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번 글의 주제는 바깥물질 나온 좀녀의 노동력 착취에 대한 내용입니다. 19세기 말, 좀녀의 바깥물질로 인해 남해안의 지역 경제는 활성화되었지만 오히려 좀녀는 사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덕이며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당시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짧은 스토리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기자말 
 

그 이름도 서러운 과동녀(過冬女) 
 
1920년 가을.

"죽지 마라, 어떻게든 살아남아 우리 내년 봄에 꼭 다시 만나자." 

이대로 두고 떠나면 순녀는 산송장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금순이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돌아선다. 그동안은 우리 좀녀들이 십시일반으로 조밥이나마 함께 나누어 먹고살았지만, 저 혼자 이 부산 바닥에 남아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을지... 저 독한 일본놈들은 사채를 받아낼 욕심으로 순녀를 겨울 바다로 내몰 것이고 엄동설한에 바다에 들면 분명 하혈병이 덧나 죽을 것이다. 

석 달 전, 뱃물질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순녀는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나중에 듣고 보니 일주일 전부터 하혈이 계속되었는데도 작업을 계속했다고 한다. 해산하고도 3~4일 만에 차가운 바다에 들어 물질하는 우리 좀녀 팔자는 몸뚱이가 재산이다. 그래서 순녀처럼 바깥물질 나와서 이렇게 아파 버리면 대책이 없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아등바등했지만 순녀는 결국 지난해에 빌려 쓴 사채의 반도 다 갚지 못해서 제주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부산에 남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우리 개똥이 아방에게 내년에는 꼭 이 빚 다 갚고 고향에 돌아갈 거라고, 그동안 젖동냥 잘해서 배곯지 않게 하라고 잘 고라줍서(말해주세요)."

돌아서는 금순의 손을 붙잡고 순녀가 울먹인다. 

"울지 말구,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견뎌내서 내년 봄에 우리 꼭 다시 만나자. 지금 본섬(제주도)에서 우리 좀녀들의 불쌍한 사정을 알고 많은 분이 노력하고 있다고 하니 어떻게든 견뎌내면 우리도 옛말하며 웃을 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해." 

봄에 바깥물질 나왔다가 가을이면 돌아가는 철새 같은 좀녀. 그러나 사채를 다 갚지 못하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엄동설한에도 차가운 바다에 들어가 해산물을 캐서 어떻게든 빚을 갚아야 하는 비참한 좀녀에게 붙여진 또 다른 이름, 과동녀(過冬女). 젊고 건강하던 우리 순녀가 과동녀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금순이도 언제 과동녀가 될지 모른다. 올 바깥물질에서도 공동판매금 수수료에 조합비 그리고 입어료와 사채의 이자까지 모두 물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은 몇 푼 되지 않아 또 빚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사채…. 남들은 집 담보, 땅 담보가 있어야 돈을 얻을 수 있다지만 우리는 노동력을 담보로 얼마든지 사채를 빌려 쓸 수 있다. 한번 사채를 얻어 쓰면 영원히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다.

마마(媽媽)보다 무서운 사채, 우리 좀녀에게 소원이 있다면 고금리 사채의 늪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 하나였다. 

언론에서 몰매 맞는 객주 그러나 몸통은 따로 
 
동아일보  1920년 4월 22일
▲ 동아일보  1920년 4월 22일
ⓒ 동아일보

관련사진보기


일제강점기 제주도 좀녀의 바깥물질을 둘러싼 사회적 양상이 다양하게 나타났는데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좀녀의 사채 문제였다. <흉악한 객주, 해녀의 남편 노릇하는 제주도 출신 객주> 등의 굵직한 제목으로 마치 객주가 좀녀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 같은 기사로 일관되어 보도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객주는 깃털에 불과하고 그 몸통은 조선 총독부와 일본 해조 무역상이며 이들의 관계를 연결한 것이 바로 조선해통어조합이기 때문이다.

풀뿌리 식민자(植民者)의 온상, 조선해통어조합 
 
풀뿌리 식민 정책의 온상 조선해통어조합(1899) 1903년 조선해수산조합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 풀뿌리 식민 정책의 온상 조선해통어조합(1899) 1903년 조선해수산조합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 수당 한상복 사진제공

관련사진보기


조선 시대, 바다는 국가의 소유였지만 세금만 내면 그 지역의 어민들이 자유롭게 수산업에 종사할 수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조일수호조규(1876) 이후 부산 지역은 '풀뿌리 식민자'들에 의해 침탈당하면서 남해안의 수산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다'가 '토지'와 같은 재산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자금력을 갖춘 일본의 무역상들은 앞다투어 경남의 풍부한 어장을 불법으로 사들였으며 이와 같은 '풀뿌리 침략의 온상지'가 바로 1899년에 설립된 조선해통어조합이었다. 

