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05 18:13최종 업데이트 19.12.05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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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조선시대 '내시(內侍)'라 하면 왕의 곁에 서서 큰 키와 구부정한 허리, 수염 없는 하얀 민얼굴, 가늘고 가냘픈 체격에 중성적인 비음의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내시가 남성의 기능을 상실한 존재라는 선입견으로 인해 생긴 외형적 모습일 뿐이다. 실제 내시의 본질은 훨씬 더 복합적이다.

조선시대 내시는 주로 왕명을 전달하는 것에서부터 궁궐의 음식물을 감독하고, 궐문을 열고 닫고, 궁궐을 깨끗이 청소하는 등의 일을 하였다. 그렇다고 내시들의 교양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관리로서의 자질 향상을 위해 유교의 기본 덕목에 해당하는 사서(四書)와 소학(小學), 삼강행실(三綱行實) 등을 늘 배우고 매달 시험을 치르며 교양을 쌓았다.


그런 까닭에 내시들 중에는 궁궐의 삶을 바탕으로 경제적 부를 축적하여 큰 힘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권력의 흐름을 흔들기도 하며 양반 못지않은 유복한 삶을 누리기도 하였다. 조선의 마지막 내시 중의 한 명인 송은(松隱) 이병직(李秉直, 1896-1973) 또한 유력한 내시 집안의 후예였다. 이병직은 권력을 누리는 대신 서화가로 활동하는 한편 뛰어난 감식안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고서화와 골동품을 모아 수장가로서도 크게 이름을 날렸다.

해강 김규진의 제자가 되다
                

이병직 '묵죽' ⓒ 황정수

 
이병직은 1896년 강원도 홍천 출신으로 어려서 사고로 남성을 잃고 서울의 유명한 내시 집안에 양자로 들어온다. 그러나 궁중 생활은 얼마 하지 못한다. 1908년 내시제도가 철폐되자 궁 밖으로 나와 살면서 서화를 배우며 세속의 삶을 시작한다. 이병직은 19세 때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서화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의 문하에 들어가 1918년 '서화연구회'의 제1회 졸업생이 된다.

이때부터 이병직은 본격적인 서화가로 활동하는데, 초년에는 주로 김규진의 서화를 그대로 답습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래서 솜씨는 뛰어나나 독창적인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실제 이때의 작품을 보면 김규진의 솜씨 못지않은 필치를 보여주는 작품이 많다. 이때부터 호는 송은(松隱)이라 하였고, 당호로는 고경당(古經堂) 또는 수진재(守眞齋) 등을 사용하였다.

이병직은 20대에 조선미술전람회(아래 조선미전)에 수차례 출품하여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1923년 조선미전 2회와 1925년 4회에서 각각 '총죽도(叢竹圖)'로 4등상을 수상하여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밖에 3회, 4회, 5회, 6회, 8회, 9회, 10회 등에서도 입선을 하였는데 모두 대나무를 소재로 한 그림들이었다.

그림들은 대부분 김규진의 화풍을 그대로 닮은 것들로, 풍죽(風竹)·노죽(露竹) 등 다양한 종류의 대나무를 소재로 삼았다. 그 가운데서도 병풍 전체를 한 화면으로 삼아 굵고 힘찬 필세로 그려낸 총죽 묵죽화가 가장 돋보이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품은 짜임새 있는 구도와 필력을 필요로 하는 내용인데, 섬세한 성격의 이병직이 잘 소화하여 그려내었다.

이러한 그림 실력은 이병직의 타고난 학예 취향의 성격에서 나온 것이다. 그의 조선미전 활동기의 전성기였던 1920년대 후반 화단에서는 이병직에 대해 '이론과 실기를 모두 겸한 뛰어난 서화가'라 평할 정도로 그의 학문적 성향은 당시 독보적이었다.

이병직의 뛰어난 서화이론은 결국 김규진의 서화를 따라 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의 스승 김규진은 매우 힘찬 일필의 필치로 활달하게 화면을 구성하는 화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필법은 근본적으로 섬세한 성품의 이병직에게는 버거운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한 이후 그는 작품 세계의 변화를 꾀한다.

