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19 15:48최종 업데이트 19.12.19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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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미술계의 예술가들 중에서 활동이 많았으나 이름만 존재할 뿐, 삶의 행적이나 작품 활동의 흔적이 잘 나타나지 않는 이들이 많다.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를 살다 간 동양화가들이 그렇고, 도쿄미술학교 등 일본에 유학한 서양화가들도 제법 많았으나 행적을 거의 알 수 없는 이들이 많다. 그밖에 공예, 서예 부분의 작가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유독 사진가들 중에 미술계에서 잊힌 작가들이 많다. 광학 기계를 사용한다는 면에서 전통적인 예술과 차별되는 점이 많아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시기가 늦었고, 그들이 제작한 작품이 미술품으로서 대접받는 시기도 가장 늦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일부 저명한 사진가들을 제외하곤 다수의 여러 근대 사진가들이 예술가로서 진정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서예가, 전각가일 뿐 아니라 뛰어난 사진가이기도 했던 하연(何延) 정해창(鄭海昌, 1907-1968)은 근래에서야 그의 사진가로의 빼어난 업적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해방 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용한 최초의 유물 담당 사진가로 활동한 걸출한 사진가였던 정관(正觀) 이건중(李健中, 1916-1979)도 많은 활동을 하였음에도 거의 행적이 알려지지 않은 불행한 작가 중의 한 명이다.

젊은 시절 이건중의 활동
                       

이건중(왼쪽)과 김재원 ⓒ 이건중

 
정관 이건중은 1916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러다 원주공립보통학교 고등과에 입학하여 1932년 졸업한다. 졸업 후 할 일을 찾지 못하던 그는 뜻한 바 있어 1935년에 사진가 이근우(李根雨)가 운영하던 '제일인상사진연구소'라는 곳을 찾아가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다. 이후 1937년까지 5년간 열심히 사진을 배운다. 

사진연구소를 수료한 후 그는 한국에서 자리 잡지 못하자, 1937년 만주로 넘어가 그곳에서 활동을 하며 뛰어난 성과를 이룬다. 그때 마침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모란강성 일본군 692부대가 전쟁에 참여하는 장면을 찍는 사진사로 종군을 한다. 이때의 일은 이건중 스스로 늘 부끄럽게 생각하는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계속 만주에서 활동하다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서울로 온다. 

마침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이름을 바꿔 국립중앙박물관이 되자 유물을 찍을 사진 기사를 찾는다. 일제가 관리하던 그동안은 일본인 사진가들이 작품 사진을 찍어왔었다. 박물관 측은 이건중에게 박물관에서 일할 것을 제안한다. 이때 그를 천거한 이가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던 김재원(金載元, 1909-1990)이었다. 그는 독일에서 공부한 최고 인텔리 학자였는데, 이건중의 실력을 듣고 초빙한 것이다. 한국인 최초의 박물관 유물 담당 사진가의 출발이다.

그는 주로 유물 사진과 발굴 현장을 찍었는데, 이때의 경험은 훗날 사진가로서 활동하며 작품 구상을 하는데 많은 영감을 준다. 그는 중요한 유적 발굴에 참여하여 많은 출토 장면과 유물들을 찍었다. 1946년에 있었던 광복 직후 한국인에 의해 주도된 최초의 유적 발굴조사였던, 유명한 경주 호우총(壺杅塚) 발굴도 이건중이 직접 참여한 행사였다. 

이 발굴에서는 음식을 담는 뚜껑 달린 청동 그릇인 '청동호우(靑銅壺杅)'가 출토되어 화제가 되었다. '호우총'이라는 무덤의 이름도 이 그릇에서 따온 것이다. 이 호우에는 뜻밖의 명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고구려 415년에 광개토대왕을 위하여 만들었다(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명문의 글씨체가 중국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에 쓰인 것과 같아,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교섭이 활발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 되었다. 

이후에도 이건중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행하는 유적 조사가 있을 때마다 유물을 찍는다. 1947년 이홍직, 김원룡 등이 중심이 되어 개성에서 고려시대 고분벽화 '십이지신상'을 발굴하였을 때에도 이를 찍은 사진가는 이건중이었다.

그는 또한 일반 사진계의 일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1946년에는 대한사진예술연구회 연구부 간사와 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48년에는 서울시경 감식사진 담당기사로도 활동하였다. 

6.25 전쟁 후 사진가로서의 활동
 

이건중 '탑골공원' ⓒ 이건중

 
6.25가 터지자 이건중은 남하하여 대구에서 국방부 보도과 사진대원으로 종군한다. 이미 젊은 시절 종군 경력이 있었는데, 조국의 전쟁으로 또 다시 종군하는 운명을 맞는다. 9.28 서울 수복 때에도 직접 참여하여 보도하기도 한다.

전쟁이 끝나자 1953년 종로 3가에 '이화사진연구소'를 설립한다. 본격적인 개인 사진가로서의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또한 서울사우회를 설립하여 회장에 취임하고, 동방사진문화회관에서 창립전을 연다. 그리고 1955년에는 한국미술협회 창립회원으로 참여한다. 

1960년부터는 문공부 사진부에 계장으로 들어가 공무용 사진을 찍는다. 크고 작은 나라의 행사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근영(近影)을 찍는 일이 그의 일이었다. 이때 찍은 사진 중 당시 대통령 이승만과 부인 프란체스카 등을 찍은 것이 여러 장 남아 있다.

