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말]
 영화 <프렌드 존> 메인 포스터

영화 <프렌드 존> 메인 포스터 ⓒ (주)디스테이션


01.

태국 영화를 언제 처음 접했는지 생각해본다.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지난 2004년 국내 개봉된 영화 <옹박-무에타이의 후예>였던 것 같다. 인기에 비해 극장 수익이 대단히 좋았던 편은 아니었지만, 화려한 액션을 기반으로 주인공 팅 역을 맡은 토니 자의 패러디가 많이 쏟아졌다. 인지도로만 따지자면 국내에서 가장 성공한 태국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이후 한참 잠잠하던 국내에서의 태국 영화의 명맥은 최근 <피막>(2014), <선생님의 일기>(2016), <배드 지니어스>(2017) 등이 간간이 소개되며 유지되어 왔다.

2000년대 이후 태국에서도 매년 수십 편의 영화가 제작되고 있다. 그러나 여러 문제들로 인해 영화 산업의 미래가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불안정한 투자 구조와 전문 인력의 부족 등 여러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지만 특히 검열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다. 1970년대 정치적 격변, 사회적 불안이 영화 산업을 완전히 몰락시켰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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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렌드 존>이 반가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잘생기고 예쁜 주인공을 필두로 한, 로맨틱 코미디 장르는 침체되어 있던 영화 산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가장 흔히 제작되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1990년대 작품들이 그랬고, 2000년대 한국 영화들이 그랬고, 최근 4~5년 간의 대만 영화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스토리 전개와 어디선가 본듯한 기시감이 드는 유사 장면들이 펼쳐지지만, 정확한 장르적 구조를 따르는 결과물이 자아내는 긍정적 감정의 발화가 관객들에게 주는 만족스러움. 대중에게 잘 소구할 수만 있다면, 비교적 낮은 제작비로 높은 수익을 창출해낼 수 있는 종류의 영화가 바로 이와 같은 작품들이다. 태국에서 이런 작품이 아시아 전역에 소개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만든다.

작품의 타이틀인 '프렌드 존(Friend Zone)'은 친구 이상은 될 수 없는, 연인으로의 관계로는 발전할 가능성이 없는 관계를 유지하는 이성 친구를 이르는 말이다. 영화 속에서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로의 곁에 머물며 사랑한다고 말할 순 있지만, 연인이라고는 선언할 수는 없는, 영화 속 주인공인 두 사람, 팜(나팟 시앙솜분 분)과 깅(핌차녹 류위세파이분 분)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프렌드 존> 스틸컷

영화 <프렌드 존>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03.

영화는 불륜이 의심되는 아버지의 뒤를 쫓아 비행기를 타고 치앙마이로 향하는 여자 주인공 깅과 그녀의 곁을 지키는 남자 주인공 팜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녀의 아버지가 들어간 방의 옆방으로 숨어든 호텔에서 사실을 확인한 두 사람은 믿음과 사랑에 대해 큰 상처를 받고 다시 돌아오게 된다. 영화 <프렌드 존>이 극의 가장 처음에서 아버지의 불륜을 보여주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프렌드 존'이라는 두 사람의 관계를 명확히 명시하기 위한 계기를 만들기 위함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 상황이 두 사람에게 부여하는 심리적 요인을 형성하기 위해서다.

이미 어느 정도 서로에 대한 호감이 있는 두 사람의 '프렌드 존'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우연하게 결정적인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아버지의 불륜을 확인하며 슬퍼하는 깅을 위로하려고 팜이 무심코 던진 사랑한다는 말에 그녀가 그 사랑한다는 표현은 어떤 의미냐며 진지하게 물어왔던 것. 물론 다른 많은 유사 작품에서처럼 이 상황에 대한 남자의 대답은 긍정적이지 않다. 처음부터 그녀에 대해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계속 친구로 지내면 서로 소유하려고 하지 않아도 되고 헤어질 일도 없지 않느냐며 명확한 선을 그어버리는 것이다. 단지 상황을 회피하고자 했던 그의 순간적인 실수로 인해 깅 역시 큰 실망을 하게 되고, 두 사람은 애매한 관계로 평생을 서로의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며 '프렌드 존'에 머물게 된다.

04.

한편, 이 장면은 상실과 배신이라는 부정적 감정이 두 사람에게 각각 내면화 된다는 점에서도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의 대사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팜은 이미 아버지가 없는 편부모 가정에서 자란 인물이다.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누군가의 부재와 이별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게 된 것. 누군가를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지 않으면 헤어질 일도 없지 않느냐'는 말로 대신한다. 이는 그가 영화의 중후반부를 지나는 동안 수많은 여자를 만나는 바람기가 많은 캐릭터로 그려지기는 하나, 그 모습이 진짜라기보다는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깅을 잊기 위함으로 해석이 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가정적이라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불륜에 대한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깅이 느낀 감정들은 타인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신하는 태도로 표현된다. 그 의심이 언제나 실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상황 자체가 안타까운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팜의 경우와 달리, 그녀의 심리는 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의심으로 인해 어려워지기 시작하는 마음과 상황을 모두 그에게 의존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영향을 끊임없이 주게 된다. 물론, 그녀의 요청에 팜은 언제 어디서든 도움이 되고자 한다. 비행기를 타고, 여자친구를 버려가면서까지 말이다.
 
 영화 <프렌드 존> 스틸컷

영화 <프렌드 존>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05.

그런 두 사람에게도 10년을 이어온 이 상황에 균열을 일으키는 상황이 주어지기는 한다. 깅이 남자친구인 테드(제이슨 영 분)의 불륜 증거를 확인한 뒤 불안한 마음으로 팜과 함께 태국 끄라비로 향하는 장면이다. 함께 맥주 목욕까지 하며 어느때보다 진지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불안을 빌미로 서로의 관계만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마저 무시하려는 듯한 깅의 태도에 팜이 폭발하고 만 것. 이를 계기로 팜은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속이지 않고자 하고, 깅은 자신 역시 더 이상 이 상황을 마냥 이어나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진심을 감추고자 하는 노력하는 남자와 그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여자의 모습으로 지탱된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지점에서 항상 같은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가 신경 쓰이는 지점에서 종이 한 장 차이로 비유되는 친구와 연인의 사이에 위치하고자 노력하는 두 사람 말이다. 첫 시작부터가 꼬여버린 탓에 어느 누구도 먼저 그 매듭을 풀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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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부에 등장하며 깅과 테드, 두 사람의 관계를 표현하는 지점의 연출이 다소 헐거운 느낌이 있지만, 영화 <프렌드 존>은 전체적으로 볼 때 크게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없는 작품이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2012)나 <나의 소녀시대>(2015)로 대표되는 2010년대 대만 영화보다는 조금 가벼운 느낌이 있지만, 극 중 두 주인공이 쌓아가는 케미를 보고 있자면 딱히 이 작품이 태국 영화라서 느끼게 되는 위화감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팜과 깅의 메인 스토리를 감싸고 있는 결혼식 시퀀스의 활용도 극의 안정감을 더한다.

말레이시아와 캄보디아, 홍콩, 미얀마 등 아시아 5개국 로케이션까지 실시하며 태국 영화로는 전에 없던 스케일까지 갖춘 영화 <프렌드 존>. 코믹함과 진지함을 넘나드는 두 배우의 매력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아쉬움이 남지 않는 작품이다. 앞으로 태국으로부터 소개되는 영화들에 관심을 더욱 갖게 만든다.
영화 태국 프렌드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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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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