이병직의 새로운 미술 세계의 모색
 

이병직 '청죽' 두 점 ⓒ 황정수

 
1933년 스승 김규진이 세상을 떠나자 이병직은 그동안 유지해 오던 활달하면서도 재빠른 필치를 버리고 얌전하면서도 단정한 필치로 변화한다. 또한 그동안 주로 그려왔던 대나무 그림 일색에서 탈피하여 매화, 국화 등 여러 소재로 폭을 넓힌다. 또한 그동안 주로 먹으로만 그리던 것에서 벗어나 채색을 사용하여 단정한 구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글씨 또한 매우 단정한 해서를 사용하여 마치 여성의 필체 같은 느낌이 들게 하였다. 결국 태생적인 성품과 어울리는 화법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만들었다 할 수 있다. 이후 이러한 단정한 필법은 이병직의 상징적인 모습이 된다. 특히 이병직의 푸른 색 대나무 그림에 단정한 화제를 넣은 '청죽(靑竹)'은 이러한 그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를 꾀하게 된 계기는 영운(潁雲) 김용진(金容鎭)과의 만남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병직과 김용진은 본래 사제 관계는 아니었으나 김규진이 세상을 떠난 후 한 동네에 살며 자주 어울리며 영향을 받는다. 이병직의 국화나 매화 그림 등에 보이는 채색의 모습에서 김용진의 흔적이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용우에게 당한 이병직의 봉변

이병직은 내시 출신인데다 눈에 띄는 외모를 지녔으나 동호인들과의 만남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인맥이 넓어 본인은 김규진의 '서화연구회' 출신이었으나 라이벌 격인 안중식이 주도하는 '서화미술회' 출신들과도 자주 자리를 함께 하였다. 그들은 모이면 늘 술을 마시며 서화를 즐겼다. 특히 한 장의 종이에 여러 명이 함께 그리는 '합작도'는 모인 사람들의 우정을 확인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그렇게 회합을 즐기던 어느 날이었다. 역시 그날도 모인 사람들은 술과 함께 서화를 즐기기 위해 지필묵을 준비하였다. 그날의 좌장부터 시작된 붓질이 이병직에 이르렀다. 이병직은 화선지에 난초와 매화를 특유의 필치로 단정하게 그리고 다음 사람에게 붓을 넘겼다. 그런데 그의 뒤를 이어 붓을 든 이가 취하면 심한 주사를 부리는 것으로 유명한 묵로(墨鷺) 이용우(李用雨)였다.

마침 그날도 이용우는 술에 취해 장난기가 발동하였다. 이용우는 이병직의 그림 옆에 괴상한 춘화(春畵)를 그려 놓았다. 남성성을 상실한 이병직을 놀릴 요량으로 그린 것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나서 이병직에게 "이게 무엇인지 아느냐"고 놀리며 껄껄거렸다. 이용우의 괴벽을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웃지도 못하고 쩔쩔 매었고, 그 사이 화가 난 이병직은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고 한다.

서화 수집가와 감식자로서의 명성
 

이병직 '묵란', 한국사군자전(예술의 전당, 1989) 재촬영 ⓒ 예술의 전당

 
이병직은 서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서화 감식안으로도 유명하였다. 그는 큰 규모의 재산을 가진 유명한 부호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좋은 미술품을 많이 수장한 대수장가로서도 유명하였다. 그의 작품은 '고경당(古經堂) 소장품' 또는 '수진재(守眞齋) 소장품' 등으로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 훗날 이 작품들은 일제강점기 유명한 경매회사였던 경성미술구락부를 통하여 매매를 하며 소장품 규모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당시 이병직은 내시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재산이 많아 사람들 사이에 '쌀 7000석꾼'으로 불리던 큰 부자였다. 더욱이 이병직은 많은 재산을 바탕으로 경기도 양주 일대 등에 땅을 사면서 재산이 급속도로 늘기 시작했다. 한때는 수락산 인근에 '우우당(友于堂)'이란 별장과 땅도 소유했는데 대원군에게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가 살던 집은 종묘 옆 봉익동에 있었는데, 후에 창덕궁과 가까운 익선동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의 익선동 집은 본래 서화가 김용진의 집이었는데, 1930년대에 그의 집안에서 사들여 살기 시작하였다.

