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새>를 보러 가는 길, 폭우가 쏟아졌다. 조수석에 앉은 친구가 시선을 창 밖에 둔 채 말했다. "어제 자기가 쓴 글 읽고 울었어. 내가 글을 읽다가 눈물을 흘린 건 처음이야". 

어제 기사로 올라온 글이라면 <엄마는 누가 돌봐주죠?>라는 책의 서평인데, 그게 그리 감동적인 글이었나를 생각하는데 친구가 덧붙였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 생각나서... 어떻게 그렇게 살았는지 모르겠어". 친구는 가슴속 이야기를 쏟아 놓았다.
 
 
 영화 <벌새> 스틸컷

영화 <벌새> 스틸컷 ⓒ 엣나인필름

 
은희이자 은희 엄마였던 사람들
 
친구는 딸이 둘이다. 둘째 아이 출산하는 동안 큰아이를 돌봐주러 시골에서 올라온 친정엄마에게 남편은 자기가 집에 있을 테니 장모님이 병원에 가라고 했단다. 친정엄마는 그래도 남편이 같이 가야지 하며 남편의 등을 떠밀었고 마지못해 따라나선 남편은 둘째가 딸인 걸 알자, 술을 마시러 가버렸다. 태어난 아기를 보러 병원에 온 친정엄마는 이 사실을 알고도 행여 분란이 커질까 봐 아무 소리 못 하고 등 돌리고 눈물을 흘렸다. 친구는 친구대로 엄마가 더 속상할까 봐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남편은 주식과 경마에 월급으로 번 돈을 다 탕진하고 빚더미에 앉았고 친구는 살아야 하니까 전공을 살려 공부방을 열었다. 어린 딸 둘을 시설에 맡길 돈을 아끼느라 안방에 갓난아이를 눕혀놓고 건넛방에서 수업했다. 아이들이 문제를 푸는 시간에 안방으로 건너와 젖을 물리고 우는 아이 소리가 수업을 방해할까 봐 낮에 재울 요량으로 밤이면 밤새 아이와 놀았다. 그렇게 밤낮으로 몸을 움직여 번 돈으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밥을 먹여 25년을 키웠다. 친구가 돈을 벌자 남편은 아예 생활비를 주지 않았다.
 
여기까지 듣다가 나는 친구에게 잠깐 귀를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어리둥절한 친구에게 나는 지금 곧 욕이 나올 것 같으니 제발 좀 막으라 했다. 친구는 자기 대신 시원하게 날려달라 했다. 마음과는 달리 안타깝게도 참신한 육두문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위기는 수시로 닥쳐온다. 아프기도 하고 넘어지고 찢어지는 사고가 나기도 한다. 그때마다 친구는 그 모든 순간을 오롯이 혼자 감당했다. 아이들에게 결손가정이라는 딱지를 주고 싶지 않아 그저 견디고 또 견디며 자신의 삶을 갈아 넣었다. 그 가슴속의 분노가 내 글을 읽고 다시 소환되었다. 이런 기억은 언제라도 끄집어내 털어내고 뽀송해 질 때까지 말리고 풀릴 때까지 풀어야 할 한이다. 그리고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한마디가 날아왔다. "내 인생을 책으로 쓰면 못해도 책 열 권은 나올 거다".
 
울다 웃다 보니 극장에 도착했다. <벌새>, 전 세계 25개 영화제에서 수상한 이 영화는 상당히 묘하다. 1994년을 통과하는 중학교 2학년의 은희(박지후)의 일상을 잔잔히 보여주는데, 그 묘사가 깊다. 깊은 감정선은 여전히 여전한 삶의 단면을 층층이 보여준다. 지극히 개인적인 그러나 그 개인적인 무엇을 넘어서는 힘이 느껴지는 영화.
 
은희보다 조금 앞선 시대를 통과한 나는 영화를 보면서 은희가 되었다가 은희 엄마가 되었다가 했다. 삼대독자 오빠가 있는 나는, 존재하면서도 잘 보이지 않았다. 존재감이 없으니 기대치도 없었고, 그게 그리 힘들거나 슬픈 일은 아니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내 어린 시절과 은희의 모습이 묘하게 겹치면서 애처로움 같은 것이 올라왔다. 또 은희의 애타는 부름을 듣지 못하는 은희 엄마의 김빠진 맥주 같은 모습이 혹시 지금의 내 모습은 아닌지. 내 일에 빠져, 내 생각에 빠져 나를 애타게 부르고 있는 내 아이들의 외침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마음 한켠이 찌르르 떨려왔다.
 
