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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70대 노모와 40대 딸 3명 등 일가족 4명이 숨진 채 발견된 서울 성북구의 한 다세대 주택 출입문에 폴리스 라인이 설치돼 있다.
 3일 70대 노모와 40대 딸 3명 등 일가족 4명이 숨진 채 발견된 서울 성북구의 한 다세대 주택 출입문에 폴리스 라인이 설치돼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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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네 모녀 자살 사건',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 '탈북자 모자 아사 사건'.... 모두 생활고를 겪던 '여성들'이 다다른 죽음들이다. 마음이 아프다. 이들의 죽음은 정말 '자살'일까?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이 터졌을 때 야단법석이었다. 정부는 세 모녀 사후 복지 사각지대를 없앤다고 발굴 시스템을 만들어 운영해왔지만, '성북구 네 모녀 자살 사건'이나 '탈북자 모자 아사 사건'은 복지 사각지대 발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또한 그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경제 약자의 삶을 구제할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묻게 한다. 송파 세 모녀는 죽으며 유서에 이렇게 썼다. '정말 죄송합니다.'

괄목할만한 경제 성장을 이루고도 복지 수준이 여전히 열악해 가족이 복지 시스템인 한국에서, '성북구 네 모녀 사건'은 가족이라는 최소한의 안전망이 붕괴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다시 한번 경고하고 있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집단 혹은 개인은 자살이라는 극단적 수단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선택'이 아니다. 삶을 유지할 아무런 방도가 없는데, 죽음이 어떻게 선택이 된다는 말인가. 애초 가족이 없는 사람들의 삶은 두말할 것도 없을 터다.

초자본주의의 쓰나미가 밀려와 가족을 집어삼키는 이 마당에, 정부는 여전히 복지를 가족에게 전가시키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복지 시스템을 어떻게 손본다고 해도 선별적 복지엔 구멍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현재의 선별 복지로는 생활고로 이어지는 동반 또는 개인의 자살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기본소득'이 필요하다. 잘 살 건 못 살 건, 가족이 있건 없건, 젊건 늙었건, 누구에게나 똑같이 지급되는 기본소득이 필요하다.

세계는 이미 기본소득 실험으로 이슈를 모으고 있다. 알래스카는 유전 이익으로 생긴 이득을 모든 주민들에게 배당하고 있다. 큰돈이 아니어도, 어려운 삶의 고비는 넘을 수 있는 법이다. 기본소득으로 인해 삶의 위기를 넘어선 여러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다. 복지가 한국보다 안정된 핀란드에서도 기본소득 실험을 했다. 이 실험의 결과는 이런 진실을 알려 주었다. 기본소득이 있다고 게을러져 일을 안 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과 기본소득이 든든한 삶의 지지대가 되어 준다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여러 나라에서 기본소득 실험의 유의미한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다른 나라의 사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경기도와 서울에서도 청년들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했다. 물론 한시적이고 제한이 있기는 했지만, 이도 상당히 의미 있는 결과를 보여 주었다. 거주 요건만 충족한다면 모든 청년에게 조건 없이 지급했다는 면에서, 경기도 청년 기본소득이 기본소득의 본령에 보다 충실했다. 청년들이 기본소득을 받은 후의 변화는 훈훈했다. '밥다운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가족들에게 선물을 할 수 있었다. 돈 때문에 멀리했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여러 파트타임 중 한두 개를 그만두고 대신 자기계발을 할 수 있었다.' 든든한 부모를 둔 청년들에겐 시시한 일상일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떤 청년에겐 사람답게 살라고 사회로부터 처음으로 격려 받은 선물과도 같은 도움이었을 것이다.

청년 빈곤을 입에 올리자면, 이 사람이 떠올라 마음이 아프다. 시나리오 작가였던 그는 열심히 살았지만,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의 일은 쓰는 일이었다. 쓰는 사람이 쓰는 일 외에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게을러 죽었다는 비난을 들어서는 안 된다. 그는 죽는 날까지 썼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노동했다는 말이다.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 노동이라고 해서 노동이 아닌 것은 아니다. 시장에서 유효한 노동을 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최소한의 안정망이 있어야 한다.

한국처럼 '노오력'이 내면화된 나라도 없을 것이다. 모두 한결같이 아등바등 열심히 살고 있지만, 살림살이는 늘 팍팍하기만 하다. '새벽부터 일어나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삶의 역설은 놀라울 정도로 유구하다. 최소한, 가난이 노력하지 않아 초래한 결과가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면, 기본소득이야말로 각자도생이라는 온기 잃은 삶에 대한 대안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노오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삶의 역설을 정부는 언제까지 방관할 것인가.

