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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현 전적지
▲ 들판 황토현 전적지
ⓒ 허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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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군 지휘부는 황토현의 전략적 위치를 훤히 꿰고 있어서 이곳을 첫 접전지로 잡았다. 그리고 관군을 황토현으로 유도하여 싸움판을 벌였다. 다시 기꾸지의 기록이다.

황토현의 서남쪽은 두승산 줄기에 이어진 깊은 계곡 지대로 계곡을 사이에 두고 시목리가 있어서 양군의 진영은 부르면 대답할 수 있는 대치 상황이었다. 관군은 판단을 잘못하여 그날 밤 완전히 무장을 풀어버려 마치 개선한 밤의 잔치와도 같이 잠과 환호 그리고 술자리를 베푸는 등 편하게 지냈다.

때는 바로 3경(更)이 지나고, 3월 7일 잔월(殘月)은 이미 사자봉의 서쪽에 지며 밤이 깊어 가는데도 경비를 서는 군사는 한 명도 없었다. 동학군은 두 부대로 나누어 앞의 부대는 서남쪽 정면으로, 뒷 부대는 동북쪽의 뒷 진영을 기습하기로 하였다. 모든 군사는 창과 검을 가지고 밭두둑에 엎드려 전진하였고, 지름길로 천천히 소리를 죽이고 진격하였다.
 
황토현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우측 부조.
 황토현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우측 부조.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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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이 관군의 진영에 도착하였고 보부상은 편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관군은 동학군의 습격을 받고서도 순찰하는 보부상으로 여겨 별도로 저지하지 않았다. 동학군은 황토현의 높은 고지에 도달하자, 비로소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돌격하고 종횡으로 습격하였는데 관군은 전혀 뜻하지 않던 습격을 받았기 때문에 군대 형태를 만들 틈도 없이 패배하였다. 당시 관군을 따라갔던 보부상의 객주(客主)로 지금까지 살아있는 한 사람이 그날 밤 패배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나에게 이야기했다.

"4월 6일 아침, 고부를 떠나 징집된 마을 사람들과 함께 고생스럽게 군량을 운반하였다. 비가 온 뒤라 수레와 짐을 실은 말의 행진이 생각과 같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커다란 짐만을 챙겨서 진군을 하였다. 두승산 동쪽의 장거리(長距里)에서는 좁은 계곡길을 더듬으며 진군하였는데, 길은 좁았고 비탈길은 고르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군사는 매우 원기왕성하여 행진 중에도 노래를 부르고 크게 소리를 지르는 등 왁자지껄하였다.

여러번 휴식을 취하면서 저녁 무렵 황토현에 도착하였다. 그 뒤 곧바로 짐을 풀고는 진지의 막사를 만들었으며 각 부대, 각 군단의 작은 진지를 각소에 만든 뒤 밥을 하였다. 모두 배가 고파 저녁밥을 달라고 크게 소리쳤는데, 장교 한 명과 10여 명의 군사가 마련한 소고기와 술을 먹고는 모든 군사가 원기를 회복하였으며 술잔치를 열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둔한 동학사람들은 모두 나무껍질을 먹고 계곡의 물로만 배를 채워 당장 내일은 길도 걷지 못할 것이라고 비웃었다.

이러한 유희에 빠진 전쟁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날 밤 처음에는 경계를 하였다. 그러나 동학군의 진영이 완전히 고요하여 불빛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안심하고 그 뒤부터는 술을 마셔 취하고 노래와 춤을 추다가 깊이 잠이 들었는데 나도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한밤중에 적이 습격해 온다는 커다란 부르짖음에 잠이 깨었는데, 이리 저리 도망하는 사람, 엎어지는 사람, 울부짖는 사람, 엎드린 사람, 숨는 사람 등 진영의 주위에는 죽은 시체가 쌓여있었다.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군.
▲ 동학혁명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군.
ⓒ 홈페이지 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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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000명 가량의 관군 가운데 무기를 가지고 대적한 사람은 매우 적었고, 나머지는 않아서 칼을 맞거나 자다가 죽는 등 그 패배의 모습은 매우 참혹하였다. 나는 황토현 북쪽 소나무 숲에 몸을 숨기고 겨우 지름길을 더듬으며, 백산 서쪽 해안까지 갔다가 배를 타고 아산 쪽으로 도망하여 목숨을 건졌다.

