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0 20:47최종 업데이트 20.06.06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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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에 빠져들고 1년이 살짝 넘은 2016년 10월 일이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 모르는 딱 그런 시기. 마침 김포 와인아울렛 떼루아 가을 장터가 예정되어 있어 홈페이지에 접속해 할인리스트를 내려받았다. 1500종이 넘는 방대한 할인리스트 중에서 한정된 예산에 맞춰 구매 후보를 추리는 작업은 여간 중노동이 아니다.

떼루아 할인리스트에는 와인이 지역별로 구분되어 있다. 예컨대 '보르도>마고'는 프랑스 보르도의 마고 지역 와인, '미국>나파'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나파밸리 와인이다. 와인을 지역별로 구분하는 이유는 같은 품종의 와인이더라도 포도 산지에 따라 맛과 향이 확연하게 차이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횡성 한우, 청송 사과라고 하듯 저들은 보르도 마고 와인,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와인 식이다.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거주자는 어디 사느냐고 물어보면 (서울 산다고 안 하고) 청담동 산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누가 물어보면 그냥 서울 산다고 한다. 그 이상은 곤란하다.

굳이 비유하자면, 그냥 서울 와인이 아니라 청담동 와인을 마셔보고 싶었다. 프랑스 보르도의 와인 산지 중에서도 손꼽히는 지역으로 포므롤이 있다. 그 유명한 페트뤼스(프랑스 보르도 최고가 와인)의 포도밭이 있는 마을이다.
 


2016년 빈티지가 미국 와인 소매점에서 한 병에 한화로 4백만 원대(세금 제외)에 절찬 판매 중이니, 윌 스미스나 제프 베조스가 즐겨 마시지 않을까 싶다. 이런 포므롤 지역의 와인이라면 청담동급 아니겠나.
   
떼루아 가을 장터 리스트에서 청담동(포므롤) 와인만 따로 추렸다. 리스트에 있는 그 많은 와인 중에 포므롤은 딱 일곱 개였다.

∙샤토 가쟁(Château Gazin) 2013 / 95,000원
∙샤토 보날그(Château Bonalgue) 2008 / 56,000원 / 와인 스펙테이터 90점
∙샤토 벨 브리즈(Château Belle-Brise) 2002 / 188,000원
∙샤토 벨 브리즈(Château Belle-Brise) 2006 / 210,000원
∙샤토 클리네(Château Clinet) 2013 / 105,000원 / 로버트 파커 93점 / 와인 스펙테이터 91점
∙클로 르네(Clos René) 2010 / 70,000원
∙샤토 세르탕 드 메이(Château Certan de May) 2007 / 182,000원 / 로버트 파커 87점 / 와인 스펙테이터 88점

역시 청담동 거주민은 몸값이 만만치 않다. 보르도 2013년도는 포도 작황이 너무 좋지 않으니 샤토 가쟁, 샤토 클리네는 제외. 샤토 세르탕 드 메이는 역시 포도 작황이 좋지 않은 2007년 빈티지인데다 로버트 파커, 와인 스펙테이터의 점수가 모두 90점 밑이라 삭제. 샤토 벨 브리즈는 뭔가 이름이 껄쩍지근해서 패스. 클로 르네는 이름에 샤토가 없으니 찜찜해서 실격. 까다로운 기준을 유일하게 통과한 샤토 보날그 2008년을 구매하기로 정했다. 그러고 보니 우연히 포므롤 출신 일곱 와인 중 최저가다. 진짜 우연이다. 믿어달라.

포도 수확 해인 2008년으로부터 8년이 지났으니 어느 정도 연식이 된 와인이라 전문가가 판단하는 시음 적기가 궁금했다. 셀러트래커Cellartracker 앱으로 검색하니 샤토 보날그 2008년 빈티지의 시음 적기는 2011년부터 2022년까지로 나온다. 가격도 포므롤 와인치고는 합리적이고(저렴하고) 적당히 숙성되었을 것 같아 김포 떼루아 가을 장터에서 한 병 구매했다.

와인을 마신 날은 2016년 10월 9일이었다. 포므롤 지역 와인은 일반적으로 메를로 품종을 기본으로 여타 포도를 소량 섞어서 만든다. 메를로는 카베르네 소비뇽보다는 타닌 함량이 적어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우아한 느낌이 난다.
 

