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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으로 청산해야 할 적폐가 있지만 국민의 약 70%가 거주하는 아파트의 적폐도 만만치 않습니다. 경험해보니 국가 적폐보다 마을(아파트) 적폐의 청산이 더 힘들게 느껴집니다. 4년간 아파트 회장을 하면서 겪었던 파란만장한 경험과 성취한 작은 성공의 이야기들을 시민들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2019년 8월 18일 일요일 저녁 7시 30분 아는 입주민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아파트의 맨 뒷동이 붕괴할 거 같다고. 건물 붕괴라니, 삼풍백화점이 떠오르고 겁이 덜컥 났다. 당시에 나는 외출 했다가 집에 들어가는 중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뛰어가 보니 현장엔 놀라서 나온 입주민들로 가득했다.

당황한 한 입주민이 119에 신고했기 때문에 소방차가 와 있었고 경찰과 시청공무원들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상황 파악이 전혀 되지 않았다. 놀란 입주민들이 나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지만, 해줄 말이 없었다. 어떤 입주민은 내게 거칠게 화를 내기도 했다. 도대체 아파트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이런 사고가 일어나냐고. 기분이 매우 나빴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우리 아파트 맨 뒷동 건물 1~2라인에는 1층부터 15층까지 정화조에서 나오는 냄새를 하늘로 뿜어내는 배기덕트가 건물에 부착되어 있었다. 하지만 배기덕트가 사용되지 않은 지 오래되어 그 구조물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 오래된 배기덕트가 건물과 분리되면서 소음과 진동을 일으키자 일요일 저녁 평온하게 집에서 식사하던 입주민들이 공포에 질려 밖으로 뛰어나온 것이다.

처음엔 붕괴하는 줄 알고 동 주민 모두가 대피했다. 밤 10시쯤 되어 진단을 마친 수원시 기술전문가들은 나에게 입주민들을 모아달라고 했다. 입주민들이 모이자 책임자는 주민들에게 직접 설명했다. 요지는 건물붕괴 위험은 없으니 일단 해당 라인 입주민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대는 집으로 들어가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두려움에 휩싸인 입주민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질문과 답변이 몇 번 오간 후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한 입주민들은 집으로 돌아갔고, 해당 라인 입주민은 아파트 경로당 혹은 인근 모텔로 이동하였다.

희생양을 찾는 입주민

곧바로 아파트 관리사무소 회의실에는 '수원시재난현장통합지원본부'가 설치되었다. 수원시는 이를 '재난사고'로 규정한 것이다. 염태영 수원시장이 첫 회의를 주재했고, 나는 아파트 회장 자격으로 그 회의에 참석했다. 상황 체크를 하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는데, 갑자기 성난 입주민 한 명이 회의장에 난입해서는 나에게 "사고 당시 회장님은 어디 계셨어요?" "언제 연락을 받으셨고 사고 현장엔 언제 도착하셨습니까?" 라며 따져 묻는 게 아닌가.

순간 화가 났다. 전형적인 희생양 찾기였다. 분노의 대상이 필요했고 그게 바로 나였던 것이다. 항의하는 입주민에게 이런 사고를 내가 어떻게 예방하느냐, 회장은 5분 대기조처럼 아파트에 항시 대기하고 있어야 하냐며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옆에 앉은 염태영 시장이 자중하라고 내 손을 잡을 정도로. 임기 마지막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정말 끔찍한 밤이었다.

더 답답한 건 그다음 날인 8월 19일 월요일 아침에 2박 3일 세미나 일정으로 아파트를 떠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약속이 되어 있어서 취소할 수가 없었다. 그 일정이 없었으면 연차를 내고 아파트에 머물면서 재난사건 처리를 지켜보면서 해당 입주민들의 민원을 수원시에 전달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세미나가 열렸던 충남 서산으로 전화가 빗발쳤다. 진행 상황을 묻는 입주민들의 전화, 언론과 방송사의 전화, 관리소장의 전화, 수원시 공무원들의 전화, 세미나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전화로 화를 내는 입주민들도 많았다.

배기덕트는 안전하게 제거되고

2박 3일 일정을 마치고 21일 수요일 오후에 집에 도착했다. 관리사무소에 가보니 배기덕트는 안전하게 제거되었고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긴박하고 아찔했던 순간들을 수원시 관계자에게 들었다. 무게가 무려 30~40t이나 되는 배기덕트가 한꺼번에 무너지면 소음과 진동으로 아파트 주변은 대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자동차 파손, 사상자 발생 등 그야말로 우리 아파트는 '재난지역'으로 선포될 수도 있었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수원시 기술팀은 침착하게 상황판단을 하고 안전하게 배기덕트를 하나하나 제거한 것이다. 붕괴 직전에 있던 덕트를 붙잡아 매기 위해서 가구의 베란다 난간이 손상되긴 했지만, 재산피해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설명을 듣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관리사무소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는데, 한 입주민이 두유 한 상자를 들고 오는 게 아닌가. 그 입주민은 해당 라인의 입주민들이 얼마나 놀랐겠느냐, 그들에게 힘내라는 말과 함께 이 음료수를 전달해달라고 당부했다. 몇 동 누구시냐고 물으니 한사코 자기 자신을 밝히지 않았다.

