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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이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였다면 올해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 있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에 이어 이번에는 '현충원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서울현충원 4·3길 – ②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길 – ③서울현충원 5월길 – ④서울현충원 친일파길 – ⑤서울현충원 전직대통령길 – ⑥서울현충원 평화·통일길 - ⓻서울현충원 여성길

국가유공자묘역은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외교·안보·과학 분야에서 국가 발전과 민족 번영을 위해 몸 바친 국가유공자를 모신 곳으로 제1, 제2, 제3묘역으로 나뉘어 조성돼 있다. 이곳 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묘역에는 총 68위의 국가유공자 중 이태영 박사, 김현숙과 이영희 등 3위의 여성이 안장돼 있다.

한국 최초의 여성 법조인, 이태영(1914-1998)
  
이태영은 한국 최초의 여성 법조인으로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세우고 여성에 대한 불평등과 인습에 맞서 싸운 인물로 유명하다.
▲ 이태영 박사 - 정일형 박사 묘 이태영은 한국 최초의 여성 법조인으로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세우고 여성에 대한 불평등과 인습에 맞서 싸운 인물로 유명하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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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공자 제1묘역에는 '이태영 박사·정일형 박사 묘'가 있다.

이태영은 한국 최초의 여성 법조인으로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세우고 여성에 대한 불평등과 인습에 맞서 싸운 인물로 유명하다.

함께 안장돼 있는 남편 정일형(1904~1982)은 2~8대 국회의원과 신민당 총재권한대행을 역임한 야당 정치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는 1919년 평양 광성학교 재학 중 3.1만세운동 참여는 물론 재미유학생회, 흥사단, 수양동우회 등에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해 총 5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한 독립운동가였다.

이태영은 평양정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 이화여전 가사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평양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중 정일형 박사와 결혼했다. 

이태영에게는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따라 붙는다. 결혼 이후 감옥에 간 남편 정일형의 옥바라지를 위해 삯바느질에 누비이불장수, 행상을 하면서 혼자 생계를 꾸려야 했던 이태영이 '여성 최초'의 타이틀을 처음으로 얻는 것은 여성도 법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열린 해방 이후의 일이었다. 1946년 네 자녀를 둔 서른둘의 나이에 여성 최초로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고, 6년 뒤인 1952년에는 여성 최초로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하지만 '여성 최초의 판사'라는 지위는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여자는 아직 시기상조이니 가당치 않다"는 쪽지를 붙여 이태영의 임용을 거부함으로써 좌절되고 말았다. 시보 이태영이 당시 대법원장이던 김병로에게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김병로가 이승만을 면담해 설득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야당집 마누라를 판사 자리에 앉혀 놓았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당시 야당 정치인으로 있던 정일형의 아내라는 점이 중요한 임용거부 사유였던 것이다.

결국 이태영은 한국 최초의 여성변호사가 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덕분에 한국 최초의 여성판사는 2년 뒤인 1954년 판사에 임용된 황윤석(1929~1961)으로 남게 되었다.
  
이태영은 1952년 변호사 개업과 동시에 여권신장을 위한 활발한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1948년에 구성된 법전편찬위원회의 구성원 60명 중 여성은 단 한명도 없다는 모순성을 지적하며 1952년 여성단체들이 시정을 요구하는 진정을 할 때도 진정인 대표의 한명이었다.
▲ "여자위원 왜 없소"(1952. 11. 28, 동아일보)  이태영은 1952년 변호사 개업과 동시에 여권신장을 위한 활발한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1948년에 구성된 법전편찬위원회의 구성원 60명 중 여성은 단 한명도 없다는 모순성을 지적하며 1952년 여성단체들이 시정을 요구하는 진정을 할 때도 진정인 대표의 한명이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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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영은 남녀간의 불평등을 가정에서부터 개혁하기 위해 변호사로 개업한 1952년부터 각종 청원과 진정 등을 통해 가족법개정운동을 시작했다. 1956년에는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전신인 여성법률상담소를 여성문제연구원 부설기관으로 세웠다. 불우하고 소외된 여성들을 위한 법률구조기관인 이 상담소는 1966년 8월에는 (사)가정법률상담소로 발전하면서 여성뿐 아니라 남녀 모두의 권익을 위한 인권기관이 됐다. 1976년에는 한국가정법률상담소로 다시 이름을 바꿔 공익법인으로 거듭났다.

이태영이 시작한 가족법개정운동은 1989년에는 이혼여성의 재산분할청구권을 인정하고, 모계·부계 혈족을 모두 8촌까지 인정하도록 하는 결실을 봤다. 2005년에는 호주제 폐지로 이어졌다.

이태영은 1969년 55세의 나이에 서울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63∼1971년에는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법정대 교수 겸 학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태영은 박정희 유신독재의 광풍에 맞서는 민주회복 국민선언(1974. 11. 27.), 3.1 민주구국선언(1974. 3. 1.) 등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에 여성계를 대표해 적극 참여하는가 하면 세계여성법률가협회 부회장(1958~1971)을 맡는 등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도 보여줬다.

