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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입사한 이후로 한 직장에서만 근무했습니다. 유리천장을 깨부술 성별·학벌·인맥은 없지만, 그곳에서 끈질기게 출근하고 일하며 살아가는 40대 여성 직장인의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여자의 직장생활은 왜 남자들과 다를까? 평등한 것 같지만, 평등하지 않은 조건들 속에서 여자 직장인들은 치열하다.
 여자의 직장생활은 왜 남자들과 다를까? 평등한 것 같지만, 평등하지 않은 조건들 속에서 여자 직장인들은 치열하다.
ⓒ ?ⓒ anniespratt,출처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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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박 3일간 교육을 다녀왔다. 직급별로 가는 교육이라, 어쩌면 이번이 회사에서 받는 마지막 직급별 교육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나의 직급은 회사에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직급이다. 이후의 승진은 팀장인데, 바라지도 않거니와 될 가능성이 희박하니 마지막 교육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최대한 직장생활을 오래하고 싶지만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니까.

대리 직급 이하의 교육 과정은 주로 과제와 실습 위주의 교육이었다. 알차게 배운 내용도 많았고, 현장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팁들도 많았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배워야 했으므로 교육 과정은 힘들었다. 새벽까지 과제하는 일이 태반이었다.

오랜만에 받는 교육은 풍경도, 내용도 많이 바뀌었다. 중간 관리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니만큼 사회 트렌드에 대한 변화와 부하직원 및 후배에게 어떤 비전을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했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새벽까지 무리하게 과제를 하는 일도 없어졌다.

개인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여직원의 비율이 확 줄었다는 것이다. 보통 한 반에 4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여직원은 달랑 2명이었다. 강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도 주로 남자들이었다. 대리 때까지만 해도 여자가 한 반에 10명 이상은 되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교육장에서 동료 직장맘을 만났다. 나와 동갑이었고, 아이들의 나이대도 비슷했다.

"여자들이 너무 없다."
"어려운 고비를 넘기 힘들긴 하지."
"우리가 독한가?"
"혹은 운이 좋거나?"


우리는 마주보며 웃었다. ​우리가 말한 '그 운'이라는 것에는 직장 운과 더불어 아이들 양육에 대한 운도 있을 것이다. 남자들보다 한 가지 조건이 더 따라줘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여자들의 직장 생활이니까.

그녀의 경우 남편이 재택근무를 했다. 덕분에 지금까지 직장 생활 유지가 가능했다. 이날 교육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직급이 올라갈수록 여직원의 비율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고 했다. 사실, 그녀도 나도 이렇게까지 오래 다닐 줄 몰랐다.

회사의 비전은 나의 비전과 일치해야 하는가?
  
'당신은 어떻게 성장하고 싶습니까?'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얻어지지 않았다.
 "당신은 어떻게 성장하고 싶습니까?"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얻어지지 않았다.
ⓒ ?ⓒ Olichel,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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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교육원은 아름다웠다. 조경도 예쁘고, 밥도 맛있었다. 가장 좋은 것은 2박 3일간 바쁜 직장맘의 삶을 내려놓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점이었다.

누군가 해주는 밥을 먹고, 온전히 내 생각만 할 수 있다는 것이 교육의 큰 장점이었다. 교육을 받으며 나의 직장생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강사진도 화려했고, 다른 회사 직원들과 토론수업과 경험을 나누는 시간도 좋았다. 교육을 받으면서 한 가지 질문이 나에게 묵직하게 다가왔다.

'당신은 어떻게 성장하고 싶습니까?'

비전에 대한 질문이었다. 회사에서 성장하고 싶어서 안달 나던 때가 있었다. 내가 제일 잘 나가는 줄 착각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일에 대한 프라이드와 자존감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퇴사의 위기를 몇 차례 넘기면서 나는 회사에서 인정하는 인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았다.

소위 말하는 일류대 출신도 아니었고, 여자였고, 상사의 비위를 잘 맞추거나 고분고분한 성격도 아니었다. 아이 둘. 출산과 육아휴직을 반복하며 40대가 되어가면서 나의 프라이드와 자존감은 무너졌다. 그러면서 회사의 비전과 나의 비전이 서서히 분리되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40대 중반의 여성이, 그것도 남자들이 대부분인 회사에서 버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에 겨웠으니까.

교육을 받으면서 우리 반에서 나를 제외한 유일한 여성인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 역시도 엄마가 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고 일을 놓기엔 아까워서 여기까지 버티면서 왔노라고 했다.

아이는 나처럼 시어머니가 돌봐주고 있었다. 우리는 아침마다 '우리 밥만 먹으면 된다니! 얼른 먹으라고 재촉을 하지 않아도 된다니!' 감탄하면서 밥을 먹곤 했다. 그만큼 우리에겐 성장과 비전이라는 단어보다 매일 아이들도 챙기면서 일을 하는 균형이 중요했던 사람들이었다.