  
ⓒ 남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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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전화한 입주민들의 상당수는 이 사고가 이미 신문과 방송에 크게 보도되었으니 아파트값 떨어지면 어쩌냐며 항의를 많이 했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이 많이 상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작 생각하는 것이 집값이라니... 그러나 입주민들은 두유를 가져다준 사람처럼 한편으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안쓰럽게 여기고 위로해주고픈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해당 주민의 아픔을 위로하고픈 입주민들이 그들의 선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위로를 전하는 현수막을 걸어야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현수막을 걸고 고민하는 나에게 아파트에 파견되어 있었던 수원시 김타균 홍보기획관은 위로의 말을 전할 수 있도록 게시판을 설치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매우 좋은 아이디어였다. 하여 나는 즉시 관리사무소 직원과 함께 게시판을 설치하고 포스트잇을 비치했다.

공동체란 무엇인가? 공동체는 언제나 공동체 성원이 다른 성원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에 존립한다. 고통을 당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고통에 동참하려는 걸 느낄 때 위로를 받고 자신이 공동체 성원임을 인식하게 된다.

게시판 설치는 성공적이었다. 많은 입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직접 현장에 와서 자필로 위로의 글귀를 붙여 놓았다. 입주민들은 사고가 나서 집값 떨어지는 것도 염려하지만, 놀란 가슴 쓸어내리며 경로당과 근처 모텔에서 난민처럼 지내는 사람들의 괴로움을 헤아리는 마음도 지니고 있었다. 나는 현수막과 게시판 설치를 통해 후자의 마음을 극대화 시키고 싶었다.

수원시의 놀라운 행정

정말 신기한 일은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수원시의 놀라운 행정이었다. 나는 우리나라 공무원의 행정을 그다지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다. 만들어 놓은 사고 대처 매뉴얼은 피해자 혹은 당사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무원의 책임회피 수단으로 활용되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번 재난사고 기간에 수원시 공무원들의 행정을 접하면서 이 생각에 변화가 일어났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현장에 와서 시민의 안전과 관련해서는 '과잉' 대응해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그 말 때문이었는지 공무원들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주어진 일을 단순히 처리하는 걸 넘어서, 피해자들의 안전을 최우선에 두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역동적이면서 안정된 행정을 직접 경험하고 적잖이 놀랐다.

그중에 최연경 공동주택팀장의 '마음을 다하는 행정'은 단연 돋보였다. 배기덕트를 하나하나 제거하기 전에 붕괴를 막기 위해 밴드로 붙들어 매려면 입주민의 집에 들어가서 작업을 해야 한다. 물론 이 작업은 입주민들이 문을 열어주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문을 열어주지 않으려는 입주민들이 있는 게 아닌가.

최 팀장은 그런 입주민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설득하는 투혼을 보여주었다. 땀을 뻘뻘 흘려가며 쉴새 없이 현장과 상황실을 오가며 가교역할을 하는 그의 모습은 퍽 인상적이었다. 이 일 후에 지인들에게 수원시의 적극적 행정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어김없이 수원시의 행정 대처가 '예외적'이라고 했다. 
 
수원시의 놀라운 행정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입주자대표회의는 수원시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기로 했다. 사진 왼쪽이 염태영 시장, 오른쪽이 필자
 수원시의 놀라운 행정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입주자대표회의는 수원시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기로 했다. 사진 왼쪽이 염태영 시장, 오른쪽이 필자
ⓒ 이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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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의 놀라운 행정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입주자대표회의는 수원시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기로 했다. 내가 아파트 대표로 염태영 시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는데, 공교롭게도 며칠 후 수원시가 나에게 재난사고처리에 적극적 도움을 준 것에 대해서 표창장을 수여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우리 아파트의 재난사고는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어렵게 일군 아파트의 공동체성이 유지·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괜찮은 동대표들이 입주자대표회의에 들어와야 한다. 나의 두 번째 회장 임기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바야흐로 동대표와 회장 선거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나의 마지막 임무를 좋은 동대표와 회장을 섭외해서 선출하는 것까지라고 생각하고 동대표 섭외에 돌입했다. 잔뜩 웅크리고 있었던 적폐세력들도 선거가 다가오자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태그:#입주자대표회의, #동대표, #아파트 비리, #아파트 민주주의, #마을적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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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자유연구소(landliberty.or.kr) 소장. 전 국민 주거권과 토지공개념 실현, 토지보유세를 재원으로 하는 기본소득인 토지배당제를 위한 연구와 운동을 병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땅에서 온 기본소득, 토지배당》(2023, 공저), 《아파트 민주주의》(2020), 《헨리 조지와 지대개혁》(2018, 공저)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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