샤토 보날그 2008 프랑스 보르도 포므롤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이다. 라벨에 포므롤 출신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 임승수

 
코르크를 열고 언제나처럼 병 주둥이에 코를 바짝 가져갔다. 좁은 구멍으로 피어오르는 향기를 흠뻑 들이켠다. 어린 와인은 단순하고 직선적인 과실 향이 강한 데 비해, 샤토 보날그 2008은 숙성된 와인 특유의 복합적인 향이 올라왔다. 이 숙성 향이야말로 와인 애호가를 미치게 만든다. 일부러 연식이 된 놈을 찾아 나서는 이유다.

와인을 일정량 잔에 옮겨 밝은 조명 아래에서 빛깔을 감상한다. 이렇게 입에 침이 고이는 붉은색이 있다니! 하지만 참아야 하느니라. 와인이 공기와 만나 마시기 적당한 상태로 변할 때까지는 기다려주는 게 기본 예의. 잔에 따르니 병에 있을 때보다 향이 더 잘 피어오른다. 그 향기의 마지막 분자 하나까지 들이마시고 싶어서 잔 속으로 코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이러다가 가끔 코끝에 와인이 묻는다.

적당한 브리딩 시간이 흐른 후 한 모금 마셨다. 역시 잘 숙성된 청담동(포므롤) 와인은 입에서도 다르구나. 떫은맛을 내는 타닌이 병 숙성 과정에서 부드럽게 녹아들어, 맛이 풍부하면서 모나지 않고 여러 요소가 적절히 균형 잡혀 있다.

타닌 성분은 천연 방부제이기 때문에 와인의 장기 숙성을 돕는 역할을 한다. 숙성 잠재력이 높은 고급 와인을 일찍 열어 마시면 떫고 쓴 이유는 타닌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오랜 병 숙성 과정을 통해 타닌은 부드러워지며 숙성된 와인 특유의 풍미가 형성된다. 이걸 마시면 극락행이다.

문제가 발생했다. 술이 너무 맛있으니 그야말로 술술 넘어간다. 인내심을 발휘해야 하는데. 이런 와인은 마시는 과정에서도 맛과 향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되도록 천천히 오랫동안 즐기는 게 좋다. 장기 숙성이 불가능한 저가 와인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맛과 향인데, 기왕이면 끝장을 봐야 하지 않겠나.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마셨건만 어느새 막잔의 마지막 한 모금만 남았다. 기차역에서 연인과의 이별이 아쉬워 끊임없이 손을 흔드는 사람처럼, 그 한 모금이 못내 아쉬워 연신 스월링하며 향기만 맡는다. 모질게 마음먹고 마지막 한 모금을 들이킨 후 치아변색을 방지하기 위해 양치질을 했다. 이것으로 일정은 마무리.
 

프랑스 보르도의 최고가 와인 페트뤼스 보르도 포므롤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으로 와인 애호가들에게는 꿈의 와인이다. ⓒ 위키피디아

 
와인아울렛 떼루아의 할인 장터 리스트에서 와인을 고를 때, 나는 항상 구매할 와인 산지부터 정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나파밸리, 프랑스 보르도의 마고, 프랑스 부르고뉴의 본 로마네, 이탈리아의 피에몬테, 이런 식으로 포도 산지를 특정하면 선택의 폭을 좁힐 수 있다.

산지별로 와인을 경험하면 자신의 취향에 맞는 와인을 찾는 데에도 수월하다. 일례로 나는 샤토 보날그 2008년 빈티지를 마시고 한동안 포므롤 와인을 일부러 찾아 마셨다. 뭔가에 빠지면 깊숙하게 들어가는 나의 성향 때문이기도 한데, 은행 잔고가 급격하게 감소한 것만 빼고는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

와인을 구매할 때 라벨의 와인 산지를 확인하는 버릇을 들이자. 산지가 '보르도Bordeaux' 식으로 넓은 지역으로 표기되어 있다면, '나는 서울에 삽니다. 그 이상은 묻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포므롤Pomerol'처럼 구체적인 마을 단위로 적혀 있으면 '나는 청담동 산다'라고 자랑하는 것이다. 어느 와인이 더 맛있겠는가?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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