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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집 밖은 많은 어린이들에게 탐험의 장소였다. 학교나 집을 제외하고 마땅히 갈 곳이 없는 아이들에게 놀이터나 건물의 옥상, 사람들이 잘 모르는 지름길 등은 열광의 장소였다. 이런 장소 중에 특히 아이들에게 관심 끌기 좋은 곳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지하실이다.

지하라서 다른 곳과 달리 빛이 들지 않고, 특유의 이상한 냄새가 어린이들의 후각을 자극하며, 지상과 달리 사람들이 별로 없어 돌아다녀도 들키지 않으니 지하실은 어린이들이 호기심을 갖기에 완벽한 곳이었다. 안타깝게도 나이가 들면서 지하에 대한 관심은 점점 사라졌다. 지상에서 고개 한번 돌릴 짬도 나지 않게 되니 지하에 숨겨진 것들에 대한 로망은 색이 바랄 수밖에 없었다.

지상의 사람들은 항상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고 있기에, 지하에 자리하고 있는 것들은 침묵하면서 누군가 도래할 날만 기다린다. 다른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고, 지상과는 다른 빛이 없는 곳. 태곳적부터 지하의 그 매력에 많은 사람들이 매료되어 왔다.
 
언더그라운드
 언더그라운드
ⓒ 윌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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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는 제목 그대로 지하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은 동굴이 가득한 고요한 지하, 오랜 세월 전에 지어진 파리의 복잡하고 개미굴 같은 지하, 과거 문명의 흔적이 남은 아메리카의 지하까지 다양한 지하를 여행하고 사진과 함께 정리한 책이다.

저자 윌 헌트는 미국인으로, 뉴욕과 파리 등 대도시에서 지하를 기반으로 하는 글을 써온 작가다. 그는 자신의 어렸을 적 고향인 미국 프로비던스에서 집 근처 터널 탐험에 성공한 이후 그 일에 영감을 받아 자라서도 지하 탐험에 나서게 되었다고 한다. 터널 안에서 손전등을 끄고 얼마나 침착할 수 있나 시험해 보기도 하고, 종유석이 떨어뜨리는 물방울을 바라보기도 했다.

저자는 이후 프로비던스를 떠나 대학에 진학했고, 터널에 대해 잊고 살았다. 하지만 뉴욕시의 지하를 마주하고 자신이 어렸을 적 보았던 터널의 기억을 되살리게 된다. 터널에 대한 기억은 저자에게 큰 변화를 주었고, 저자는 스스로에 대한 사고방식과 세상의 구조물을 대하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땅 아래 세상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적막과 메아리 때문이었다고 한다. 터널이나 동굴에 들어가는 것으로 탈출하는 듯한 감각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상 위의 삶은 마음대로 굴러가지 않지만, 어둠 속으로 내려가면 어떤 돌파구가 찾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동화책 속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동화책 속 주인공들이 어떤 관문을 통과하여 숨겨진 세상으로 들어갈 때의 느낌이 마치 꼭 이러할 것만 같았다. 인류의 영원한 근원적 두려움과 맞서듯, 땅 아래 세상이 제공하는 톰 소여식 철부지 모험이 좋았다. 나는 시가지 아래에서 발견된 유물이나 동굴 깊숙한 곳에서 치러진 의식 등 땅 아래 세상에 관해 얘기하기를 즐겼고, 그럴 때 내 친구들의 경탄하는 듯한 눈초리에 흡족해했다. -24P

이렇게 성장 과정에서 형성된 낭만적인 동기와 마음의 근원에 내재한 악착같은 열정을 바탕으로, 그는 세계 각국의 지하를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이 책을 썼다.

책에 따르면, 빛이 미치는 끝 너머에 있는 동굴의 여러 장소는 우리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내린 두려움의 '납골당'같은 곳이다. 좁은 공간에 갇혔다는 생각이 들면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렵기 마련이다. 구불구불하고 불투명한, 빛도 자리하지 않는 곳에 있으면 감정이 요동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지하를 향해 내려간다.

저자는 그 이유를 인류가 저 아래 펼쳐진 세상을 몸으로 느끼고, 인간의 상상력으로 측량할 수 없는 방으로 통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볼 수 없는 것을 찾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저자는 지하를 소중히 여기는 대도시의 아마추어 지하 탐험대를 만나기도 하고, 과거 자신들이 지하에 가졌던 신앙을 소중히 지키는 원주민들에게 예를 갖추기도 한다. 이 책의 7장은 뉴욕 지하에 자신의 일기를 기록하는 그래피티 예술가를 찾는 내용인데 도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면이 있어 인상적이다.

물론 이 와중에 많은 난관이 있었다. 저자는 프랑스 파리의 지하에 내려갔다가 처음부터 입구 위치를 착각하는 바람에 길을 잃은 적도 있었고, 지하 운하에서 물에 젖은 통행권, 잘린 카드, 커피 필터, 주사기나 갖은 쓰레기가 흘러가는 것을 보며 악취를 참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저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저 너머를 보기 위해 내려갔다. 저자는 지하로 내려는 행위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우리가 아는 범위 밖에도 존재하며, 우리가 모르는 곳으로 깊게 내달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고 한다.
 
 나는 현실이 단단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보고 딛고 만지는 구체화된 지표면은 많은 단층의 일부일 뿐이며 그 외 나머지는 모두 베일에 싸여 있다. (중략) 지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작은 틈새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해주었고, 그림자가 있는 평화 속에 앉아 경험과 비전 사이에 가로 놓인 여러 유형의 생각을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가르쳤다. -342~343P
 
어린 시절에 흥미로운 경험을 하고 꿈을 꾸더라도 나이가 들면 잊기 마련이다. 나의 시야를 가리는 것이 너무 많고 생각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자기가 어렸을 적 경험했던 동굴의 신비함을 잊지 않고 세상의 지하에 존재하는 고요함과 암흑을 찾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

저자는 지하의 어둠 속에서 희미한 선율을 듣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삶의 궤적 속에서 조용하게 있을 수 있을 때가 얼마나 있을까. 어두운 빈 공간에서 자신이 바라던 바를 찾은 저자는 밝은 시야를 가진 사람이다.

언더그라운드 - 예술과 과학, 역사와 인류학을 넘나드는 매혹적인 땅속 안내서

윌 헌트 (지은이), 이경남 (옮긴이), 생각의힘(2019)


태그:#발굴, #탐험, #지하, #관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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