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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이면을 봅니다. 그 이면엔 또 다른 뉴스가 있습니다.[편집자말]
단 한 명만 살아남았다.

다른 친구들은 같은 날, 같은 장소, 거의 비슷한 시각 삶을 멈췄다. 친구의 생일, 친구의 취직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에 열 명이 모이기로 했었다. 약속 시간에 늦은 친구를 제외한 다른 아홉 명이 화마에 휩쓸렸다. 1999년 10월 30일 저녁 7시께, 인천광역시 중구 인현동 4층 짜리 상가 건물에서 불이 났다. 57명이 죽었고, 78명이 다쳤다. 희생자 중 고교생이 많았다. 또 그 대부분은 무허가 호프집에 있었다.

그 다음날 아침, 신문 1면은 말 그대로 참혹했다. 사진 속에서 희생자들은 테이블 아래 서로 뒤엉켜 있었다. 한 언론은 "사상자들은 출입구 반대쪽 부엌에서 50여명이, 내부에 설치된 20개 가량의 테이블 사이 3개 통로에 20여명씩 무더기로 쓰러진 채 발견됐다"고 전했다. 당시 출동한 소방서 관계자는 "호프집 안으로 들어가보니 남녀 고교생으로 보이는 10대들이 서너겹으로 포개진 채 숨지거나 신음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말 그대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30여분만에... 왜?
 
1999년 11월 1일자 <한겨레> 1면(사진 일부 모자이크)
 1999년 11월 1일자 <한겨레> 1면(사진 일부 모자이크)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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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분. 소방차가 바로 출동했고 화재가 완전히 진압된 시간이 그쯤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희생자 대부분이 그 35분 동안 발생했다. 또 그들 대부분은 2층 호프집에 있었다. 불이 처음 난 것은 지하에 있던 노래방 쪽이었다. 1층 식당에서는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으며, 3층에 있던 당구장에서도 역시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이유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신문을 통해 생존자는 "연기가 치솟으면서 술집 종업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가지 마라'고 외쳤다, 이 때문에 손님들은 경찰들이 단속을 나와 최루탄을 터뜨린 것으로 알고 기다리며 우왕좌왕했다"고 증언했다. 출입구 층계 외에 다른 비상구는 없었다. 2층 창은 통유리 구조에 그마저 합판으로 막혀 있었다. 희생자 사인 대부분은 질식이었다.

더 기가 막힌 내용도 함께 알려졌다. 문제의 호프집은 무허가 영업으로 영업장 폐쇄 명령을 받았음에도 계속 영업을 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른바 '삐끼'를 이용해 안에서 문을 잠그고 학생들을 끌어들였다고 했다. 인근 주민들은 모두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 곳에서 200미터 거리에 파출소가 있었다고 한다. 경찰은 '몰랐다'고 했다. 소방 점검 역시 형식적이었다고 했다. 정기 소방검사 결과는 '이상 없음'이었다. 모두 어른들의 잘못임이 명백했다.

그리고, 처음 불이 어떻게 시작했는지도 알려졌다. 지하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10대 두 명의 불장난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했다. 17세 김아무개군은 현장에서 숨졌고, 14세 임아무개군은 경찰 조사를 받았다. 이를 두고 한 방송사는 "한 순간의 불장난이었지만 후회했을 때는 이미 수많은 생명들이 불길에 휩싸인 뒤"라고 전했다.

분노... "몽땅 다 책임을 가출 청소년에게 지웠다"
 
1999년 11월 1일자 <경향> 1면(사진 일부 모자이크)
 1999년 11월 1일자 <경향> 1면(사진 일부 모자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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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당시 상황에 박인혜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군인권센터 운영위원)는 "분노했다"고 말했다.

그는 29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당시 중학교 1학년(14세, 임 아무개군)이었던 그 학생은 가출 청소년이었는데, 날씨가 추워지면서 그 건물 지하에서 지내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면서 "몽땅 다 책임을 그 학생한테 지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구조적으로 시의 행정 책임이 컸던 참사다, 의도적이었든 아니었든 유족에게 배상을 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음모였다고 본다"고도 주장했다.

