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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시인의 학교詩끌'은 학교가 폭력으로 시끌시끌하다는 뜻, 시(詩)로 학교를 끌어당기거나 끌어준다는 뜻, 결국에는 좋은 의미에서 학교가 시끌시끌했으면 좋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글이 학교폭력 예방 문화를 만들어 나아가려는 모든 분께 진심으로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편집자말]
성남에 있는 어린이집에서 성폭행 사건이 일어났다. 기사를 읽기도 전에 가슴이 두근거렸고,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솟아올랐다가 다시 무너져내렸다. 피해 아동과 그 부모님의 참담한 심경 같은 것들이 내 마음속에 갖가지 문양을 그려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성폭행'이라는 단어를 의심했다. 기사를 읽기 전까지는 성폭행 가해자가 어른이라고만 생각했다. 어떤 악마 같은 놈이 또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생각하니 마우스를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런데 기사를 읽어내려가면서 내 예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에 또 한 번 경악했다.

가해자가 같은 아동이었다. 같은 반 남자아이가 피해 아동의 바지를 벗게 해 손가락으로 추행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정말 어린아이들일 텐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제일 먼저 걱정이 된 것은 피해 아동의 심리적 상태였다. 그 어린 나이에 설명하거나 해석할 수 없는 폭력 앞에서 얼마나 두려웠을지 상상이 되질 않는다. 나라면, 내 삶에서 느낀 두려움과 수치심을 통해서 그 아이의 심리를 짐작이나 해볼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폭력 사건들을 볼 때마다, 말 못할 수치와 절망의 현장들이 우리 각자의 삶속에 무수하게 존재해왔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곤 한다.

나는 어떤 한 시절로 되돌아가서 그날의 참담함을 복기하듯 헤아려보기도 한다. 나에게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폭력의 현장을 어차피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잊어버리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있고, 폭력의 현장을 기어코 잊지 않으려고 반복해서 회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후자 쪽인 것 같다. 그런 일들을 결코, 잊지 않으려고 노력할수록, 나는 그런 일들을 막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이다.

그러나 과거의 아픔을 파헤치는 순간에도 잊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내가 견딜 수 있는 만큼만 파헤쳐야 한다는 것이다. 물리적인 폭력이든 정신적인 폭력이든 어떤 한계를 벗어나버리면 그것은 큰 재앙이 된다.

피해자에게는 절대적인 자기 치유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되도록이면 다음과 같은 기억은 꺼내고 싶지 않다. 어린 시절에 성적인 수치를 당한 경험이 있다. 난립하듯 지어진 건물과 건물 사이 음습한 골목에서 그 일은 벌어졌다. 그것은 너무 오래된 기억이면서 동시에 너무 오랫동안 이 세상의 폭력을 나에게 내재화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최초의 성적인 수치로부터 나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늘 무서웠다.

그 골목으로 나를 불러, 끌고 들어간, 옆집 형의 의도와 행위를 도저히 해석할 수 없었다. 사람의 수치는 꺼내 보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 그 수치를 만지려고 했을 때 쉽게 허락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성 윤리란 그렇다. 그런데 그런 윤리를 일시에 깨버리는 사건이 내게 일어났다.

분명히 나에게 친절하고 일상적으로 잘해주었던 옆집 형이었다. 그런데 그 형은 어느 날부터 이상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이겨내지 못한 욕망을 실행으로 옮겼다. 나는 그것이 어떤 의미를 둔 행위인지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또 다른 기억도 있다. 수학·영어 과외를 받던 중학교 시절, 나는 두 명의 여자 선생님으로부터 성적인 수치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녀들은 성적을 빌미로 나와 몇몇 학생들을 두드려 팼고, 약을 발라준답시고 바지를 벗게 했다. 나는 그런 어색한 상황이 너무나 이상해서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인격적인 삶보다는 공부가 더 중요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공부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 공부로부터 환산되는 세계가 무엇인지, 나를 포함한 여러 명의 학생들은 그 감옥 같은 수치의 순간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지 못했다. 중학생의 나이에 여자 선생님들 앞에서 바지를 벗는다는 것 자체가 수치였다. 사춘기가 올 무렵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어떤 행위에 어떤 의도가 달라붙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늘 달라지게 마련이다. 나는 그것을 알았다. 그것이 실수가 아닌 의도적인 희롱임을 알았던 것이다. 바지가 벗겨진 채 속옷만을 입고 있었던 나는, 다시 한 번 연고를 발라준답시고,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씨익 웃는 그 여자 선생님의 표정을 견뎌내야만 했다.