메이지 정부가 추진한 '조선 내 일본 어민의 이주 정책' 역시 이곳을 중심으로 확산되었고, 부산의 3대 재벌로 알려진 오이케 츄스케(1856-1930/大池忠助)와 하사마 후사타로(1860/迫間房太郎) 그리고 카시이 겐타로(1867-1946/香椎源太郎) 등의 성공 가도를 놓아 준 것 역시 조선해통어조합과의 커넥션이었다. '풀뿌리 식민자', '풀뿌리 침략'은 일제강점기 과거사를 반성하고자 하는 일본인 학자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의 저서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역사비평사/2006)>에 등장하는 용어이다.

풀뿌리 침략이라는 용어가 시사하듯, 메이지 정부의 특징은 국(國)이 아니라 국민을 내세워 불법을 저지르게 하고 그에 대한 뒤처리를 정부가 나서서 무력과 법으로 처리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1879년부터 잠수기 어업자의 불법 남획을 부추겨서 제주도의 바다를 초토화시킨 역사적 사실을 들 수 있다.

만국공법에서는 '이와 같은 행위는 해적질이며 이를 주도한 집단은 국가로 정의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메이지 정부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1889년 조일통어장정을 체결했지만 이미 제주도의 수산자원이 고갈되어 제주도 좀녀들이 생계를 위해 바깥물질을 나오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2년 전인 1887년부터이다. 

또한, 외국인은 조선의 토지를 소유할 수 없고 어장도 운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민간인을 앞세워 불법으로 부산 땅을 사들여, 일본제일은행(1878), 조선해통어조합(1889), 부산 우편국(1895) 등의 건물을 지어 올렸다. 그리고 해산물이 풍부한 어장을 일본인들이 무작위로 사들였는데 이토 히로부미 역시 통감부의 권력으로 사업가 카시이 겐타로(香椎源太郎)에게 영친왕 소유의 어장을 비롯하여 71군데의 황금 어장을 넘겨준 것이 1906년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좌)와 카시이 겐타로(우) 카시이 겐타로는 황금 어장 71군데를 받아 부산의 3대 재벌이 될 수 있었다.
▲ 이토 히로부미(좌)와 카시이 겐타로(우) 카시이 겐타로는 황금 어장 71군데를 받아 부산의 3대 재벌이 될 수 있었다.
ⓒ 위키피디아

관련사진보기


이와 같은 불법과 만행을 무마하기 위해 메이지 정부는 1908년 '일본인도 토지와 어장을 소유할 수 있다'는 법안을 만들어 구한국정부와 '어업에 관한 협정서'를 조인해서 어업법을 공포하게 만든다. 따라서 그 이전까지 이루어진 어장 및 토지매매와 건축물 등은 모두 민간인을 앞세운 메이지 정부의 불법 행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급조된 어업법은 이후 어업령(1911)으로 구체화되었다. 바다는 해당 지역 조합의 소유가 되어 토지와 같은 재산적 가치를 부여받아 상속, 양도, 공유, 저당 또는 어업권 대부까지 가능했으며 그에 대한 피해는 고스란히 조선의 어민과 좀녀에게로 돌아갔다. 

동래군 기장어업조합이 미역 채취장을 일인에게 경매, 600여 명 조합원과 수천 주민의 유일한 생명을 조합장이 기어코 일본인 부영에게 경매... 조합원 대부분 반대, 총독부에까지 진정 예정. <동아일보/1924년 3월 14일> 

부산 목도의 어부 80여 명이 예년과 같이 통영 관산도 부근으로 출어를 나갔다가 뜻밖에 그 어장 일대가 부산수산회사(오이케 츄스케 소유)에 특허되어 입어를 거절당하였으므로 이날 부청에 특허어장 철거를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동아일보/1926년 1월 13일> 

1911년 장생포의 일본인 야스도미가 울산의 30개 마을에서 3200원을 주고 해조류 어장을 매입해서 제주도 해녀의 입어를 불허하여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총독부는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해녀의 입어 관행을 허가하는 대신 입어료를 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울산학연구 제9호> 


좀녀에게 입어료를 내라니
  

남해안에 좀녀라는 여성 전문직업은 없었다. 게다가 바다에 들어가 채취하는 해조류는 금방 상해버리는 특성 때문에 관리가 어려워 상품 가치가 없었을 뿐 아니라 수요도 없었다. 하지만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제주도 좀녀의 바깥물질 이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좀녀는 남해안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어느 바다에 어떤 해조류가 많은지 개척해서 전인미답이었던 남해안을 일약 황금어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지난 회에서 다루었듯이 연간 어획고가 평균 100만 엔(현 화폐가치 수십억 원)에 이를 정도로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킨 주인공이 바로 제주도의 좀녀들이며 무엇보다 그들의 잠수 능력은 대체 인력이 불가능하다(관련 기사 : 수수료가 70%, 바다에서도 이뤄진 일본의 착취).