물론, 요즘은 남자들도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대다. 2박3일간의 교육이었지만 숙박을 하지 않고 저녁에 아이를 돌보러 가는 남자 직원도 있었다. 와이프가 야근이라 아이를 돌보러 간다고 했다. 이런 예외적인 경우를 빼면 아무리 남자가 적극적으로 육아에 참여한다고 해도 결국 1차 책임자는 여자이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은 큰 차이다. 당장 급한 일이 있거나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이상 여자의 성장과 비전은 미룰 수밖에 없다는 말과 같다. 같은 조건에서 가장 먼저 양보해야 하는 건 대부분 여자니까.

남자들의 집중력은 회사와 일에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회사에서 어떤 가치 창출을 할 것인가, 어떤 전문가가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직장생활이 떠올랐다. 적어도 월급도둑이 되지 않으려고 애쓰던 시간들. 나는 어떻게 하면 회사에 폐를 끼치지 않고 오래 버틸까를 생각했다. '~되고 싶다'와 '버티다'는 어감이 다르다. 그러니까, 나는 버티는 쪽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내가 일에 대한 열정이 없거나 일을 대충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버티는 이유는 일을 좋아하고 계속 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물론 여전히 직장생활에 대해 투덜대고, 월요일의 출근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직장이 아니더라도 일은 할 수 있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1인 기업으로 나서야 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자신의 적성과 가장 잘 맞는 길이 직장일 수도 있지 않은가. 교육이 끝나고 나서도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얻어지지 않았다.

회사의 비전을 위해 일하지만, 나의 비전도 필요해
  
개인의 비전이 있다면 회사생활도 즐거워질 수 있다. 회사는 다음 스텝을 위한 준비일 수도 있으니까.
 개인의 비전이 있다면 회사생활도 즐거워질 수 있다. 회사는 다음 스텝을 위한 준비일 수도 있으니까.
ⓒ ?ⓒesteejanssens,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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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받은 지 몇 달이 지나서야 내가 얻은 결론은 회사의 비전을 위해 일하지만, 내 개인의 비전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성장하고 싶습니까?'라고 질문을 한 것이다. 회사와 나의 비전이 일치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꼭 회사와 개인의 비전이 일치할 필요는 없다. 월급을 받고 일하므로 회사의 비전도 고민해야 한다. 회사가 잘 되어야 나도 일을 계속 할 수 있으니까. 다만, 위험한 것은 회사의 비전만 알고 자신의 비전은 모르는 직장인의 삶이 아닐까.

중년의 직장인들이 힘들어하는 이유는 열심히 달려왔지만 자신의 열정을 인정받지 못하고, 어디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비전을 위해 일했는데, 왜 나를 몰라주느냐고 항변한들 돌아오는 건 차가운 시선이다. 나를 인정해줄 다른 회사를 찾아보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40대는 조직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임원으로 진출하는 일부 소수를 제외하면, 회사는 젊은 사람만 원할 뿐, 나이든 중년을 환영하지 않는다. 언젠가 지인이 헤드헌터에게 판교의 IT회사를 원한다고 했더니 그쪽은 30대가 들어가는 곳이라고 했단다. 중년이라고 해서 열정이 없거나 일을 못하는 것도 아닌데, 이미 나이로 지원조차 되지 않는 곳이 많다. 그렇다고 주저앉거나 남 탓을 할 수는 없다. 우리에겐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으니까.

나는 비전을 내 삶의 내부에서 찾았다. 내가 '버티기'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회사의 비전과 나의 비전의 괴리감에서 나오는 죄책감 같은 것이었다. 이제는 죄책감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회사의 비전과 나의 비전이 일치하지는 많지만, 회사생활은 분명히 나에게 의미가 있었다. 한 예로, 나는 지금 회사 생활을 바탕으로 한 글을 쓰고 있고, 회사 생활이 글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 아마, 누군가에게는 재테크를 하는 현금흐름의 역할이 될 수도 있고, 창업을 위해 노하우를 배우는 곳이 될 수도 있다.

개인의 비전은 회사생활도 즐겁게 한다. 하루 24시간 중 출퇴근시간을 포함하면 10시간 이상을 보내는 곳이다. 이 시간이 즐겁지 않다면 내 삶도 즐겁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즐겁게 해줄 나의 비전을 찾는 것이 중년의 직장인이 가져야 할 숙제 아닐까? 현재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고, 그것을 실행하며 성장한다면 오늘의 출근길도 즐거워질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혜선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longmami) 및 브런치(https://brunch.co.kr/@longmami)에도 실립니다.


태그:#워킹맘, #직장맘, #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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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하면서 프리랜서로 글쓰는 작가. 하루를 이틀처럼 살아가는 이야기를 합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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