도저히 그 순간에 나의 불쾌를 드러내기가 어려웠다. 모멸감이 들었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그 교활하고 파렴치한 얼굴을, 웃음이 가득 들어찬 얼굴을, 주먹으로 갈겨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한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나는 거기서 컬러 사진처럼 현상될 것 같은 생각들을 멈춘다. 이런 폭력의 현실적인 현장을 시적인 공간으로 일단 옮겨버린다. 현실을 채색하는 다른 채도와 명도가 거기 생겨난다. 나를 살리기 위한 비상탈출구다. 도저히 치유되지 않는 끔찍한 현실을, 시적인 세계로 전복시켜버리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이자, 앙갚음의 활극이다. 또는 어떤 심리적인 충격이나 폐쇄로 인해 숨이 쉬어지지 않는 나를 살리고자 스스로 행하는 심폐소생술이자 하임리히요법이다.

나 자신을 차분히 쓰다듬는 시간들은 마치 차창 밖의 풍경들처럼 고통에 휩싸인 시간의 눈동자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담담한 위로를 주는 적이 많았다. 나는 이런 시간들이 폭력의 피해자에게 필요한 절대적인 자기치유의 시간이자 우선되어야 하는 내밀한 내면 치유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적절한 시기에 어떤 폭력으로부터 피해자를 구해낼 골든아워도 존재하겠지만, 피해자에게 2차 3차의 가해가 연속적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헤아려주는 시간들도 필요하다. 유리 파편들이 흩어져 있는 바닥을 누군가 맨발로 천천히 걸어나오려고 할 때, 파편의 바깥에 서 있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 파편을 바깥에서부터 싹싹 쓸어내어 주지 못할 것이라면, 적어도 조명을 꺼버리지는 말아야 한다.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져본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 상처받은 자들은 왜, 자기 몰입이 잘 되는 공간으로 돌아갈까. 상처가 큰 사람은 왜, 조용히 숨어 우는 시간이 필요한가.

누군가 울어야 할 때 옆에서 진심으로 함께 울어주는 것을 공명하는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같은 주파수를 가진 존재들끼리는 함께 떤다고 하지 않는가. 그것은 진심이 묻어 있는, 언젠가 우리 모두가 겪었을 고요한, 핥아내어 치료된, (내밀한) 슬픈 과거와 연결된다. 이는 인간적인 헤아림과 연결되어 결국 인간이 무엇이기에 인간을 치유할 수도 있을까 고민하는 따뜻한 내면의 철학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시간이 소요된다. 만약 우리가 피해자와 가까이 있다면, 상처받은 마음이 소비해야 할 시간을 무한정 벌어야 하는 입장에 처할지도 모른다. 그런 시간을 벌어줄 수만 있다면 벌어주고 싶은 것, 그런 마음이 사람들에게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드는 기사와 댓글들

성남 어린이집 성폭력 사건 피해 아동과 그 피해가족들은 이 끔찍한 현실을 어떤 스크럼으로 버티고 있는 것일까 헤아려본다. 최근에는 사건 피해 아동의 어머니가 네티즌에게 사과문을 게시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더 아팠다. 가해 아동 부모 측이 신원을 특정해 유포시킨 네티즌을 고소한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었다.
  
이런 시점에서 네티즌들의 무지막지한 댓글뿐만이 아니라, "어린이집 성폭행범에게 해코지하겠다. 어린이집 위치와 등원 시간, 이름, 얼굴도 알고 있다"며 흉기 등의 사진과 보복성의 글까지 올라왔다고 하니 안타까움과 답답한 마음뿐이다. 실제로 가해 아동 측과 어린이집 측은 인터넷 게시판 등에 악성 댓글을 작성한 이들을 모욕 혐의로 처벌해 달라는 고소장을 수원지검 성남지청 등에 제출했었다고 한다. 해당 사건으로 개인적인 신상과 어린이집의 이름이 알려졌고 각종 비난과 악성 댓글로 피해를 보고 있다고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딸의 피해 사실을 견디고 있는 것만으로도 피해 아동의 어머니는 얼마나 힘이 들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날 네티즌 대상 고소장 접수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피해 아동의 어머니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죄송하다. 진심으로 죄송하다. 조금 전 '가해자 측 네티즌 대상 고소장 제출'이란 기사를 본 후 눈물만 흐른다"고 전했다고 한다.

성폭력 피해사실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해서 앞으로 이런 일의 재발을 막고, 더불어 피해 아동이 받았을 상처가 어떤 식으로든 치유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어머니는 국민청원도 진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 아픈 일을 깊이 헤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감정적으로만 이 사건을 대하는 일부의 네티즌들 때문에 피해 가족들은 더 큰 상처를 받게 되었다.