따라서 일제강점기 좀녀의 바깥물질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좀 더 다양한 각도로 활발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으며 지금까지 나온 자료만으로도 그들을 '황금알을 낳는 미다스의 존재'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무도 좀녀에게 감사를 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업령(1911) 이후 총독부와 어업조합 그리고 일본 해조무역상과 객주 등 좀녀의 해산물을 둘러싸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변형된 구조가 나타났다.

좀녀들은 이와 같은 현상을 두고 '이놈 저놈 열 놈이 다 떼어먹어야 맨 나중에 좀녀 차지가 온다'라고 표현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당시의 어업령을 좀녀와 관계된 점만을 중심으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도표로 나타낼 수 있다. 
   
어업령(1911)과  노동력 착취 구조
▲ 어업령(1911)과  노동력 착취 구조
ⓒ 고성미

관련사진보기


어업령 이후 조선총독부는 법인 자격을 지닌 어업조합에 어업권을 부여해 주었다. 즉 어업권은 개인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이 되면 자동으로 자격이 생기는 구조인 것이다. 조합은 일정한 수역을 독점해서 바다의 재산권을 행사해서 어장을 운영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거금을 받고 바다를 임대할 수 있었다.

좀녀는 조합비를 내고 조합원이 되어야 해당 지역에서 물질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으며 바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어료까지 내야 했다. 조합비는 조합의 관리 운영비로 쓰였지만, 어장 임대료와 입어료는 조선총독부에 고스란히 흘러 들어갔는데 중간에서 돈 심부름을 한 것이 바로 조선해수산조합이다. 

<중략...> 해녀 1인당 입어료금 3원 50전을 징수하기로 했다. 이 요금은 조선수산조합에 위탁하여 당 부산에 수납하기로 했다.<부산일보/ 1915년 5월 1일>

문제는 입어료이다. 시장의 기본 시스템에 의하면 입어료는 어장 운영자의 임대료에 포함되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입어료에 대한 권한은 어장 운영자에게 있지만 좀녀는 어장 운영자에게 입어료를 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임대한 어장에서 물질한 해산물의 판매 이익금을 어장 운영자가 챙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독부는 이 항목을 따로 떼어내서 조합이 입어료를 징수할 수 있도록(어업령 제5조) 변종된 명목으로 만들어 좀녀에게 부과시킨 것이다. 해산물이 가장 풍부한 울산의 입어료가 4원 50전이고 동래가 3원 50전이었다. 좀녀는 평균 두세 군데의 어장에서 물질했으므로 한 해 평균 8원의 입어료를 내야 했는데 이것은 좀녀 소득액의 1/4에 해당될 정도로 부담이 큰 금액이었다.

같은 시기 일본의 해녀도 돈을 벌기 위해 경남지역으로 출가물질을 나왔는데 그들에게는 얼마의 입어료가 부가되었는지에 대해 조사해 볼 일이다. 다방면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아직까지 조선으로 출가물질 나온 일본 해녀의 입어료에 관한 기록은 찾지 못했다. 

좀녀의 입어료 문제는 일제강점기 내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지만, 매년 수천 명의 좀녀에게 거두는 입어료가 수만 원(현 화폐가치 수억 원)에 이르기 때문에 총독부는 조선어업령(1930) 이후 울산(6원 45전), 동래(6원), 부산(2원)으로 인상(부산일보/1930년 5월 5일)해서 15만~20만 엔에 이르는 입어료를 챙겼다. 따라서 나는 좀녀 노동력 착취의 가장 큰 손은 바로 총독부라고 단언하며 그들의 행위는 양아치와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지역에 따라 약간의 시대적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입어료는 해방 이후 어장 운영자의 임대료에 포함되어 바깥물질 나온 좀녀가 따로 내지 않았다. 또한 어업조합의 재산권이었던 어장은 해당 지역의 어민과 좀녀의 구성원으로 형성된 어촌계로 돌아가 어장의 소득이 어민과 좀녀에게 분배되는 구조이며 어촌계원이 아닌 외부인은 어장을 이용한 상업활동을 할 수 없다. 요즈음 사회적으로 가끔 떠오르는 스쿠버다이버와의 마찰 역시 어장을 둘러싼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 해조무역상의 좀녀 모집

