교회 장로인 그가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기독교인으로 민족과 역사의식에 눈을 뜨게 된 박희락은 나라의 위난 앞에 소소한 개인의 안위 따위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신앙이 깊어지면서 교회 안팎에서 박애정신을 실천함과 동시에 주변 청년들에게 민족정기를 심어주어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시대적 사명이라고 믿었다. 성경은 물론 동서 고금의 신서적을 탐독하여 정세를 파악하고 인물들을 끌어모으고 길러내려 노력했다.
 
애국지사 박희락의 묘. 대전 현충원 독립지사 제3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애국지사 박희락의 묘. 대전 현충원 독립지사 제3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 박정환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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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락은 출옥 후에도 교회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중 광복을 맞이했고 건국 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1991년 8월 18일 정부는 박희락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박희락은 87세이던 1967년 1월 16일 소천하여 고향인 축산면 도곡동에 묻혔다가 현재는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까지가 박희락의 장손 박정환(78, 미국 탬파 거주)의 증언과 <대한독립운동약사>(1980판) 221~222면의 기록을 토대로 '독립운동가 박희락'의 삶을 요약한 내용이다.

 장남이 벌어온 거금을 불쏘시개로 던진 박희락

박정환은 그의 할아버지의 인격적인 면모와 민족사랑 정신을 평생 그리워하며 닮고자 했다. 자신 또한 기독교인인 박정환은 "할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분으로, 예수님의 행적(삶)을 그대로 따라 살기로 작정한 분"이었고, "자녀들이 대의(이웃과 나라)를 위해 살기를 바라는 분"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얽힌 일화는 박정환의 가슴에 평생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를 선명하게 새겨 놓았다.

박희락은 독립운동을 하라고 장남 박동일(박정환의 아버지)을 만주로 떠나 보냈다고 한다. 문중 어른들은 '독립운동은 한 명이면 족하다'며 장남까지 독립운동에 투신토록 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정작 박동일도 아버지의 삶을 그대로 따라 살고 싶지 않았다. 너무 힘든 건 물론이고 이미 가세가 기울어 핍절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본과 만주에서 보일러 기술을 배우고 익혀 돈 버는 일에 몰두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금을 모았다.

어느날 고향을 방문한 박동일이 아버지 박희락에게 돈다발을 으쓱 내밀었다. 칭찬할 줄 알았던 아버지에게서 불벼락이 떨어졌다.

"네놈이 하라는 독립운동은 안 하고 헛짓을 하고 돌아왔구나!"

아버지는 박동일이 가져온 돈다발을 냅다 들고 나가더니 "불쏘시개나 해야겠다!"며 대뜸 아궁이에 쳐넣어 버렸다.

온 식구들이 대경실색하여 말렸으나 돈다발은 이미 새까맣게 타버린 뒤였고, 그날 저녁 아들은 친척 집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박동일은 해방 후 조선에서 두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유명한 보일러 기술자가 되었으나, 아버지인 박희락 앞에선 돌아가실 때까지 기를 펴지 못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박희락의 장손 박정환에 대한 '편애'는 유별났다고 한다. 어렸을 때에도 늘 박정환을 따로 불러 무릎에 앉히고는 "너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니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라"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격려했다고 한다. 박희락이 박정환을 각별히 챙긴 이유는 대를 이을 장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독립지사 장손 박정환, 월남전의 영웅이 되다

박정환은 1942년 만주에서 태어났다. 그러던 어느날 해방은 도둑처럼 왔고, 둘째를 임신한 어머니 김구호는 박정환의 손을 잡고 걸어서 귀국길에 올랐다. 아버지는 남은 재산과 사업을 정리한다며 현지에 남았다. 대한민국과 만주 국경을 향해 몇날을 걸어 귀향하던 중 박정환에게 뜻하지 않은 사고가 생겼다. 당시 사망률이 높았던 이질에 걸린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고, 3살배기 박정환은 벌판에서 고열로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천지사방 도울 이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서 꿇어 앉아 하늘을 보며 땅을 보며 눈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 멀리서 까만 물체가 어른어른 희미하게 나타났다 사라지고 하는 것이 보였다. '마적인가, 짐승인가…' 두려웠다. 그러나 다행히도 가까이 다가온 것은 허름한 옷차림의 행인이었다. 그는 쓰러져 있는 모자를 보고는 아스피린을 내밀었고, 박정환은 기적처럼 살아났다.

무사히 국경을 넘어 귀향한 며느리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할아버지 박희락은 무릎을 치며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우리 장손을 살렸다"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박정환은 할아버지의 따뜻한 손길과 소망을 오래도록 잊지 못한다. 할아버지는 입버릇처럼 "진정한 해방은 통일이야, 우리가 통일해야 하는데…"라며 분단 조국에 대해 늘 가슴아파 했고 "다른 사람은 다 용서해도 (분단의 단초를 제공한) 일본은 용서가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쟁이 나면 싸워야겠지만 한 번이면 족하다, 동족끼리는 싸우지 마라, 일본놈 쳐들어오면 목숨 걸고 싸워라"고도 했다.