진심으로 사과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사과를 해야 하는 입장이 된 피해 아동의 어머니는 지금 어떤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을지 걱정이 된다. 다음은 피해 아동의 어머니가 울면서 했던 말이라고 한다.

"저의 아이 일로 피해를 드려 죄송하다"
"많은 네티즌들에게 폐를 끼쳤다. 진심으로 죄송하다"
"사죄한다" "용서해 달라"

사안이 심각할수록, 피해자나 그 가족들에게 더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은 이미 마음의 방어체계에 손상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이후에 일어나는 2차 3차의 피해에 무방비 상태가 된다. 마치 오존층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자외선을 직접 받는 것처럼 위험해질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만약 우리의 손에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고 가정한다면, 그 뒤에 어떤 처치가 이루어져야 할까. 화상을 입을 상황마다 거기에 적합한 응급처치법이 있을 것이다. 화상을 입었을 때 된장이나 감자 혹은 소주를 이용한 민간요법은 손상된 피부조직에 감염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소주의 경우에도 알코올이 상처를 자극해서 상황을 악화시킬 위험이 크다. 얼음을 사용하게 되면 혈관이 수축해 회복을 더디게 할 수 있다.

이렇듯 섣부른 치료는 상처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폭력에 의해 마음의 상처가 심각한 사람에게 적합한 접근법이 있을 것이다. 배려와 헤아림이 없는 관심은 오히려 피해자들을 더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만든다. 피해 아동의 부모가 느꼈을 고통을 다음의 기사들을 통해서 한 번 진심으로 헤아려보자.
 
"어린이집 CCTV를 확인해본 결과 제 딸이 진술했던 장소와 상황 등 모든 정황이 아이의 진술과 똑같이 그대로 찍혀있는 것을 원장, 담임 두 명, CCTV 관리자, 저희 부부가 한자리에 모여 확인했다"며 "화면을 보는 내내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온 몸에 피가 거꾸로 솟는 심정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6살 아이가 저지른 행동이라 형사처벌 대상도 안 되고 민사소송을 해봤자 2~3년 이상 걸리고 우리 아이만 반복된 진술로 상처만 받을 뿐이라고 한다"고 전했다.

-성남 소재 어린이집 '반 친구 성폭행' 의혹에 "처벌" 국민청원 (경향신문 2019년 12월 2일자)
 
피해 아동 아버지는 "제 딸은 성폭력 트라우마로 'OO이 만나면 어떡하지?'라고 한다"며 "어두운 곳에서는 공포를 느끼고 밤에는 악몽에 시달리며 '하지마, 싫어, 안해' 이런 잠꼬대를 연일하고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

-'성남 어린이집 성폭행 의혹' 일파만파…5살 여아 부모 "짐승처럼 울부짖어" (아시아경제 2019년 12월 2일자)
 
자신의 소중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성적으로 추행을 당하는 CCTV 영상을 보고 있는 부모의 심정이란 어떤 것일까. 나는 그 감정이 "온 몸에 피가 거꾸로 솟는 심정"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정도의 것이라고 여겨졌다.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 분노감, 좌절감이 아니었을까.

참혹하고 참담하고 가혹한 폭력 앞에서 지금껏 지켜왔던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이 모두 무너져 내렸을 피해 아동의 부모님을 어떻게 위로해 드릴 수 있을지 나는 감히 상상조차 되질 않는다. 아마도 그 충격은 고스란히 피해 아동에게로 전해질 것이다.

충분히 치료받고 안정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피해 아동과 그 부모님을 위한 올바른 태도라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그런데 세상은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면 사후적으로 일단 자극적인 정보들을 퍼 나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다. 그 가운데 일파만파 퍼져나가는 부작용들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이런 반응들은 진심으로 피해 가족들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잘 알아보지도 않고 막말을 일삼거나, 거짓 정보를 확산시키거나, 익명성으로 무장한 뒤 무턱대고 가해자를 인신공격해서 사회적인 논란만 증식시킨다. 그런데 이런 비인격적 언행들이 연속적으로 아무런 거름망 없이 피해 가족들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피해 가족들은 이중고를 겪고 있다.

피해 상황에 대해서 함께 공감하고, 때론 분노하면서 사건 자체를 모든 국민의 관심 영역으로 부지런히 이동시키는 것은 나쁘지 않다. 폭력에 저항하는 올바른 목소리들이 한데 모여야 비로소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같이 폭력으로 고통 받는 피해 가족들에 대해 조심성이 없는 태도로 일관한다면 그것은 큰 부작용을 불러 온다.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깊이 헤아리는 인간적인 정서의 부재가 심각하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네티즌이라고 불리는 이름을 가린 개개인들이 그렇고, 정치를 하는 보건복지부장관이 그렇고, 사건을 정확히 전달해서 국민들로부터 올바른 관심과 응원을 이끌어내야 하는 언론이 그렇다. 다음의 기사 내용을 봐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피해 가족들의 심정을 섬세하게 헤아리지 못하는지를 극명하게 알 수 있다.
 