이 시기에 찍은 사진 중에 인물이나 행사 사진 외에 서울 풍경을 찍은 것들이 꽤 있다. 인왕산에 올라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거나 경무대 뒤 백악산에 올라 찍은 사진들은 시선이나 구도가 탁월한 풍경 사진들로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1964년부터는 서울여자대학 강사를 하였으며, 1964년부터 연 4회 국전심사위원을 지냈다. 1965년에는 파월국군 위문시찰 작가단의 일원으로 모윤숙 등과 함께 2달간 다녀온다. 1966년에는 국전심사 분과위원장을 역임하였고, 그 외 국제동아사진싸롱의 심사를 연속 5년간 지속적으로 맡기도 하였다. 이후 열리는 수많은 사진 관련 행사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다. 한국사진협회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연구소 활동과 13번의 개인 전시회

이건중의 사진 활동은 주로 자신의 연구소에서 진행되었다. 그의 연구소는 종로 지역의 서린동, 저동 등에 '이화사진연구소'나 '이건중사진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있었다. 당시 주로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경무대의 일을 맡아 하다보니 멀지 않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점차 경제적인 문제로 성북구 삼선동으로 이동하였다가 말년에는 성북구 하월곡동으로 이전한다.

그는 개인전이나 단체 사진전을 많이 열었는데, 개인전만도 모두 13회를 열었다. 1953년에 첫 전시회를 연 이후 1976년 환갑 기념으로 전시회를 할 때까지 모두 13번이나 되었다. 거의 매해 전시회를 열다시피 하였다. 당시 사진가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그의 활동이 많았고,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이야기도 된다. 전시 장소도 미도파 화랑, 동화백화점화랑, 중앙공보관화랑, 예총화랑, 문예진흥원미술관화랑 등 유명한 곳들이었다.

그의 평생 작업은 1978년 열화당에서 <한국의 멋>이라는 화집으로 묶인다. 한동안 사진계에서 멀어져 지내는 이건중을 위해 당시 안과의사로 유명했던 공안과의 공병우(公炳禹, 1906-1995) 박사가 후원하여 이루어졌다. 공병우는 의사였지만 한글 타자기를 발명하기도 하고, 사진작가로도 활동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이건중의 사진 작품 세계
 

이건중 '백자와 불두'와 '신라 토기' ⓒ 이건중

 
이건중의 사진 작품은 현재 500여 점 이상이 남아 있다. 그의 작품들은 초기 근대 사진가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아카데믹한 풍경이나 인물 사진에서부터 상업광고 사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많은 사진가들이 당대에 출력된 사진이 많이 망실된 것에 비해 이건중의 사진과 자료들은 대부분 옛적에 제작한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주요한 지점에 있는 것 중 하나는 역시 문화재와 관련된 사진들이다. 그는 국립중앙박물관 유물사진가 시절부터 미술품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찍었다. 단순히 자료를 남기기 위한 기록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진작가로서 미술품에 생명을 불어 넣듯 화면 속에 재구성하여 뛰어난 미술품을 만들어내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박물관의 전시장 틀에서 벗어나 고궁이나 전국의 사찰 등의 문화재에도 관심을 보인다. 경복궁의 건물이나 세부 단청들, 경주 불국사에 있는 문화재 등이 모두 그의 피사체가 되었다. 그의 문화재 사진은 특별한 기교를 부리려 노력하지 않고 담백하게 보이도록 구성한다. 지나치게 화려한 문화재의 모습보다는 주로 담담한 느낌을 주는 평범한 유물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 노력하였다. 무기교의 기교라 할까. 그래서인지 그의 사진은 매우 순수해 보인다.
 

이건중 '팔판동에서 본 경복궁' ⓒ 이건중


두 번째로 관심을 가질 만한 사진은 풍경 사진들이다. 서울의 풍경이나 시골 농촌 풍경을 포착한 사진 또한 그의 능력이 잘 발휘되어 있다. 서울 풍경은 주로 오래된 지역이나 특이한 건물을 중심으로 포착하고 있다. 특히 남산 쪽에서 찍은 명동 주변의 사진이나 경복궁, 서촌, 북촌 지역을 찍은 사진, 인왕산이나 북한산 연봉을 찍은 사진은 그의 역량을 가늠케 할 만큼 뛰어난 솜씨를 보인다.

마지막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며 다가온 상업적인 사진들이다. 주로 화보나 광고로 사용되는 것들이다. 한복 입은 예쁜 여성들에서부터 여성의 누드 사진에 이르기까지 그의 셔터는 정직하기 이를 데 없다. 기계적인 장점을 충분히 구사하면서도 예민한 감성을 주관적으로 잘 해석하는 그의 사진에는 다른 작가들의 사진에서는 보기 쉽지 않은 자연스러운 향기가 있다.

필자는 그가 평생 작업한 사진 수백 점을 한 점 한 점 보며, 평생을 예술가로서 진지하게 살아온 한 인물에 대해 경외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만큼 그의 사진가로서의 자세는 철저했고, 작품 세계는 다양하였으며 각기 다른 종류의 사진에 모두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이제까지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 이제 그의 이름을 되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역시 '예술가'는 '작품'으로 이름을 남긴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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