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72년 2월 21일, 북경을 방문해 모택동 주석과 회담하는 닉슨 대통령
▲ 역사적인 닉슨 대통령과 모택동 주석의 만남 1972년 2월 21일, 북경을 방문해 모택동 주석과 회담하는 닉슨 대통령
ⓒ Public Domain

관련사진보기

 베트남 전쟁의 종결을 내걸고 당선된 닉슨 대통령의 등장으로 국제질서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역대 정부와 비교해봤을 때, 닉슨 행정부의 대외정책 상의 변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전후 미국 대외정책의 기본노선이었던 봉쇄정책에 입각한 국제주의를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이후 미국 외교무대에서 종적을 감춘 현실주의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이로부터 등장한 게 바로 키신저의 3각 외교 구상이다.

3각 외교와 같은 발상이 닉슨 행정부 때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여기서 1953년 애치슨 국무장관이 애치슨라인 선언에서 대만을 제외한 의미를 복기할 필요가 있다. 애치슨 국무장관이 대만을 애치슨라인에서 제외했던 이유는 중국 내에서 발생한 중국 공산당정권 등장이라는 정치변화를 고려해서 이에 대해 발 빠르게 대처할 필요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는 여건만 허락한다면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제2의 문호개방을 달성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로 애치슨의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애치슨선언과 키신저의 3각 외교는 정치적, 이론적 배경 측면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애치슨이 대만을 제외했던 이유는 단순히 장개석 국민당 정권의 힘이 약해져서가 아니라 대만정권이 부패하고 민주적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에 미국이 더 이상 방어할 의무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국제주의 문법에 입각한 결정이었다. 이에 반해, 키신저의 3각 외교는 1960년대 군사충돌까지 불사하며 악화일로를 걷던 중소갈등을 배경으로 했다.

새로운 정세변화에 대한 키신저의 생각은 미소 두 나라가 압도적인 군사력 우위에 기초한 전후 냉전 질서를 기반으로 형성된 양극체제를 더 이상 지속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핵무기를 보유한 중국의 등장으로 다극체제로의 전환은 불가피해졌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된 국제정세 속에서 미국의 전략적 입지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가 주된 문제의식이었다. 요컨대, 닉슨과 키신저는 미중관계 개선을 지렛대로 미국에 유리한 국제적 세력균형 구도를 만들고자 했다(마상윤·박원곤, 2010:76)..

키신저의 3각 외교는 과거 비스마르크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대했던 방식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비스마르크는 유럽에서 독일의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오스트리아와 군사동맹을 맺고,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의 안전보장을 독일이 약속해주는 방식으로 러시아와 소위 '재보장 조약'에 서명했다. 비스마르크판 3각 외교 구상이 갖는 의미는 독일이 군사외교적으로 지원하지 않은 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사이의 전쟁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며, 이 상태가 지속될 수 있다면, 독일의 전략적 우위와 더불어 유럽의 평화 역시 달성될 수 있다는 고도의 외교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키신저의 3각 외교 구상 역시 이와 마찬가지였다. 미국이 중국과 소련 사이의 분쟁을 활용하여 양국과의 관계를 회복함은 물론, 협력관계를 동시에 구축함으로써 두 나라보다 전략적 우위에 설 수 있다는 현실주의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럴 경우, 미국은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세력균형을 구축하는 문제에 있어 양국보다 항상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으며, 천문학적 군비를 소모하지 않고서도 외교를 통해 전략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것이 1970년대 들어 미국이 소련과의 긴장완화(Detente) 시도와 함께 중국과의 관계개선에 적극 나서게 된 배경이다. '핑퐁외교'로 상징되는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 시도는 대단한 외교적 성공을 거뒀다. 존 헤이의 '문호개방선언'이래 2차 대전 전까지 동아시아에서 구축했던 전략적 입지를 거의 회복했다. 이는 곧 중국 우선의 동아시아 정책을 재천명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닉슨 행정부의 중국 우선정책으로의 복귀는 냉전을 주도했던 봉쇄 형 국제주의 노선과는 상당한 차별성이 있었다. 중국 공산주의 체제를 공식 인정하고 대만과는 단교를 선언했다. 중국과의 국교수립에 이은 관계정상화는 미국이 전후 냉전시대를 통해 표방해온 가치 중심 외교와는 양립하기 어려웠다. 닉슨행정부의 중국과의 관계개선은 한마디로 현실주의 관점에서 시도된 것으로 동아시아에서의 세력균형이 목표였다.