박 교수는 "아이들이 그런 곳에서 술을 먹다 죽은 것이라거나, 아이들이 실려 나오는데 어떤 여학생이 팬티를 안 입었다든지 등 보도가 초창기부터 흘러나왔다, 그로 인해 '죽어도 싸다'는 식의 얘기들이 돌았다"면서 "심지어 학교에서는 피해 학생들을 바로 제적시키려 했고, 이에 반대하여 성명서를 발표하려는 학생들을 막아섰다"고도 말했다.

그런 분노는 박 교수를 유족들 곁에 서게 만드는 힘이 됐다. 당시 인천 여성의 전화 대표였던 그는 "인권 문제에서 바라보고 배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개입했다"고 설명했다. 그 경험을 2000년 '인현동 화재참사 인권보고서'로 정리하기도 했던 그는 "재난은 사실 약자에게 오는 것인데, 어떤 사건이 나면 가장 힘없는 바닥에 있는 사람에게 책임 지우는 건 여전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인현동 참사도 끔찍했지만 그 다음 그 때 어른들이 벌인 행위는 더 끔찍했다"면서 "재난 이후 유족들에게 가해지는 2차 가해 등 인권 문제는 적어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을 별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인현동 참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다음은 주요 문답을 정리한 것이다.

세상에 나오지 못한 학생들의 성명서
 
1999년 12월 29일자 <동아>에 실렸던 유족들의 광고문
 1999년 12월 29일자 <동아>에 실렸던 유족들의 광고문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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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유족들의 싸움에 결합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인현동 참사를 인권 문제에서 바라보고 배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개인들이 개인이 하는 영업 장소에 갔다 그렇게 된 거니까... 나는 인천시가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인권의 관점에서 봐야만 시에 책임을 물을 수 있고 배상을 하도록 할 수 있다. 그래서 개입했던 거다."

- 유족분들은 지금도 당시 언론 보도 등으로 인해 상처가 깊은 것 같다.
"맞다. 언론 보도로 인해 '죽어도 싸다'는 식의 얘기들이 실제 많이 돌았고, 실제 범인으로 지목됐던 학생은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다. 마침 그 학생이 내가 사는 동네에 살아서..."
 
"말없는 애들이라고 멋대로 나쁜 아이들로 몰아가는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원통할 뿐입니다. 죽고 다친 것도 억울한데 방탕아로 몰고들 있으니 통탄할 일 아니겠습니까?

사고 당일 인천 시내 대부분의 고등학교에서는 학교가 주최한 축제가 처음으로 열렸습니다. 학생들 또한 생전 처음 해 보는 특별한 날의 축제에 들떠 있었을 것이 자명하고 수일 전부터 뒤풀이를 계획했고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당시 인천 시내의 비슷한 시간 비슷한 장소에는 각 학교에서 쏟아져 나온 많은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것으로 쉽게 생각이 됩니다.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다 불량 아이고 비행 청소년이면..."

(참사 이후 유족들이 대통령에게 보낸 호소문 중)

- 이제까지는 학생 두 명이 노래방 쪽에서 장난을 하다 불이 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건 맞나?
"맞는데, 그 중1 학생이 가출 청소년이었다. 그 학생이 가출했으니까 지낼 곳이 없고 날씨가 추워지면서 그 건물 지하에서 지냈다. 그러다 불이 난 건데, 그 학생이 불을 냈다 하더라도 사실 몽땅 다 책임을 그 청소년에게 지운 거다. 어른들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불이 확 커져서 그렇게 많은 희생자가 났던 결정적 이유는 애들이 술 먹고 도망간다고 문을 잠갔던 거다.

또 그 건물을 불 잘 붙는 재료로 마감했다든지, 소방 점검이 부실했다든지, 교육청이든 시든 제대로 단속을 못했다든지, 이렇게 구조적으로 복합적인 참사였다. 때문에 의도적이든 아니든, 유족들에게 보상을 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음모였다고 나는 본다. 더구나 애들 죽어서 막 실려 나오는데, 어떤 여학생이 팬티를 입지 않았다는 식의 보도가 초창기부터 흘러나왔다. '술 먹고 놀았다'는, 아이들 잘못으로 몰아가는 그런 식의 보도로 인해 '죽어도 싸다'는 이야기들이 돌았고, 그런 것들이 부모님들 마음을 굉장히 아프게 한 거다."

