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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오십이던 9년 전 가을. 욕실에서 낙상한 아버지가 수술 후, 중환자실에 옮겨졌다. 가족들이 번갈아가며 병원을 드나들었다. 잠깐 나를 알아보던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 딸이 점점 이뻐지네. 이제 시집 가두 되갔구나야~."

나는 그 말에 애매하게 웃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혈혈단신 월남했다. 감정이 상기될 때 나오는 아버지 평안도사투리에 콧등이 시큰했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 아버지는 중기 정도의 아츠하이머를 앓고 있었다.

<주름>은 스페인 작가 파코 로카의 글과 그림으로 된 만화이다. 색감 자체가 잘 다져진 편안함을 주지만 전개되는 이야기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 편치 않음으로 다가온다.
  
   책<주름> 표지
  책<주름> 표지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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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태어난 사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늙음. 그 노화의 과정에서 <주름>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기억을 잃어가는 치매 환자들의 인생 의미를 묵직하게 묻는다. 전직 은행지점장이었지만, 알츠하이머치매에 걸린 에밀리오가 아들며느리에 의해 요양원에 들어가게 된다. 아들부부가 입원수속을 받는 동안 에밀리오의 마음은 어린 시절, 전학 간 낯선 교실에서 '엄마랑 집에 가고 싶은' 속마음과 겹친다.  

에밀리오는 평생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없고, 개 한 마리 키워 본 적 없는 독신 미겔과 같은 방을 쓴다. 미겔은 요양원에서 치매에 걸려 정신없는 노인들의 '약점'을 이용해 돈을 모은다. 솔레 부인은 멀쩡한 자기가 요양원에 있으니 아이들한테 데려가라고 전화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돌아다닌다.

미겔은 그런 솔레 부인한테 면회실에 가면 전화를 할 수 있다면서 요금을 받는다. 창가에 앉으면 이스탄불에 가고 있는 줄 아는 로사리아 부인한테도 검표원이라면서 돈을 챙긴다. 미겔의 말을 통해 요양원의 생활이 실감나게 펼쳐진다.

"요양원에서는 할 일이 정말 없어. 아침 9시에 밥 먹고, 1시에 점심, 저녁 7시에 또 밥 먹고, 여기서는 약이랑 밥 먹는 것밖에 중요한 일이 없어. 여긴 바깥 세상이랑 반대지. 밥 안 먹는 시간은 쓸모없는 시간이지. 자거나 티비 앞에서 졸면서 다음 식사 시간이나 기다리잖아."
  
    책 66쪽. 돌로레스부인이 남편 모데스토에게 귓속말을 하는데 반응이 없던 모데스토가 웃는다.
  책 66쪽. 돌로레스부인이 남편 모데스토에게 귓속말을 하는데 반응이 없던 모데스토가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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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날의 돌로레스와 모데스토
  젊은날의 돌로레스와 모데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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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요양원에도 부부간의 깊고 그윽한 사랑이 있다. 알츠하이머인 남편 모데스토를 돌보기 위해 같이 요양원에 들어온 돌로레스 부인, 그들은 60년 전에 만난 이후로 한시도 떨어져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모데스토가 자기 아내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부인이 남편에게'사기꾼'이라는 귓속말을 할 때, 모데스토가 웃는 장면은 사뭇 뭉클하다. '사기꾼'은 젊은 시절 모데스토가 여자친구인 돌로레스에게 구름을 떠다준 강렬한 추억의 상징이다.

서서히 진행되는 노인성치매와 달리 친정아버지의 알츠하이머치매는 진행속도가 무척 빨랐다. 마치 '창가에 앉으면 로사리아부인처럼 이스탄불에 가고 있는 줄 아는' 것처럼, 아버지는 아들 차 조수석에 앉아 가다가 내릴 때는 차비를 내려고 했다.

어떤 날은 당신이 30대 청년이 되어 엄마를 신혼초의 새댁으로 착각해서 가족들이 당황했던 적이 있다. 약으로 잠시 진정이 됐지만, 아버지의 기억력은 희미하게 바래지다가 결국은 <주름>에 나오는 백지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아버지는 한 달 정도 무의식상태에 있다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떨어져 사는 큰딸 얼굴을 본 다음 영면하셨다. 엄마는 화장터에서 아직 온기가 남은 아버지의 유골함에 당신의 뺨을 부비며 서럽게 흐느꼈다.

"여보, 그동안 많이 외로우셨죠. 하늘나라에서 보고 싶었던 부모님도 만나 뵙고, 우리도 곧 만나요~. 여보, 잘 가세요..."

아버지는 노는 공터에 상추나 옥수수, 고구마, 땅콩 등을 심어 자식들과 이웃에게 나누며 지내다가, 아들 직장을 따라 고층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농작물을 심고 거두며 소일하던 아버지는 당신의 몸이 바닥이 아닌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똑같은 아파트와 달리는 차들, 간혹 아파트 밖으로 나올 때면 아버지는 하늘 꼭대기에 닿는 높은 집과 빠른 속도, 그 사이에서 종종 길을 잃었다.

노인이라는 굴레를 벗고 지붕이 없는 컨버터블 차를 구해 요양원을 벗어나는 미겔의 계획과 실천은 그동안의 미겔과는 다른 면을 보인다. 요양원 2층은 치매나 알츠하이머치매, 정신분열증 등으로 상태가 심각해, 정신줄을 놓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모데스토를 따라 남편을 돌보던 부인도 같이 가자 미겔은 '그건 자살행위'라고 말한다. 그러자 안토니아 부인이 '댁은 누구를 사랑해본 적이 없어서 이해를 못하는 거'라고 말한다. 미겔 옆에서 언제나 밥을 같이 먹었던 에밀리오의 빈 의자는 미겔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다.

그도 사랑이 뭔지 깨닫는 걸까. 전화기를 찾아 헤매는 솔레 부인에게 자기 전화기를 빌려주고, 요양원에서 몰래 개를 기르는 마르티노에게 길이 조절이 가능한 애견자동줄을 건넨다. 미겔이 건넨 애견자동줄 때문에 마르티노의 애완견은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에밀리오는 자기에게 밥을 떠먹여주는 미겔을 희미하게 기억하다가 끝내 얼굴이 지워진다. 책 98~99쪽은 완전 백지다. 저자 파코 로카의 메시지가 분명하게 느껴지는 파격적인 장면이다.

<주름>은 두 편의 내용이 들어 있는 표제작으로 전체 페이지가 100쪽 분량이다. 만화 속의 인물들은 마치 내 이웃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친근하다. <주름>은 그러나 단순하게 재미로 보는 만화가 아니다. 숨은 그림처럼 매우 세심하게 표현한 복선은 마치 영화나 소설을 보고 읽은 것 같은 여운이 길게 남는다.

<주름>은 우리 모두가 노인이 된다는 걸 환기시킨다. 또 노인이기 이전에 어린아이였음을 상기시킨다. 지금 내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에밀리오, 솔레부인, 로사리아부인, 모데스토, 돌로레스 부인 그리고 우리 아버지 같은 여러 치매 환자와 보호자들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주름

파코 로카 지음, 김현주 옮김, 중앙books(중앙북스)(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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