패닉 상태에 빠진 박정희 정권

'괌 선언'으로 알려진 '닉슨독트린'이 한반도 정책전환의 신호탄이었다. 이데올로기 대립에 기반 해서 유지돼온 전후 동아시아 질서에 닉슨독트린이 던진 충격은 가히 메가톤 급이었다. 특히, 한반도는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보다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한의 재정과 안보가 미국원조와 주한미군의 존재에 전적으로 의존해왔기 때문이다.

닉슨독트린은 안보정책의 중대한 변화를 예고했다. 그 핵심은 자국 안보는 자국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다른 나라의 운명에 미국이 개입할 의사가 없음을 선언했다. 한반도 공약과 관련하여 닉슨독트린이 갖는 함의는 미국이 한반도문제에 군사적으로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따라서 주한미군 철수가 일정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의 일로 여겨졌다.

닉슨독트린은 미국의 악화된 경제상황과 대통령, 의회 선거결과 등 워싱턴 정치의 향배에 따라 한미동맹의 해체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닉슨행정부의 초기 행동은 주한미군철수에 이어 한미동맹 해체까지 염두에 둔 게 사실이었다. 다급해진 박정희 정권은 패닉상태에 빠졌다. 박정희 정권은 닉슨독트린과 데탕트 시대의 도래 등 대외적 환경변화를 국내적 정치억압의 수준을 극대화하는 계기로 활용했다. 이 시기에 삼선개헌이 시도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는 곧 10월 유신이라는 괴물을 낳았다.

박정희 정권은 국가안보와 정권안보를 동일시했다. 국가안위를 핑계로 박정희 정권은 안보위기론을 설파했다. 일방적으로 통보된 주한미군 철수와 때마침 터져준 월남패망이 안보위기론에 기름을 부었다. 박정희는 미군철수와 한미동맹해체라는 정권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해 핵무장화와 남한의 군비를 단시일 내에 급격히 끌어올리는 '군 현대화계획'을 통해서 정권의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무리한 군사력 증강 시도로부터 일종의 부가세인 방위세 도입으로 국민들의 세 부담은 대폭 늘어났고 이에 비례해서 경제적 고통 역시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정권의 핵무장과 자주국방론에 대해 미국 정부는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특히, 핵무장 계획에 대해서는 CIA 공작 차원에서 철저하게 대응했다. 결국,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재처리시설을 포기하는 대가로 미군철수계획 연기와 원자력발전소 건설이라는 당근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적인 핵무장 계획을 무산시킬 수 있었다. 자주국방론에 대해서도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공업화 계획이 공급과잉을 초래하여 만성불황에 시달리던 국제경제의 위기를 가속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것으로 간주하여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미국이 박정희 정권의 자주국방론에 대해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데는 1970년대 오일쇼크로 인한 세계경제의 불안정성 증대와 종전 이후 세계적 차원의 공공재 공급 국가로서의 미국의 지위 하락이 주된 요인이었다. 고정환율제에서 변동환율제로의 변동을 가져온 달러의 태환정지 선언은 달러화를 유일기축통화로 만든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를 상징했다. 이는 미국이 종전 후 도맡아왔던 국제경제적 공공재를 창출하는 역할을 더 이상 할 수 없음을, 따라서 거시경제적 관점에서 국제경제체제를 관리할 수 없게 됐음을 의미했다.

미국은 박정희 정권의 핵무장계획은 철회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중공업 중시정책을 통한 자주국방 계획에 대해서는 일정정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박정희의 중공업 중시 정책은 '잘살아보세'로 상징되는 남한사람들의 오랜 부강입국의 꿈과 연결됨으로써 대중적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유신과 중화학 공업화는 동일한 모반에서 탄생한 이란성 쌍둥이'(김형아, 2005)라는 지적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얘기다. 하지만, 급속한 중공업화는 일찍이 남한 경제가 근 20년간 경험해보지 못했던 경제 불황을 야기하면서 박정희 정권이 붕괴되는 사회경제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닉슨독트린과 키신저의 3각외교로 상징되는 미국의 한반도 디커플링 정책은 언제나 그랬듯이 남한과 북한을 접근시키는 구심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남한과 북한은 동아시아 정세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 최고위급 수준의 접촉을 시도했다. 그 결과로 나온 게 바로 7.4 공동성명이다. 유신체제의 등장으로 빛이 바래지긴 했지만,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원칙을 천명한 7.4 공동성명은 남북이 한반도문제에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보여준 긍정적 시도로 여겨졌다(Oberdorfer and Carlin, 2014).