- 그 때 분노했던 이유가 또 있는가.
"앞서 말한 그 중학생 관련 보도를 보면서 '이 나쁜 어른들...' 굉장히 화가 치밀었다. 또 하나는 당시 학생들이 굉장히 충격을 받았는데, 그때 학교에서 어떤 조치를 취했냐면 아이들을 바로 바로 제적시켜 버리려고 한 거다. 그래서 학생회장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고, '우리 잘못은 인정하지만, 우리 친구들 그렇게 하지 마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려고 했다. 그걸 못하게 했다. 학교에서 막아서. 당시 성명서 내용을 기자를 통해 구해 보고 학교에서 그렇게 했다는 걸 알고 정말 분노했다."

"저희를 무시하는 행정... 제2의 인현동 참사 일어날 것"
 
인천시 중구 학생문화회관에서 열린 '인천 인현동 화재사고 15주기 추모식'에서 유족이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제를 올리고 있다. 인천 인현동 화재사고는 1999년 10월 30일 인현동 거리의 한 호프집에서 불이 나 57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한 대형참사다.
 인천시 중구 학생문화회관에서 열린 "인천 인현동 화재사고 15주기 추모식"에서 유족이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제를 올리고 있다. 인천 인현동 화재사고는 1999년 10월 30일 인현동 거리의 한 호프집에서 불이 나 57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한 대형참사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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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참사를 어떻게 규정하나.
"학생 인권과 재난 인권을 총체적으로 침해했던 참사다."

- 사건 자체도 상당히 끔찍했지만, 그 다음 어른들이 벌인 행위가 더 끔찍했다는 것인가.
"그렇다."

- 지금 시점에서 교훈은?
"가출 청소년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없는 바닥에 있는 사람 아닌가... 무슨 사건이 나면 가장 힘없는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는 건 여전하다는 생각이 든다. 재난이 일어나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더 많이 당한다. 그래서 사실 재난은 약자에게 오는 거다. 재난 불평등이라고도 하는데, 적어도 재난 피해자에 대한 인권 개선은 아직도 해결이 안 되고 있다.

당시 피해자 가족들 거의 100%가 서민이었다. 힘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당시에도 가족들이 '우리들 중 누구 하나 경찰이라든지, 검사라든지, 변호사라든지, 뭐 이렇게 힘있는 쪽에 연결이 되는 사람이 있었으면 우리가 이런 대우를 받았겠냐'고 했다. 그래서 그 때 더 시의회도 찾아가고 시장도 만나고 막 했던 거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재난에는 3단계가 있다. 재난이 시작되기 전, 재난이 일어난 당시, 그리고 재난이 일어난 후. 이 3단계에서 잘해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보상을 어떻게 해 주냐 하는 문제에만 그쳐버린다. 3단계에 대한 개선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재난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거기서 적어도 발생하는 인권 문제에 있어서는 충분히 개선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우리 사회가 그런 문제를 별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세월호 참사 때도 똑같지 않았나. 인권 문제가 완전히 가려져 있다. 인현동 참사를 계속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이 학생으로서 가지 말아야 할 장소에 출입한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어른들의 말씀대로 아직 저희에게는 술에 대한 가치관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학생들 앞에 말리는 사람 따로 파는 사람 따로인 상황이라면 학생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쪽으로 손을 뻗칠 것은 불 보듯 한 일입니다. 청소년 보호법에는 만 18살 미만의 학생에게는 술과 담배 판매를 일절 금지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그러나 단속을 해야 하는 공무원들은 아니나 다를까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되는 상황입니다... (중략)

언제까지나 저희 학생들과 청소년들을 무시하는 행정을 하신다면 제2의 인현동 참사는 일어나고 말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 학생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기성세대가 저지른 잘못을 자신들의 상호 이익을 위해 대충 절충하고 덮어가는 식으로 해결하는 것을 바라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희들에게 호프집에 출입하지 말라고 다그치시기 전에 저희 학생들이 모여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십시오."

(당시 인천 지역 15개 학교 학생회장들이 발표하려고 했던 성명서 중 일부)

태그:#인현동 화재 참사, #박인혜, #사회적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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