박 장관은 지난 2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성남 어린이집 성폭력 사건에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는 신상진 자유한국당 의원의 질의에 "발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모습일 수 있는데, 과도하게 표출됐을 때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다"고 답변해 피해자를 배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논란이 일자 보건복지부는 "장관의 발언은 아동의 발달에 대한 전문가의 일반적인 의견을 인용한 것이며, 사실관계 확인 후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겠다는 취지였다"며 "피해 아동과 부모, 그리고 사건을 바라보며 마음 아파하는 국민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지 못한 발언으로 매우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사과했습니다.

-박능후 "성남 어린이집 사고에 '성폭력' 용어 부적절" (SBS 뉴스 2019년 12월 5일자)
 
언론도 좀 더 발로 뛰는 기사를 써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세상에 공표하여 아동 간 성폭행과 같은 이런 슬픈 일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다각적으로 돕는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기자정신을 가지고 발로 뛰어서 지금껏 나오지 않은, 세상에 필요한 기사를 쓰거나, 피해 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사를 써야하지 않을까. 둘 다 진심이 있어야 가능하다. 시간에 쫓기고, 실적과 이익에 쫓겨서 이미 나와 있는 기사를 자극적인 제목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일들이 없어져야 하겠다.

분노와 혐오를 먼저 꺼내 들어서는 안 되는 시대

나는 이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정말로 화가 많이 났었다. 당장에라도 가서 폭력의 손가락을 부러뜨려놓고 싶었다.
 
 과거에 겪었던 폭력으로부터 분노를 떨쳐낼 수가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시에서도 그런 분노의 감정을 드러냈었다. 사실 지금도 그런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러나 분노에만 갇혀 있을 때, 나 또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이 시대와 사회에 분노와 혐오를 넘어서는 또 다른 움직임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실천적인 시 쓰기를 통해서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과거에 겪었던 폭력으로부터 분노를 떨쳐낼 수가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시에서도 그런 분노의 감정을 드러냈었다. 사실 지금도 그런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러나 분노에만 갇혀 있을 때, 나 또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이 시대와 사회에 분노와 혐오를 넘어서는 또 다른 움직임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실천적인 시 쓰기를 통해서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 김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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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가락 하나
부러뜨리고 내 손톱 하나하나
뜯어 버리고

어지러워 내리막길 쏟아진 벚꽃 잎들 보면
병신아 병신
고개 돌리면 등에 묻은 발자국을 볼 수 있을까

울음소리 속에 웃음소리가 들려

-김승일, '단추 뜯기는 계절' 일부, (시집 <프로메테우스>)
 
나 또한 폭력의 과거 속에 갇혀서 무조건 가해자를 처단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것이 사실 제일 확실한 폭력에 대한 올바른 처분이라고 믿고 싶을 때도 있었다. 가해자들에게 눈에 보이는 분명한 죗값을 치르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복수심에 갇혀 있기에, 또 다른 피해 상황들을 불러온다. 폭력은 누군가의 손가락뿐만 아니라, 자신의 손가락까지 부러뜨리게 만드는 폭력성을 늘 함께 가지고 다닌다. 우리는 모두 처음에는 부드럽고 연약하고 아름다운 아기의 손가락을 가지고 이 땅에 왔다. 정말로 꼭 잡아주고 싶은 그 작은 손 말이다.

서로의 이익을 위한 악수, 적으로 간주한 자들을 집단으로 공격하기 위한 악수보다, 어떤 어려움 속에 처한 존재를 구원하기 위해 진심으로 손을 내밀어 악수하는 세상이 온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얼마나 아름다워질지 나는 자꾸 상상해본다. 그런 세상이라면 사람 간의 악수(握手)는 악수(惡手)가 되지 않을 것 같다.

폭력에 갇힌 사람을 구원하는 데 초석이 되는 선수(先手)란 무엇일까. 우린 자꾸 그게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구별하는 데 선수(選手)가 되어야 한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먼저 내미는 손이 되어야 한다. 아기도 어른도 잠을 잘 때는 손을 동그랗게 말고 잔다. 자기 자신을 향해서 동그랗게 말린 손가락이 보이는가.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자기 자신만 사랑하려는 마음. 사실은 그게 우리의 본성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끌어안는 만큼, 누군가를 진심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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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 없는 학교를 소망합니다. 제 첫 시집 『프로메테우스』를 학교에서 낭독합니다. 학교폭력을 예방하고, 피해학생들을 치유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강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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