일제강점기 부산에는 수백 명의 일본 해조무역상과 동야상(問屋商:도매상)이 군거지를 이루고 있었다. 일본은 이미 16세기부터 나가사키 항을 중심으로 무역에 중점을 두고 있던 터라 조일수호조규 이후 부산이 그들의 새로운 활동지가 된 것이다. 이들 역시 풀뿌리 식민자의 일원으로 메이지 정부의 든든한 지원까지 받아 쉽게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한편 부산의 토박이 객주 역시 일본의 상인협회에 맞서 부산객주상법회사를 설립(1889)했지만 일본 해조무역상과 동야상에게 밀려 활동 시장이 축소되면서 그들 중 일부는 도매 중개상이라는 그들의 본업에서 벗어나 좀녀 모집책이라는 변형된 형태로 해조무역상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해조무역상에 고용된 객주의 임무는 매년 정월이 되면 제주도로 건너가 바깥물질 나갈 좀녀를 모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할당받은 정원을 채우지 못할 경우 남편의 동의 없이 좀녀와의 계약을 체결하거나 혹은 미혼의 좀녀를 유괴하는 범행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그들에게 좀녀 모집은 중요했다(동양수산신문 1933년 10월 5일). 

그렇다면 해조무역상들은 왜 이토록 좀녀 모집에 집착했을까? 이유는 좀녀의 숫자만큼 입어료가 늘어나 총독부와와 커넥션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고 또 좀녀의 해산물을 독점 판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칙대로라면 어장 운영자가 해산물 판매 루트를 결정할 수 있겠지만 좀녀를 모집해서 노동력을 제공한 것이 해조무역상이기 때문에 판매 독점권을 소유할 수 있었고 총독부는 이것을 눈감아 주었다. 하지만 1920년 제주도 해녀어업조합의 설립과 더불어 일본 해조무역상의 독점 판매는 해체되는데 이 부분은 다음 회에서 자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당시 부산에 근거지를 둔 해조무역상의 과열 경쟁 속에서 전도금(前渡金)이라는 옵션이 등장했다. 전도금이란 출가증(出稼證)을 만드는 비용과 왕복 뱃삯 그리고 타지에서의 기본 생활비 명목으로 주는 계약금이었다. 당연히 좀녀는 전도금을 주는 객주를 선택했다. 하지만 계약금으로 건넨 전도금은 고금리 사채로 둔갑하여 바깥물질을 마치고 정산할 때 이자까지 계산해서 갚아야 하는 사기 수법이었고 그 돈줄이 바로 일본의 해조무역상이었다. 다시 말해 좀녀 노동력 착취의 두 번째 큰 손이 바로 일본 해조무역상인 것이다.

그에 비해 객주의 수익구조는 푼돈 형식으로 다양했다. 좀녀 모집을 대가로 해조무역상으로부터 임금을 받았고 해산물 판매 과정에서 어장 운영자와 좀녀 그리고 해조무역상에게 구전을 챙겼다. 또한 좀녀가 채취한 해산물의 무게를 잴 때 저울 눈속임을 해서 100근을 80여 근으로 속이고 상등급을 중등급으로 날조해서 얻는 부수입이 꽤 많았으며 좀녀와 사채업자를 연결해서 얻는 구전도 만만치 않았다. 1893년에 60개 정도였던 객주가 1909년에는 1367로 급증(김연지, 2009)한 이유는 그만큼의 수입이 보장되었기 때문인데 이런 자리를 부산지역에서 제주도의 객주에게 양보했을 리 만무하다.

물론 조일수호조규이후 제주도 객주 역시 부산에서 활동하기 위해 애를 쓴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1893년 일본 공사가 제주도 객주의 철폐를 요구해서( 『舊韓國外交文書』 2, 日案 2, 고종 30년 8월 27일, 문서번호 2483) 제주도 객주가 부산 지역에서 활동할 여지는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제주도의 언어가 통역이 필요할 정도로 지방색이 강해서 좀녀와의 소통을 위해 몇몇 제주도 출신을 고용했을 수는 있었겠지만, 이들은 제주도의 객주가 아니라 좀녀를 제주도에서 실어나르던 선주들이었다. 

위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좀녀 노동력 착취의 가장 큰 손은 조선 총독부(입어료)와 어장운영자, 그리고 어업조합(조합가입비)과 일본 해조무역상(50%의 판매 수수료 및 사채)이고 객주는 그야말로 깃털에 불과하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일본인 중심으로 형성된 몸체는 건드리지 않고 '흉악한 객주'라는 제목으로 그것도 제주도 출신을 강조하며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난 기사로 일관하는데 이 부분 역시 제주도 해녀 어업조합과 깊은 관계가 있으므로 다음 회에서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다. 