이곳이 훗날 요정으로 유명했던 종로세무서 앞 '오진암(梧珍庵)' 자리이다. 그가 새로 구입한 익선동 집에는 오세창(吳世昌)이나 장택상(張澤相) 같은 당대 유명 인사들이 그의 사랑방을 드나들었다. 말년에는 익선동을 떠나 연지동에 거주하였다.

그의 소장품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현재 국보로 지정된 일연(一然)의 책 '삼국유사(三國遺事)'이다. 또한 이승휴(李承休)의 역사책 '제왕운기(帝王韻紀)'도 이병직 소장품이었다. 이밖에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와 난초 그림,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산수화 등 주옥같은 많은 작품들이 그의 손에 있었다.

이 중 이병직이 가장 애지중지한 유물은 '삼국유사'다. '삼국유사'는 평양 출신의 서지학자 이인영(李仁榮)이 갖고 있던 책이었다. 그가 해방 후 서울에 이주하여 살면서 생활이 어려워지자 1948년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를 내놓았다. 이병직은 거금 75만 원을 주고 샀는데, 이 돈은 기와집 수십 채를 살 거금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좋은 물건을 사는 데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소장했던 미술품에는 대부분 그가 소장했었다는 내용의 '배관기(拜觀記)'가 적혀 있다. 글씨는 누구누구의 '진품(眞品)' 또는 '신품(神品)' 등으로 적고, 인장은 '송은진장(松隱眞藏)', 또는 '수진재진장(守眞齋眞藏)' 등으로 찍었다. 이러한 배관의 흔적은 주인의 명성에 따라 작품의 보증서가 되기도 한다. 근래에 이병직의 배관이 있으면 어느 정도 '진품'이라 인정할 만큼 그의 감식안은 정평이 있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교육자 이병직

이병직은 요즘의 재벌이라 할 만한 큰 부자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풍요로움을 자신 가족만을 위해 쓰지는 않았다. 그는 늘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아마 자신이 내시 출신이라 자식이 없어 후대를 보지 못하는 한을 풀려는 뜻이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그런 뜻이었는지 중년부터 이병직은 자기의 재산을 풀어 학교를 세우는데 온 힘을 기울인다.

1937년 이병직은 경기도 양주 광적면 효천리에 초등학교를 지으려 허가를 신청한다. 얼마 후 학교의 인가가 나오자 그는 학교 부지를 대고 건물을 지어 무상으로 기증한다. 그가 이곳에 학교를 세우려 한 것은 조선중기 이후 200여 년 동안 집안사람들이 터를 이루고 산 곳이기도 하고, 집안의 선산이 있는 고향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1939년에는 현재의 의정부중고등학교 전신인 양주중학교를 설립하는데 자신의 전 재산의 대부분인 40만 원을 흔쾌히 내어 놓는다. 그는 이후에도 학교의 교실을 증축하고 교사를 이전할 때마다 돈을 대었고, 운동장을 넓히는 데에도 지속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기부한다.

이러한 이병직의 학교 설립에 대한 의지는 다른 부자들의 경우와는 달리 순수한 면이 많았다. 그에게는 피로 맺은 자식이 없기 때문에 학교를 소유하려는 욕심이 적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학교를 설립한 후에는 훗날 모두 국가에 귀속되는 공적 소유가 되었다. 마치 그의 기부는 내시 제도가 없어지자 내시로서 축재한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것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세상이 바뀌자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육영사업을 한 것은 현대인들도 실행하기 힘든 건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모범처럼 보여 우러러 보이는 면이 많다. 그런 면에서 이병직은 단순한 서화가나 고서화 수집가라는 통속적 명칭보다는 훌륭한 육영사업을 한 지성인으로 평가해도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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