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5 14:59최종 업데이트 20.05.18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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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개념은 독일의 비운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저서 아케이드프로젝트에 등장한다. 도시의 산책자는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감각하고 사유한다. 발터 벤야민은 19세기 파리를 거닐며 사유한 도시의 다양한 모습을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담아내고자 했지만, 나치를 피해 도망 다니다 죽음을 맞이한다. 책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그렇다면 서울의 산책자는 어떠할까?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싸다는 도시, 자살율이 높은 도시, 살인적인 집값의 도시. 이곳에는 어느 하나 안 바쁜 사람이 없다. 공공미술가인 필자가 운동화 끈 질끈 묶고 서울 곳곳을 걸으며 발견한 이 도시의 얼굴, 그리고 거기 담긴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편집자말]

서울은 기억을 잃어버린 도시다. ⓒ 권은비

 
누구나 상처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질지는 몰라도 상처를 만들어낸 아픈 기억은 좀처럼 옅어지지 않는다. 문득 상처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는 그때의 아픈 기억을 떠올린다.

누군가 도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몸'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은 사실 상처투성이의 도시다. 서울은 봉건사회, 식민역사, 해방, 전쟁, 분단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은 도시다.


그런데 가만히 서울을 바라보자, 그 상처들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왜 도시의 기억을 위한 자리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화려한 고층빌딩만 바라보고 살게 된 걸까?

망각의 도시

서울은 잔인할 정도로 역사의 기억을 금세 지워버린다. 아픈 기억일수록 빠르게 지워버린다. 그래서 서울의 상처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서울은 지우고 다시 채우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때로는 도시의 상처를 치유할 기회조차 너무나 쉽게 박탈당한다. 이 도시는 상처가 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은 그대로인데 마치 상처받은 적도, 상처준 적도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서울은 망각의 도시다. 그것이 세계적인 급속성장 국가의 수도가 될 수 있었던 '서울'의 생존법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축척되는 땅의 기억은 검은 아스팔트, 화려한 조명, 거대한 철골, 반짝이는 유리 사이로 사라진다.

그나마 존재하는 서울의 기억의 표식, 기념비들은 도시 속에 숨겨져 있다. 1994년 성수대교 참사가 그러하다.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 위를 달리는 차 안에서 보는 성수대교. 주황색 철골을 비추는 화려한 조명은 한강의 밤거리 풍경 속에서 빛난다. 눈이 부셔 황홀하게 보일 정도다. 

그러나 성수대교 사고 희생자 위령비를 찾아가 본 사람을 알 것이다. 위령비로 가는 길 자체가 위험천만한 긴장의 연속이라는 것을. 사방으로 달리는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몸으로 느껴지는 쾌쾌한 매연으로 가득한 바람은 한국사회가 어떻게 참사를 기억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1가에 위치한 성수대교 참사 희생자 위령탑.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

  
1995년의 삼풍백화점 참사도 다르지 않다. 참사가 일어난 곳, 그곳에 참사의 기억과 추모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삼풍백화점 참사 위령탑은 사고가 벌어진 곳에서 멀리 떨어진 '양재시민의 숲'에 서 있다. 도보로 무려 1시간 20분 동안 걸어야 하는 거리다. 참사 현장과 추모의 자리 사이의 간격은 너무나도 멀다. 그 머나먼 간격은 우리가 참사를 기억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참사는 중심에서, 추모는 변방으로

언제부턴가 '서울'이라는 도시는 '브랜드'가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래 서울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수많은 사람들이 앞 다투어 멋진 청사진을 내보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공공기관과 건축가들과 예술가들은 그러한 도시를 만드는 데 늘 앞장서 있다. 서울의 도심을 걷고 있노라면 '더 새롭게, 더 멋지게, 더 아름답게'라는 슬로건을 외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도시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산책자'가 되길 추천해본다. 먼저 경제개발의 신화 앞에서 생명권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보여주는 참사 현장과 그 참사를 기억하는 장소를 걸어보길 바란다. 삼풍백화점과 삼풍백화점 참사 위령탑 사이, 도보 1시간 20분 거리의 5.1km 구간을 걸어본다면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어떤 것을 잊고 있는지 말이다. 

슬프게도 서울에는 역사의 상처를 오롯이 담고 있는 공공미술작품이 아직까지 턱없이 부재하다. 한 도시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는 공공미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공미술은 거대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공성을 기반으로, 사회적 책임으로 만들어야 한다.

사회적 참사를 기억하는 공공미술이 부족하다는 뜻은 우리가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가 도시에 어떤 조형물을 세우는지는 곧 그 나라의 가치관과 상징성을 드러낸다.

사회적 참사는 늘 우리의 일상 속에서 빈번히 벌어지고, 늘 도시의 중심부에서 일어나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공공미술 작품은 '사고현장'에서 멀리 떨어져있거나, 좀처럼 찾기가 어렵다. 생명에 대한 문제임에도 도시의 상처는 늘 중심이 있질 못하고 변방으로 밀려난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벌어진 사건들, 도시의 상처는 오늘도 있어야 할 곳에 존재하고 있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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