기본소득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비책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아무 도움도 받을 수 없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사회가 적어도 '사람의 목숨은 똑같이 귀하다'는 데 아직 동의한다면, 기본소득에 주저할 이유가 없다.

기본소득을 언급하면 보통 이런 반응을 한다. "재원을 어떻게 확보한다는 거죠? 세금 더 내야 하잖아요. 그게 되겠어요?" 답은 물론 "된다"다. 안 될 이유가 없다. 기본소득은 기본적으로 없는 자들의 주머니를 털자는 제안도, 있는 복지를 없애자는 제안도 전혀 아니다. 재원을 확보할 방법은 많다. 한 마디로 재원 확보는 의지의 문제지, 실행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다.

우선 '탄소세'가 있다. 어마어마하게 배출되는 탄소에 세금을 매기자는 제안이다. 모두의 건강권을 침해하는 탄소 과대 배출에 지금껏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닌가? 또 하나의 방안은 '데이터세'다. '21세기 석유'라 불리는 데이터는 기업이 만들어내는 생산물이 아니다. 이용자가 막대하게 생성해낸 데이터를 기업이 대가 없이 독식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재원 확보 방법으로 '토지보유세'를 들 수 있다. 토지 또한 따지고 보면 철저히 공유물이다. 인류의 공유물이었을 대지가 어떻게 극소수에게 그렇게 압도적으로 편중되게 되었을까를 잠시만 곰곰 생각해본다면, 그 답은 철저히 권력의 결과 일터, 불로소득으로 얻은 토지 편익에 과세하는 것은 당연하다. 위의 재원 확보 방안은 모두 한 가지 가치에 기반한다. '모두의 것을 모두에게!'

이 밖에도 부자들에게 더 유리한 과세 제도를 혁파해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도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과세 얘기만 나오면, 서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없거나 적을 제도에 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이 할 걱정을 대신하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걸까? 이런 분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열심히 사는 당신,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미국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자 중에 '핫한' 사람이 있다. 앤드루 양이다. 그는 기본소득 1천 달러를 공약으로 내걸고 선전하고 있다. 그는 이미 집필한 책 [보통 사람들의 전쟁]으로 기본소득에 대한 이슈에 시동을 걸었다. 그의 기본소득 제안은 간단하다. 미국의 불평등한 구조는 이제 신이 와도 손볼 수 없으니, 기본소득으로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만들자는 제안이다. 한국보다 경제 우위인 미국에서 이런 화두가 왜 던져지는 걸까. 어느 나라고 예외 없이 신자유주의의 파고를 맨몸으로 넘기 어렵다는 반증 일터, 한국이야 말해서 무엇 할까?

나는 결혼한 지 20 여 년 동안 그림자 노동을 하고 있다. 평생 그림자 노동을 하고 살았지만, 내 노동의 가치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시장에서 유효하게 거래되는 노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래전 밥상머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나가는 말로, "하루 종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하는 데, 왜 내 노동의 대가는 없지?" 했더니, 초등생인 딸애의 반응이 이랬다. "엄마는 아빠한테서 받잖아." 충격과 비애가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딸에게 엄마의 가사 노동은 아버지로부터 대가를 지급받는 노동이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이렇게 딸에게 묻고 싶었다. "그럼 너에게 투여되는 노동의 대가는 누구에게 받는 게 마땅하겠니?" 물론 묻지는 않았다. 뼈 속까지 가부장인 나라에서 딸애가 발견했을 엄마의 초라한 노동의 가치를 어린 딸애를 다그친다고 무슨 소용있겠는가.

딸애의 계산과 달리, 내 재생산 노동은 철저히 국가의 이익에 복무한다. 내 그림자 노동이 있기에 남편이 가정사에 대한 걱정 없이 일하고, 그 결과 국가 경제에 기여한다. 내 딸 역시 내 그림자 노동이 있기에 근심 없이 학업을 이어갈 수 있고, 국가는 어떤 노력 없이 미래 인력과 미래 세수원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막대한 주부들의 재생산 노동에 대한 대가를 왜 국가는 지급하지 않는가?

여성이 오랜 시간 재생산은 물론, 생산 노동에 기여하며 국가 경제를 견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노동에 대한 대가는 언제나 전무하거나 박하기 짝이 없다. 왜 여성은 같은 일을 하고도 늘 남성보다 30프로를 적게 받는 걸까. 어째서 여성의 빈곤율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남성보다 앞서는 걸까. 국가는 이에 답해야 한다. 저 무고한 모녀들의 죽음에 대한 답을 국가는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 게시


태그:#성북구 네 모녀 사건, #송파 세 모녀 사건 , #기본 소득 , #탄소세, #데이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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