그가 1971년 법을 통한 세계평화상을 비롯해 막사이사이상(1975), 유네스코 인권교육상(1982), 세계감리교 평화상(1984), 국민훈장 무궁화장(1990) 등을 연이어 수상한 데에는 여성해방운동과 민주화운동 등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이 무던히도 높았던 이태영은 여든한 살인 1995년에야 가정법률상담소 소장직을 마치고 퇴임했다. 

이태영은 <가정법률상담실기>(1958), <여성을 위한 법률상식>과 <한국이혼연구>(1969), <북한의 여성생활>과 <여성으로 태어나서>(1991), <가족법개정운동 37년사>(1992) 등의 저서도 남겼다.

끝내 별을 달지 못한 여군 창설의 주역, 김현숙(1915-1981)
 
한국 여군으로서는 최초로 대령으로 진급했는가 하면, 초대 여군처장으로 전역하기까지 여군 창설과 발전의 주역으로 활약한 김현숙은 국가유공자 제3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 김현숙의 묘 한국 여군으로서는 최초로 대령으로 진급했는가 하면, 초대 여군처장으로 전역하기까지 여군 창설과 발전의 주역으로 활약한 김현숙은 국가유공자 제3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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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군으로서는 최초로 대령으로 진급했는가 하면, 초대 여군처장으로 전역하기까지 여군 창설과 발전의 주역으로 활약한 김현숙은 국가유공자 제3묘역에 안장돼 있다.

1940년에 성립한 한국광복군에도 여군이 있었지만, 이들은 한국 여군의 모체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1948년 이후 사회적 혼란기에 조직된 중등학교 이상 학도호국단의 교련교사로 양성된 여자배속장교가 한국 여군의 모태 역할을 대신했다.

당시 정부는 중등학교 이상 학교에 학도호국단을 조직하고, 이를 지도할 교련교사를 육성하기 위해 전국 중고교와 대학의 체육교사를 대상으로 '배속장교 양성반'을 설치 운영했다. 이때 배속장교 3기는 여학교와 여자대학교의 학도호국단 간부를 훈련시킬 교관요원 양성을 목적으로 전원 여자로 구성됐는데, 1949년 3주간의 '여자청년호국대지도자 훈련'을 마친 32명이 그해 6월 30일부터 1개월간 배속장교 제3기 교육을 거쳐 7월 30일자로 육군예비역 소위로 임관했다.

이들의 훈련을 담당한 훈련대장이 바로 김현숙 초대 병과장이었다. 이때 배출된 여자배속장교 중 김현숙을 비롯한 박을희·현성원 등 11명이 초창기 여군 창설의 주역이 됐다.

김현숙보다 먼저 간호장교로 임관된 최초의 여군도 있었다. 1948년 5월 1일 제1육군병원(당시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위치)이 창설된 후 군병원에 필요한 전문 간호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면허를 소지한 간호사를 간호장교로 임관시켰다. 이때 김감은을 비롯한 31명이 소위로 임관했다. 이들 31명 중 12명은 임관 즉시 제1육군병원에 배치됐고, 나머지 19명은 미 제382후송병원에서 3개월의 군사훈련과 실무교육을 이수한 후 제2⋅제3육군병원에 각각 배치됐다(<국방여군 60년사>, 육군군사연구소).

평양출신으로 1934년 일본 동경 체육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강동여자중학교 체육교사로 근무한 김현숙은 해방 이후인 1946년 5월 여경훈련소 교관으로 한국 여자경찰 창설에도 기여했다. 1949년 7월 여자배속장교 사감을 거쳐 예비역 소위로 임관되면서 본격적인 여군의 길을 걸었다.

중앙 학도청년훈련소 교관으로 있으면서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 당시 참전해 생포된 여자 빨치산의 전향 공작을 담당하던 김현숙은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여자의용군 모집을 건의해 관철시켰고, 1950년 9월 1일 육군 제1훈련소 안에 여자의용군 교육대를 창설해 초대 교육대장으로 취임했다. 

이 교육대에서는 여자배속장교 출신들을 교관으로 하여 여자의용군 1·2기 874명을 양성했다. 이들은 전쟁기간 동안 국군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김현숙은 1950년 10월 23일부터 현역에 정식 편입돼 활동했다. '국군의 누나'로 통하면서 1951년 11월에는 육군본부에 여군과가 창설되면서 여군과장이 됐다. 이후 편제 개편에 따라 여군부장으로 있으면서 1955년 7월 여군훈련소(서울 용산)를 창설하고 초대 소장을 겸했다. 1960년 9월 초대 여군처장으로 전역하기까지 여군 창설과 발전의 주역으로 활동했지만, 1953년 3월 대령으로 진급한 이후 끝내 장군으로 진급하지는 못한 채 예편했다.
 