막내 삼촌의 불평대로 "아버지가 괜히 독립운동이란 걸 해 가지고 집안이 이 모양!"일 정도여서 중고교 시절 수학여행도 못 갔던 박정환은 휴학과 복학을 거듭하며 고학한 끝에 1966년 경북대 수의학과를 졸업, 학군(ROTC)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리고는 1년도 채 되지 않은 1967년 10월 '태권도 교관'으로 월남에 파병된다. 기골이 장대한 할아버지 덕분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박정환은 만 13세이던 1955년 대한태권도협회 공인 유단자가 된 후로 최연소 5단이 되어 있었다. (1995년에는 11년 만에 귀국하여 정식 테스트를 통해 9단을 받았다.)

그런데 단순하게 '나라를 위한다'는 소박한 생각으로 월남전에 지원한 박정환 소위는 한국군 월남전사에서 '전설'이 되어 돌아온다.

박 소위는 1968년 1월 31일 베트콩 대공세 때 포로로 잡히고 만다. 이후로 3개월간 정글에서 끌려다니며 생사를 넘나들며 북한으로 강송되던 중 두 번의 시도 끝에 탈주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호치민 루트를 헤매다가 캄보디아 민병대에 잡혀 캄보디아 군사법정에 서게 되었고, 길고 험난한 재판과정을 거치게 된다.

결국 6년형을 선고받아 캄보디아 형무소에 수감된다. 그곳에서도 박정환은 북송을 거부하고 사투를 벌이며 1년 4개월이 지나던 즈음 한 월남인 장교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풀려난다. 드디어 1968년 6월 18일 귀국하게 되었고 국내 언론은 당시 국방부가 공식 인정한 월남전 참전 한국군 유일의 포로이자 1호 포로의 귀환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박정환은 포로가 되어 감옥생활을 할 때나 정글을 헤매며 극한 상황에 맞닥드릴 때면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에 비하면 이 정도 고난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야!"라 자위하며 힘을 얻었다고 회고한다. 베트콩 포로가 된 지 502일 만에 풀려난 박정환 소위의 '귀향 스토리'는 지난 2000년 <느시>라는 책으로 출간되어 국내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특히 월남전 참전 군인들에게 센세이셔널한 호응을 얻었다.
 
베트콩 포로가 된 지 502일 만에 풀려난 박정환 소위의 생환기 <느시>1,2. 박정환씨는 당시 국방부 인정 유일의 월남전 한국군 포로였다.
 베트콩 포로가 된 지 502일 만에 풀려난 박정환 소위의 생환기 <느시>1,2. 박정환씨는 당시 국방부 인정 유일의 월남전 한국군 포로였다.
ⓒ 문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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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60년대 말 대한민국은 '영웅'이 살 곳은 아니었다. 당시의 한국은 뇌물과 사기 협잡 등 온갖 부조리가 판을 치고 있었다. 아무리 일을 해도 줄줄이 다섯 동생을 비롯한 대가족을 먹여 살릴 길이 없었다. 특히 대를 이어 국가를 위해 헌신한 가문에 대한 정당한 예우는 고사하고 홀대를 당하는 땅에서 박정환은 한시바삐 벗어나고 싶었다.

결국 박정환은 1971년 수의사 자격으로 도미했다. 처음 뉴욕에서 태권도장을 연 박정환은 크게 돈을 모았으나 재산을 다 날린 후 플로리다로 이주해 다시 태권도장을 열었다. 그는 재기에 성공, 현재까지 태권도장에서 후예들을 가르치고 있다. 큰 아들 준박(Joon Park, 35세)은 목사 겸 심리학자로 메트로폴리탄에서 자선단체에 참여하고 있고, 차남 박훈석(6단)은 탬파에 두 개의 도장을 열어 가업을 잇고 있다.

"일본의 경제침략, 남북공조 했으면"

플로리다 한인사회에서도 박정환의 족적은 꽤나 뚜렷하다. 플로리다 8개 지역 한인회의 연합체인 플로리다한인회연합회장, 탬파 한인회장, 평통위원 등을 지내며 동포사회의 화합과 발전을 위해 현재까지 꾸준하게 봉사하고 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남북화해와 평화통일 정책을 적극 환영하고 지지한다"면서 할아버지가 유언처럼 되뇌었다는 '일본에 대한 경계'를 다시 떠올렸다. 민족정기를 강조하는 문재인 정부가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학비를 면제해 주고 직장까지 알선해 주고 있는 것과, 해외독운동가 후손찾기에 나서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도 크게 고마워 했다.

독립지사 후예답게 최근 일본의 경제제재에 대한 그의 태도는 단호하고 비장하다.

"한일관계가 언제까지 맨날 일본에 끌려가서는 안 되겠죠. 그들은 36년간 압제하고도 아직 우리를 '조센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경제침략에 분연히 맞서서 우리 민족의 저력 보여줘야 합니다. 다시는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특히 그는 "일본의 '침략'에 대해 남북이 힘을 합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북한과의 공조에 힘썼으면 좋겠습니다. 북한이 독도문제를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세요. 언젠가 '일제놈들이 한치의 땅이라도 건드리면 무자비한 징벌을 내릴 것'이라는 경고를 하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짜릿합니까. 우리는 왜 그렇게 단호하고 독하게 못합니까?"
 
애국지사 박희락 할아버지의 묘앞에서 선 박정환씨
 애국지사 박희락 할아버지의 묘앞에서 선 박정환씨
ⓒ 박정환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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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후원을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플로리다 코리아위클리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독립지사 박희락, #탬파 박정환, #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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