왜냐하면 동쪽으로 도망한 사람들은 동학군의 별동대에게 습격당하였고 또 곳곳에 수리의 작은 샛강이 있어서 그냥 건널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7일 동트기 이전까지 대개가 살해되었는데, 이 싸움에서 나의 동료 보부상은 70~80명 가량이 전사하거나 살해되었다. 관군은 다수의 군기를 버렸고 대포 2문도 퇴각시켰으며 쌀 100석을 잃었다."

황토현의 야간 습격은 동학군이 각 지역에서 벌인 전투 중 가장 혁혁한 큰 싸움이었다. 동학군 측의 기록에 의하면, 야간 습격하던 날 밤, 관군 장교의 막사에는 납치되었던 여러 명의 젊은 여자들이 울부짖다가 도망하는 것을 보았으며, 또 관군의 옷 속에서 여러 번 약탈품을 찾아냈는데, 당시 관군의 약함은 저항하지도 못하는 닭이나 돼지와 같은 상황이었다고 비난하였다. (주석 14)

 
정읍 황토현 전적지에 세워진 동학혁명기념탑. 동학농민혁명의 구호였던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이 새겨져 있다.
 정읍 황토현 전적지에 세워진 동학혁명기념탑. 동학농민혁명의 구호였던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이 새겨져 있다.
ⓒ 권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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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현 전투는 이렇게 전개되고 동학농민군의 큰 승리로 끝났다. 당연히 동학군의 사기가 충천하게 되고 관군의 처지는 말이 아니었다. '의기(義氣)' 하나만으로 구성된 오합지졸의 농민봉기군이 훈련된 관군과 싸워 이긴 것은 흔치 않는 일이었다. 신라 후대 이래 발생한 각급 민란이나 농민봉기는 대부분 농민들의 희생으로 마무리 되었다.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1천여 명이 사상되었다고 하였다. 또 『동비토록』에는 사망자가 200여 명이라고 축소되었다. 사상자 숫자는 정확한 통계가 나와 있지 않다.

일설에는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 측은 642명이 전사하고 부상자는 63명, 농민군 측은 6명이 전사하고 부상자는 27명이라고 하지만, 그게 과연 정확한 통계인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주석 15)

 
황토현 전적기념관 전봉준 장군 동상.
▲ 황토현 전적기념관 전봉준 장군 동상. 황토현 전적기념관 전봉준 장군 동상.
ⓒ 최장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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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수치는 아닐지 모르지만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의 희생과 농민군의 희생은 10분의 1 이상의 차이가 있었다. 첫 접전에서 농민군이 대승을 하게 된 데는 지휘부의 전략이 주효하였다. 황토현 지역의 지형을 잘 알고 적절히 대처했던 것이 승리의 요인이었다. 여기에 오합지졸이지만 사기가 넘치고, 무엇보다 수백 년 동안 짓밟히고 억눌려왔던 '한풀이' 장이 되었다.

농민군은 신바람이 났고, 여기에 '광제창생' '척왜척양'의 대의명분이 주어졌다. 창고가 열리면서 배고픔이 해결되고, 주위의 농민들이 밥을 지어오면서 더러는 막걸리동이도 나왔을 것이다. 동학교도들에게는 '개벽'의 날이 오는 것으로, 농민들에게는 배불리 먹고 압제가 없는 '새날'이 오는 것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주석
14> 기꾸지, 앞의 글, 174~176쪽.
15> 문순태, 『동학기행』, 65쪽, 어문각, 1986.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동학혁명, #김개남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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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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