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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입사한 이후로 한 직장에서만 근무했습니다. 유리천장을 깨부술 성별·학벌·인맥은 없지만, 그곳에서 끈질기게 출근하고 일하며 살아가는 40대 여성 직장인의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직장운이라는 것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사업에도 운이 따라야 하지만 직장 일에도 운이 따라야 한다. 보통 직장운이라고 생각하면 입사운이나 승진운을 말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직장운은 '사람'이다. 흔히 말하는 인복(人福)이 있어야 직장을 오래 다닐 수 있느냐 아니냐로 결정될 수 있다고 본다.

직급이 낮을 때는 상사를 잘 만나는 것이 좋고, 직급이 올라가면 부하직원을 잘 만나야 직장생활이 편안하다. 누군가는 사내정치를 잘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도 결국은 사람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18년간 한 직장을 다니는 데에는 운이 많이 따랐다. 내가 직장운이 좋다고 생각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일의 특성상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하면서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났고, 두 번째는 사람에게서 배우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인복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성격 좋은 사람을 만났다는 것 이상이다. 배울 만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근무하는 곳의 이동이 잦았다. 프로젝트의 특성상 고객이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했으므로 근무지 이동이 달랐던 것이다. 굳이 회사를 옮겨 다닐 필요가 없었다. 어느 날은 부천에서 근무하다가 구로, 사당, 또는 해외로 이동하는 식이었다.

프로젝트를 따라 여러 곳을 다닐 때 가장 좋은 것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좋은 사람, 좋은 상사를 많이 만났다. 반대로 나와 맞지 않는 사람도 만났다. 그런 경우는 조금만 참으면 됐다. 몇 달 후 프로젝트가 끝나면 헤어질 것이라는 가정은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와 언쟁을 피하게 해줬다. 신기하게도 일로 인해 언쟁을 심하게 한 사람도 프로젝트 종료 후 일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면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일로 인해 언쟁은 했을지언정 사람이 미운 것은 아니었으니까.

사람에게서 배운다
 
 회사에 대한 불만은 많았지만 결국 나를 지금까지 계속 다니게 붙잡아둔 건 사람이었다.
 회사에 대한 불만은 많았지만 결국 나를 지금까지 계속 다니게 붙잡아둔 건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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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산 비전공자였다. 그런 내가 IT 회사에 취직을 했으니 배울 것이 얼마나 많았겠나. 회사에서 프로그래밍 교육해주고 인재육성을 하긴 했으나, 막상 프로젝트 현장에 투입되면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경우가 많았다. 프로그래밍에서 중요한 것은 수학적 사고였다. 분명 이렇게 하면 성공하리라 예상한 코딩은 에러를 불러오기 일쑤였다. 자괴감이 들고, 적성에 맞지 않으니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수없이 생각했다.

한 번은 통계 프로그램을 만들 때의 일이었다. 통계 프로그램은 오류보다는 성능이 중요했다. 많은 데이터를 처리해서 결괏값을 추출해야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결괏값을 추출하는데 3~4시간이 걸렸다. 기대 시간은 30분이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각 분야의 담당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 다른 파트의 A 부장님께 한 번 도움을 요청해 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A 부장님은 협력업체 직원이었다. 보통 일이 바쁘니 남의 파트 일은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문화였다. 그래도 해결방법을 찾을 수 없어 A 부장님께 부탁을 했더니 흔쾌히 도와주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상황과 내용을 듣더니, 어떤 업무에 관련된 통계냐는 물음이 이어졌다. 업무 설명을 먼저 해달라고 했다. 통계 성능을 높이고 많은 양의 데이터를 처리하는 일인데 업무 설명이 무슨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해달라고 하니 최대한 자세히 전했다. A 부장님은 하루 정도 생각해 보고 알려주겠다고 했다. 다음 날, A 부장님은 해결한 것 같으니 테스트를 해 보자고 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3~4시간 걸리던 프로그램은 30분 만에 결과를 출력해냈다.