닉슨독트린에 대응하기 위한 박정희정권의 안보위기론은 과연 적절했는가? 1970년대 중반 남북한의 군사력 수준을 비교해보면 남한은 북한에 비해 결코 열세에 놓여있지 않았다(함택영, 1998:179). 수치상으로도 남한의 군사력은 북한을 점차 추월하면서 상회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은 가장 적대적 형태의 반공주의를 통한 안보위기론을 설파함으로써 정권의 위기를 벗어나려 했다.

박정희 정권의 안보위기론이 남한 대중들에게 일정한 호소력을 지닐 수 있었던 이유는 국민들 대부분이 한국전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전쟁의 상흔에 따른 냉전적 반공 이데올로기가 이들의 정치의식을 지배했다. 그래서 닉슨 독트린에 대한 대응 역시 어떤 건설적 논의도 봉쇄한 채 주한미군 철수반대로만 표출됐다. 닉슨독트린으로 상징되는 외교안보환경의 변화를 한반도문제 해결의 열쇠로 삼을 수 있는 정치적 상상력의 부재를 절감하는 대목이다. 일본마저 미중수교로 상징되는 돌이킬 수 없는 동아시아 지역의 변화를 실감하면서 중국과의 국교정상화 시도에 적극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미국은 닉슨독트린에서 제시했던 주한미군철수를 끝까지 관철시키지 못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파문으로 미군철수정책을 주도한 닉슨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키신저의 3각외교는 비스마르크의 그것만큼이나 복잡하고 현란했기 때문에 양극화된 국제질서에는 잘 부합하지 않았다. 폴 케네디는 "키신저가 그의 비스마르크식 곡예(juggling act)를 얼마나 오래 계속 할 수 있었을지 의문"(Kennedy, 1989:409)이라고 표현했다.

이어 등장한 카터, 레이건 행정부는 닉슨의 현실주의에서 가치, 이념 중심의 기존의 국제주의 노선으로 복귀했다. 그럼에도 카터와 레이건 행정부 간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인권외교를 중시한 카터 행정부와는 달리 '힘에 기반한 국제주의'를 통해 소련과의 대결정책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결국, 군사력 우위에 입각한 소련의 팽창 억제를 목표로 하는 레이건 행정부의 대외정책은 1980년대 들어 새로운 냉전을 초래했다.

레이건 행정부의 힘에 기반한 국제주의가 소련에 미친 가공할 위력은 10년 후의 공산권 붕괴로 여실히 드러났다. 어쩌면 레이건의 '힘에 기반한 국제주의'는 2차 대전이 끝났을 당시 새로운 세계질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으로 키신저가 적극 추천한 내용이기도 했다. 2차 대전을 통해 조성된 미국의 압도적 힘에 기초하여 소련의 팽창을 단순히 저지만하는 게 아니라 후퇴시킬 수 있었다면 굳이 냉전으로 갈 것까지 없었다는 게 키신저의 주된 논거였다(Kissinger, 1994). 이런 논리에 근거해서 키신저는 봉쇄정책을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로 규정했다.

레이건의 힘에 기초한 국제주의 천명으로 미국의 동아시아정책과 한반도정책은 다시 결합coupling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한미동맹을 한미일 삼각안보동맹으로 업그레이드함으로써 동아시아 지역에서 소련에 군사적으로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이로부터 한반도에서 남북한 사이의 적대와 냉전의식은 한층 더 고착화됐다.

■ 참고문헌

김형아. 2005. 『유신과 중화학공업: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 일조각.
함택영. 1998. 『국가안보의 정치경제학: 남북한의 경제력. 국가역량, 군사력』. 서울: 법문사.
마상윤·박원곤. 2010. "데탕트기의 불편한 동맹: 박정희-닉슨·카터정부 시기".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분과 편. 『역사학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전쟁』. 휴머니스트.
Kennedy. P. 1989. 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 New York: Vintage Books.
Kissinger, H. 1994. Diplomacy. New York: Simon & Schuster.
Oberdorfer, D. and R. Carlin. 2014. The Two Koreas: A Contemporary History. New York: Basic Books.
 

태그:#닉슨 독트린, #7.4공동성명, #괌 선언, #삼각외교, #데탕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 정치이론, 한국정치, 국제관계, 한미관계 강의.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