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서른 넘어 읽는 고전'은 30대를 통과하고 있는 한 독서인이 뒤늦게 문학 고전을 접하며 느낀 재미와 사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한때 내 꿈은 현모양처였다. "나는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대차게 소리치며 꾸었던 꿈이 우습게도 현모양처였고, 피아노를 향한 꿈이 좌절되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골라잡은 꿈이 고작 현모양처였다. 지금 생각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그때 나는 진지했고 나뿐만 아니라 내 친구들 중 3분의 1 정도는 나처럼 현모양처가 꿈이라고 말했다.

현모양처가 되겠다고 해놓고 내가 제일 먼저 배운 건 요리였다. 그 다음으로 관심을 가졌던 건 집을 예쁘게 꾸미는 방법과 '인형의 집'처럼 예쁘게 꾸며진 방의 모습이 실려 있는 인테리어 잡지였다. 그러니까 나는 요리 잘하고, 집을 예쁘게 꾸미고, 앞치마를 두르고 방긋방긋 웃는 '종달새'처럼 예쁘고 착한 아내가 '현모양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꿈꾸었던 것은 '현모양처'가 아니라, '나'라는 인간을 지워버리고 남편의 칭찬과 사랑을 월급 대신 받으며 하루 종일 쓸고 닦고 볶고 끓이는 '자발적 무임금 가사도우미'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가관이다. 현모양처가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말도 안 되는 꿈을 꾸었던 나를 이렇게 과거형으로 말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더 이상 나는 현모양처를 꿈꾸지 않는다. 이제 나는 '글 쓰는 삶'을 꿈꾼다. 비록 지금 내가 쓰는 글로는 기껏해야 푼돈밖에 벌 수 없지만, 내가 번 돈으로 책도 사서 읽고, 배우고 싶은 것도 하나씩 배우고 있다. 여전히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울 때도 많고, 너무나 갈 길이 멀어 주저앉게 되기도 하지만 글 쓰는 일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형의 집'을 부숴버린 노라
 
<인형의 집>, 헨리크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민음사(2010)
 <인형의 집>, 헨리크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민음사(2010)
ⓒ 민음사

관련사진보기

 
이제와 나의 흑역사를 굳이 끄집어 내는 이유는 최근에 읽은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 때문이다. <인형의 집>은 헨리크 입센의 희곡으로, 1879년 코펜하겐에서 초연되었다.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와 나 사이에는 140년이라는 시간이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에게서 노라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는 사실에 힘이 쭉 빠지기도 한다.

<인형의 집>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며칠 동안 헬메르 부부의 집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리고 있다. 헬메르 토르발은 변호사로 일하며 그동안 형편이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다가올 새해부터는 은행 총재로 임명되어 넉넉한 수입이 보장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예정이다. 그의 아내 노라는 집안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보살피며 남편의 어여쁜 '종달새'로 살고 있다.

남편의 출세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한껏 들뜬 노라는 부지런히 집 안을 돌아다니며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고, 파티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러던 중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노라의 친구 린데 부인이 그들의 집에 찾아온다. 반가운 마음에 정신없이 서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다가 얼떨결에 노라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을 린데 부인에게 털어놓는다.

그녀가 린데 부인에게 털어놓은 비밀인즉슨 남편 몰래 진 빚이다. 몇 년 전 남편이 크게 아팠을 때 요양차 남부로 떠나려면 큰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녀는 가진 돈이 없었고, 급한 대로 친정아버지의 서명을 날조해 돈을 빌린 것이다. 그 돈으로 노라는 남편과 함께 남부 지방으로 떠났고 남편을 극진히 간호한 결과 건강을 회복했다. 남편은 노라가 서명을 날조해 돈을 빌렸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노라는 지금까지 남편 몰래 빚을 갚기 위해, 남편이 눈치채지 못하게 최대한 생활비를 절약해 조금씩 빚을 갚았다. 하지만 아직 남은 빚이 적지 않았고, 그러던 중 남편의 수입이 늘어나게 되어 기뻐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할 리가 없다.

어느 날 노라가 돈을 빌린 크로그스타드가 노라의 집을 찾아와 그녀의 남편을 만나고 싶다고 해 그녀를 경악게 한다. 알고 봤더니 크로그스타드는 남편의 어렸을 적 친구였을 뿐 아니라, 지금은 남편의 출세에 성가신 걸림돌 같은 존재로 남편(토르발)을 귀찮게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의 등장으로 인해 토르발은 노라의 비밀을 알게 되고, 부부가 말다툼을 하던 중 노라는 자신에 대한 남편의 진심을 듣게 된다. 그녀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고, 여태껏 살아왔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이제 이 집과 남편을 떠나 스스로의 힘으로 살겠다고 선언한다.
 
알고 보니 나는 여기서 가난하게 살았던 것 같네요. 그날 벌어 그날 사는 거죠. 토르발, 나는 당신에게 재주를 부리는 것으로 먹고 살았던 거예요. (…)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행복한 줄 알았죠. 하지만 한 번도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재미있었을 뿐이죠. 그리고 당신은 언제나 내게 친절했어요. 하지만 우리 집은 그저 놀이방에 지나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의 인형 아내였어요. (116쪽)

나는 당신을 떠날 거예요. 나는 나 자신과 바깥일을 모두 깨우치기 위해 온전히 독립해야 해요. 그래서 더 이상 당신 집에 있을 수가 없어요. 지금 당장 떠나겠어요. 이제는 내게 무엇을 금지해도 소용없어요. (117쪽)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모양처'의 헛된 꿈은 대부분 돈 때문에 박살 난다. 남편의 착하고 예쁜 '종달새', '인형 아내'로서의 노라의 삶 역시 남편 몰래 진 빚 때문에 산산조각 났다. 다행히 노라는 남편의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무너지지 않고, 그동안 자신을 옭아매었던 '인형 옷'을 벗어던지고, 허울뿐이던 '인형의 얼굴'을 스스로 부숴버린다.

한 인간으로 오롯이 서겠습니다

작품 속 노라는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나는 140년 전의 노라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나는 아직 남편에게서 독립하지 못했다. 여전히 구직 사이트를 살펴보고 있으나, 어린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서른 중반의 여성인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거의 없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일할 수 있는 곳은 적어도 내가 사는 동네에는 한 군데도 없다. 어쩌다 한두 군데에서 연락이 온다고 해도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다고 하면 난색을 표하기 일쑤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들이 아프거나 어린이집이 쉬는 날엔 나 대신 아이들을 봐줄 사람이 없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 인간은 스스로를 먹여 살릴 수 있어야 하고, 사회는 언제든지 누구에게라도 그럴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한 인간으로 오롯이 설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면서 '현명한 어머니, 좋은 아내'가 될 수는 없다. 노라가 남편 앞에 당당히 서서, 또박또박 자신의 목소리를 내던 장면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내가 우선적으로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고 믿어요. 최소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거예요. 토르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신이 옳다고 할 거예요. 그리고 책에도 그런 비슷한 말들이 있죠.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말로 만족할 수 없고 책에 쓰여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어요. 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설명을 찾아야 해요. (118쪽) 

인형의 집

헨리크 입센 (지은이), 안미란 (옮긴이), 민음사(2010)


태그:#인형의집, #헨리크입센, #민음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