영화는 가정 내 빈번히 일어나는 폭력과 방임, 또 이 속에서도 함께 흐르는 가족애(?) 같은 것을 동시에 보여준다. 평소에는 가부장적이고 은희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아빠(정인기)가 은희의 목에 혹이 생겼다는 장면에서 큰소리로 오열한다든지, 권위적이고 은희에게 폭력을 행사하던 오빠(손상연)가 언니(박수연)의 성수대교 붕괴 후 안도 소식에 울음을 터트린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또 피를 보는 부부싸움 후에 태연히 웃으며 TV를 보는 장면은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거나, 싸우고 때리고 난리를 쳐도 결국, 가족은 가족임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래, 이게 현실의 가정이지 싶지만, 이해는 하는데 공감하기는 싫었다.
  
 영화 <벌새> 스틸컷

영화 <벌새> 스틸컷 ⓒ 엣나인필름

 
 영화 <벌새> 스틸컷

영화 <벌새> 스틸컷 ⓒ 엣나인필름

 
남은 수많은 질문들
 
가족이란 이름으로 덮어버리기에는 개인의 고통이 그리 만만하게 다뤄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건 가족이란 이름으로 참고 참기만 했던 내 친구에 대한, 그리고 어린 시절 가정폭력으로 성인이 되고도 그 상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는 수많은 사람에 대한 모독이 될 테니까. 큰일이 일어났을 때만 돌아보는 건 가족이 아닌 누구라도 가능한 일이다. 혹시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이런 불편함을 유발하려 했을까.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대신 그저 보여주기 방식으로.
 
은희가 다니는 한문학원 선생님인 영지(김새벽)는 명언 제조기다. 그의 입에서는 일상을 관통하는 질문과 언어들이 시냇물처럼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은희와 지숙을 앞에 두고 교우를 설명하는 연지는 칠판에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相識滿天下 知心能機人)이라고 쓰고, "얼굴을 아는 사람 중에 속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묻는다. '사람 좋다'는 말을 듣고 싶은 나는 상대에 따라 상대의 입맛에 맞게 조리된 마음을 보여줬다. 나는 이것이 관계의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이 질문에 갑자기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일어나면서도 기쁜 일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영지의 대사는 대단히 의미심장하지만, '세상은 참 아름답다'라는 말이 '왕자와 공주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처럼 내게는 공허했다.
 
영화는 잔잔한 미소와 거친 분노와 황당함, 억울함, 소소한 행복, 상실, 우정과 같은 다양한 결을 보여주며 많은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내 삶을 건드리고 추억을 소환하고 시대를 돌아보게 만든다. 영화가 끝나고 친구와 나는 영화에 관한 얘기들을 나눴다. 은희 외삼촌과 은희 엄마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은희와 엑스를 맺은 후배는 왜 갑자기 변심했을까? 등등 장면에 등장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유추했다.
 
돌아오는 길에도 비는 계속 쏟아졌다. 조수석에 앉아 창 밖을 무심히 보던 친구는 은희의 대사를 나지막이 되뇌었다. "내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 나는 "당연하지" 라고 말하려다 어쩐지 말을 삼켰다. "빛이 안 나면 어때? 그냥 살면 되지" 라는 말도 삼켰다. 둘 다 세상은 참 아름답다는 말처럼 공허했다. 친구의 지난한 삶이 일 초에 최대 90번의 날갯짓을 해야 날 수 있다는 그 '벌새' 같았다. 허기진 몸과 마음을 채우러 쏟아지는 비를 뚫고 우리는 밥을 먹으러 갔다. 보글보글 끓어 넘치는 추어탕 뚝배기에 밥을 말며 나는 속으로 말했다.
 
"내가 그렇게 볼게. 네 삶이 빛이 나든 안 나든, 눈이 부시게 내가 너를 그렇게 볼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눈이 부시게 참신한 육두문자 공모 참 좋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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