나중에 비교해 보니 소스코드의 양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A4용지로 2장이 넘었던 소스코드의 양은 1장 정도로 줄어 있었다. A 부장님의 해결 포인트는 업무였다. 업무의 특성을 이해하고, 데이터 추출의 범위를 줄인 것이었다. 그렇다고 누락도 없었다. 마치 생선회를 뜨는데 고수가 잔뼈마저 다 제거하고 딱 살만 발라낸 느낌이라고나 할까. A 부장님께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는데 자괴감이 들었다. 며칠 동안 헤매던 일을 단 하루만에 해결하다니.

나중에 A 부장님께 감사의 인사로 술을 한잔 사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제가 해결돼 정말 감사한데, 한편으로는 나는 왜 못했을까를 생각하니 자괴감이 들더라고요."

"이 과장님, 문제 해결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어요. 과장님은 코딩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고객응대도 해야 하고, 보고서도 써야 하고, 개발자들 진척관리도 해야 하고요. 저는 24시간 내내 그 문제만 생각했어요. 그래서 집중할 수가 있었던 거고요. 제가 그 일을 해결하는 동안 집중하도록 환경을 만들어주셨잖아요.

또 하나, 과장님이 잘하는 일은 문제해결에 적극적이라는 거예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해결할 만한 사람을 찾아서 부탁할 줄 아는 것도 관리자의 중요한 능력이에요. 저는 관리는 못해요. 관리를 못해서 지금까지 프로그래밍만 하고 있잖아요. 각자 타고난 능력과 경험치가 다르고, 그걸 이용하는 게 회사라고 생각해요.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문제해결에는 과장님의 공도 커요."


그분의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기술적인 면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인사이트를 배울 수 있었다. 회사에 대한 불만은 많았지만 결국 나를 지금까지 계속 다니게 붙잡아둔 건 사람이었다. 물론 안 맞는 사람도 많았다. 자신에게 일이 떨어지면 무조건 남에게 떠넘기는 유형도 있었고, '까라면 까야지'라는 권위주의적인 상사도 만나봤다. 모든 성과를 자신만 챙기는 사람도 만나봤다.

그런 인간 유형이 곁에 있으면 괴롭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프로젝트가 끝나면 헤어지게 되니 조금만 참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다른 이에게 일을 떠넘기는 유형도, 권위주의적인 상사의 유형도, 결국 회사의 이익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만나면 협력하게 돼 있었다. 협력을 하다 보면 누구에게나 배울 점은 하나씩은 있었다. 하다못해 '난 나중에 저렇게 행동하지 말아야지'라도 배울 수 있었다.

사람이 비전이다
 
 나도 누군가의 인복이길 바란다. 그것이 앞으로 내 직장 생활의 비전이다.
 나도 누군가의 인복이길 바란다. 그것이 앞으로 내 직장 생활의 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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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성취와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이 이십 년 가까이 회사에 머물게 했다. 비전은 회사의 교육이나 회사 소개서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주위 사람들에게서 가장 많은 비전을 본다. 사장이나 임원보다 바로 곁에서 일하는 동료나 선배에게서 배울 점을 보고 성장과 비전을 느끼는 것이다. 글을 쓰는 지금도 A 부장님 이외에 나의 첫 사수와 주위의 훌륭한 동료들이 연이어 떠오른다. 그들이 있었기에 프로젝트도 성공할 수 있었고, 서로 성장할 수 있었다.

가끔 생각한다.

'나는 후배들에게 배울 만한 사람인가?'

내가 누군가에게 배우며 성장했듯이, 후배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일까 가끔 생각한다. 프로젝트에서 나와 같이 일하게 된 것을 알게 된 후배가 "그 선배 참 좋아, 배울 점도 많고"라는 말을 하게 된다면 좋겠다. 나도 누군가의 인복이길 바란다. 그것이 앞으로 내 직장 생활의 비전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혜선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longmami) 및 브런치(https://brunch.co.kr/@longmami)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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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