김현숙은 예편 후 공화당 부녀분과위원장을 거쳐 제8대 국회의원 선거(1971)에서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면서 정치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묘비에 '전국회의원 김현숙의 묘'라고 씌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 김현숙의 국회의원 당선 소식을 알리고 있는 동아일보 기사(1971. 5. 27) 김현숙은 예편 후 공화당 부녀분과위원장을 거쳐 제8대 국회의원 선거(1971)에서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면서 정치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묘비에 "전국회의원 김현숙의 묘"라고 씌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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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편 후에는 공화당 부녀분과위원장을 거쳐 제8대 국회의원 선거(1971)에서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면서 정치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묘비에 '전국회의원 김현숙의 묘'라고 적혀 있는 이유기도 하다.

최초의 여성 장군은 김현숙이 전역한 지 42년이 지난 뒤에야 탄생했다. 간호병과에서 양승숙이 2002년 1월 1일자로 준장 계급을 달면서 여성 장군 시대가 비로소 열렸다.

한복 패션계의 거목, 이영희(1936-2018)
  
‘바람의 옷’을 만들었다는 찬사와 함께 ‘색의 마술사’로 불리기도 한 한복 패션계의 거목 이영희는 국가유공자 제3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의 묘 ‘바람의 옷’을 만들었다는 찬사와 함께 ‘색의 마술사’로 불리기도 한 한복 패션계의 거목 이영희는 국가유공자 제3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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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의 바늘과 실타래가
무명과 비단의 지도 위에서
하 세월 길을 묻고
힘겹게 길을 열더니
이제는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는 문화의 끈이 되었더라


 
'바람의 옷'을 만들었다는 찬사와 함께 '색의 마술사'로 불리기도 한 이영희의 묘비에 새겨져 있는 김남조 시인의 시구다. 한복 패션계의 거목 이영희는 국가유공자 제3묘역에 안장돼 있다.

대구 출신으로 결혼과 함께 전업주부로 지내던 이영희가 한복 디자인 일을 시작한 것은 나이 마흔 살이던 1976년의 일이다. 부업으로 솜과 이불을 팔며 남은 실크로 한복을 지어 입었는데, 그 능력이 소문으로 퍼지면서 주변의 권유를 받았던 것.

이영희는 이듬해인 1977년 '이영희 한국의상'을 열었다. 1983년에는 백악관 초청 미국 독립기념 패션쇼를, 1986년에는 한‧불 수교 100주년 기념 패션쇼를 열었다. 47세부터는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염직공예학을 공부하며 천연염색의 색감을 한복에 접목시키기도 했다.

이영희가 전 세계 패션계에서 명성을 얻은 것은 1993년 프랑스 파리 프레타포르테 패션쇼에서였다. 당시 이영희가 출품한 작품은 다양한 색감으로 이루어진 치맛자락을 저고리 없이 드레스처럼 선보여 한복이 원색의 옷이란 고정관념을 깨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당시 <르 몽드>의 수석 패션기자 로랑스 베나임으로부터 '바람을 옷으로 담아낸 듯 자유와 기품을 한 데 모은 옷'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영희가 한복의 세계화를 위하여 개량한복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87년이었다.
▲ "한복이 "세계 옷"되는 그날까지..."(1996. 4. 1, 경향신문) 이영희가 한복의 세계화를 위하여 개량한복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87년이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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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는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패션쇼를 열었고, 2001년에는 평양에서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2004년에는 뉴욕에 이영희한국문화박물관을 개관했다. 2005년에는 한국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 당시 각국 정상들에게 한복을 선물하기도 했는데, 바로 이영희의 작품이었다. 2007년에는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12벌의 한복을 영구 전시했고, 2008년에는 구글(Goole) 아티스트 캠페인에 '세계 60인의 아티스트'로 선정됐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는 전통 한복을 현대적인 감성으로 재해석해 디자인한 공연 의상을 내놓는 등 한복의 현대화와 세계화에 기여해 한국의 대표적인 디자이너로 자리 잡게 됐다.

'색의 마술사'로 불리기도 한 이영희는 2018년 5월 18일 8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이영희 한복 디자이너가 한복 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한 점을 기려 2018년 10월 15일 열린 '2018한복문화주간' 개막식에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현재 프랑스 파리의 기메박물관(국립동양예술박물관)에서는 이영희가 남긴 한복 작품으로 <이영희의 꿈-바람과 꿈의 옷감>이라는 이름의 특별 기증전이 열리고 있다. 지난 12월 4일부터 시작돼 내년 3월 9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회는 1993년 파리의 패션쇼에서 발표한 이영희의 '바람의 옷-한복'을 비롯해 이영희가 평생 디자인한 한복과 조각보 등 300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곧 서울현충원 여성길⑤(전직 대통령묘에 안장되어 있는 영부인들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태그:#현충원, #국가유공자묘역, #여성길, #이태영, #김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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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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