사채는 현금으로 갚을 때는 해산물로? 이상한 변제법

좀녀의 손을 떠난 해산물은 객주를 통해 어장 운영자에게 전해지는 과정에서 저울 눈속임 및 등급날조 등으로 이미 절반의 착취를 당한다. 판매금 역시 객주를 통해 어장 운영자 및 어업조합에 전해진 다음 최종적으로 좀녀에게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좀녀는 그들이 채취한 해산물이 얼마의 시세에 거래되었는지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되는 불문율이 되고 말았다. 

만일 날이 좋지 않거나 몸이 아파서 작업 일수가 모자랄 때는 오히려 미리 받은 전도금 마저 갚지 못하는 현상까지 벌어지면서 좀녀는 어쩔 수 없이 사채를 빌릴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바로 해조 무역상이 간절히 바라던 상황이었다. 일반적으로 집이나 토지의 담보가 있어야 사채를 얻을 수 있지만 좀녀는 그들의 노동력을 담보로 쉽게 사채를 쓸 수 있었다. 그러나 해조무역상의 사채를 쓰게 되면 그 돈을 다 갚기 전까지는 매년 해조무역상 소속으로 바깥물질을 나올 수밖에 없었고 당시 좀녀의 수익구조로 보아 그들이 사채를 갚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좀녀는 마치 마이너스 통장을 쓰듯 빚을 진 상태에서 바깥물질을 나와 한 해 동안 고생한 해산물은 전 해에 당겨쓴 사채를 갚기 위해 해조무역상에게 고스란히 들어가고 다시 사채를 빌려 고향으로 돌아가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한 가지 특징은 좀녀가 빌린 사채는 '돈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해산물로 갚는다'는 불문율이 생겨나 해방 이후로도 오래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해조무역상들이 돈을 마다하고 해산물을 고집하는 이유는 해산물의 시세 차익을 그들의 수익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30원의 사채를 100원 어치의 해산물로 갚는 이중 착취이며 그 수익은 고스란히 해조무역상의 호주머니로 흘러 들어갔음은 말할 나위 없다. 

몸이 아프거나 날이 좋지 않아 작업 일수가 모자라 사채를 제대로 갚지 못하게 되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과동녀' 신세를 면치 못하여 가을이 되어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 해조무역상에게 잡힌 몸이 되었다. 과동녀가 되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일본 해조무역상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당시 좀녀는 이들의 비참함을 '빚을 다 갚지 못해서 일본놈의 전중살이를 했다'라고 표현했다. 전중이란 옥살이를 뜻하는 말이다.  

1920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태호를 비롯한 제주도의 유지들이 사채에 몰린 좀녀를 구제하고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제주도 해녀 어업조합이다. 1925년 이후 일본인 제주 도사가 조합장을 겸하게 되면서 관제화되어 좀녀의 노동력을 수탈한 것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다르다.

제주도 해녀 어업조합장은 초기부터 제주 도사였던 곤도 신지로였고 그들이 조합을 추진한 이유는 사채에 몰린 좀녀를 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경남지역으로 집중된 좀녀의 높은 어획고를 제주도로 돌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동아일보 1921년 4월 21일
▲ 동아일보 1921년 4월 21일
ⓒ 동아일보

관련사진보기


제주도 해녀어업조합의 형성과 더불어 좀녀의 해산물을 독점 판매하던 일본의 해조 무역상들이 사라지고 조선해조(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제주도 해녀 어업조합과 어깨동무하며 좀녀의 노동력을 좀 더 폭력적으로 착취하기 시작했는데 <제주도 해녀 어업조합의 형성과정>에 대한 내용은 다음 시간에 정리할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참고자료
통감부의 어업 이민 장려와 어업법 제정/ 일제시대 남선창고주식회사의 경영구조와 참여자의 성격/ 일본의 어업침투와 권현망어업의 변천사/ 일제강점 초기 자본가 중역겸임제에 의한 정치.사회적 네트워크의 형성/ 근현대 한일간 조약 일람/ 부산공동어시장 50년사/ 수산물 산지 중도매인 기능 변화에 관한 연구/ 영도 해녀에 대한 현장론적 연구/ 개항장 인천(재조일본인과 도시의 식민지화)/ 울산학 연구/ 동아일보/ 매일신보/ 동양수산신문/ 오사카 아사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우도에서 살고 있는 사진쟁이 글쟁이입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