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삼숙'이가 모였다. 나(미숙)를 비롯해 영숙이 진숙이 셋이다. 한번 보자 해놓고 계절이 바뀌곤 했다. 그러다 작년 10월에 진숙이 큰아들 결혼 소식이 들렸다. 삼숙이 중에서 가장 먼저 자식을 결혼시켰다. 잔치를 치르고 나서 비로소 만나자고 진숙이한테 연락이 왔다. 진숙이는 인천에, 영숙이는 서울에 산다. 대전에 사는 내가 서울로 간다고 했다. 장소는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이다.

버스 타고 가는 동안 속이 메슥거리고 울렁댔다.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멀미였다. 나이 탓인가 싶었다. 10년 전, 경기도 이천 시골 외딴집에서 살 때, 동네 할머니가 내 나이를 물었다.

"올해 쉰이에요."
"쉰이면 아직 애틋한 나이지."


그때 할머니가 말하던 '애틋함'은 많은 뜻이 있겠으나 '아직 젊은 축에 든다'는 것으로 들렸다. 그 애틋한 나이에 10년이 흘렀다. 지금 난 세 번째 스물을 맞았다.

진숙이가 며느리를 봐서인지 셋 중에 가장 의젓해 보였다. 점심으로 치즈돈가스와 돈가스정식을 시키자 영숙이가 말했다.

"야, 우리 학교 다닐 때 영등포역 근처 경양식집 생각나니? 우리 셋이 나이프랑 포크 두 손에 잡고 가정 시간에 배운 것처럼 우아하게 칼질하자고 미숙이 니가 그랬어."
"내가? 난 생각나지도 않는데 별걸 다 기억한다 얘."
"하하, 오른손에 나이프, 왼손에 포크는 시험에도 나왔어. 나 그래서 그거 맞았잖아."
"나중에는 아예 칼로 다 썰어놓고 먹었지."
"그땐 경양식집이 칸막이로 돼 있고 좀 어두컴컴했어. 테이블에 촛불 하나씩 있는 분위기였어."


우리 '삼숙'이가 만났다

친구들을 만나니 멀미 기운이 사라졌다. 죽죽 늘어나는 치즈돈가스가 입에 살살 녹는다. 경양식집에 가려면 용돈을 모으고 서로 날짜를 맞춰야 했던 '삼숙'이. 영화를 보는 건 언감생심이었고 간판에 그려진 영화배우들의 얼굴만 감상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곤 했다.

밥을 먹고 카페로 가려고 일어섰다. 카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우리는 아예 식당 밖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테이크 아웃해 온 달달한 커피를 마셨다. '삼숙'이가 모이면 약방의 감초가 되는 '특별학급'의 추억들. 그 스무 살의 이야기가 마르지 않은 샘물처럼 우리의 기억을 용솟음치게 한다.

"니가 다니는 회사 이름이 참 특이했어. 슈어프러덕츠라는 건 기억해. 근데 거기 뭐 하는 데였어?"
"치과에서 쓰는 재료를 만드는 거였는데 관리자가 자꾸 교육을 가라고 해서 난 싫었어. 아마 날 공부시키고 관리자로 키우려고 그랬나 봐."
"어머, 그럼 너한테는 기회 아니었어?"
"아니야~. 난 그거 싫었어. 난 처음부터 간호대학 가려고 했거든."
"처음부터, 그런 계획이 있었던 거야?"
"응, 언니가 그 회사에 같이 있었는데 언니가 나 '공주간전(공주간호전문대)'가라구 했거든. 나두 간호사되구 싶었어."


처음부터 '계획'이 있었던 진숙이는 자기 말대로 '간전'을 졸업하고 간호사로 일하다가 결혼했다. 군인 남편을 따라 생활 근거지를 수없이 옮겼다. 3년 전, 3개월 동안 컴퓨터학원에 다니더니 집에서 멀지 않은 의료기관에 간호사로 취업했고 현재 근무 중이다. 진숙이가 자기 언니와 한 공장에서 같이 일했다는 말에 영숙이가 말했다.

"나두 우리 큰언니랑 같이 있었는데. 언니가 먼저 가서 일하고(삼성물산) 나중에 나를 불렀어. 홍성에 있을 때 내가 서울 간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방을 얻어주더라."
"아버지가 딸 생각을 많이 하셨네. 방도 얻어주고."
"그게 아니라 아버지가 영철이(남동생)를 서울로 보내려고 했던 거야. 걔가 공불 좀 했거든. 나 3학년 때 대학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넌 영철이 공부시키고 대학가지 마라' 그러더라."
"와, 아버지가 진즉에 계획이 있으셨네. 그래서 신림동에 방을 얻어준 거구나."
"응, 근데 영철이가 교수가 됐는데 나 그때 하나도 기쁘지 않았어. 걔 마누라만 좋은 일 시킨거 같구. 내 인생은 뭔가 싶었지. 올케도 첨에 고생했지, 피아노 레슨하면서. 올케가 착하니까 참았지 안 그러면 나도 어지간히 뒤끝 있는 사람인데. 우리 올케 나한테 들볶였을 거야. 하하~"


나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로 졸업 자격을 얻어 구로공단 전자회사의 공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곳에 입사하면 Y여상 산업체특별학급에 다닐 수 있다는 게 크게 보였다. 거기서 우리 '삼숙'이가 만났다.

주경야독의 근로청소년이었던 스무 살
 
 나의 스물
 나의 스물
ⓒ 한미숙

관련사진보기


산업체 특별학급은 기업체와 학교가 상호협력해 야간학급을 운영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우리는 등록금이나 수업료 등을 내지 않았다. 아마 기업체와 정부가 학교 운영의 지속과 학생들의 장기근속을 위해 재정지원과 세금 등의 혜택을 주었던 것 같다.

열아홉 살이던 1979년, 드디어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고 자주색 교복을 입었다. 퇴근 30분 전, 작업복을 벗고 교복을 갈아입으면서 '우리는' 탈의실에서 양 갈래머리를 땋거나 서로의 교복 옷깃을 정돈해주었다. 열여섯, 열아홉, 스물두 살까지 나이로는 언니 동생이 섞여 있었으나 학교 갈 준비를 하는 그 순간만큼은 모두 상큼 발랄한 소녀들이었다.

우리는 식당에서 주방의 여사님들이 끓여준 라면을 먹었다. 평소 점심때는 공장의 남색 가운을 입고 길게 줄을 서서 밥 순서를 기다렸지만, 교복 입은 여학생 20여 명이 둘러앉은 곳은 오붓하고도 특별했다. 미리 끓여 우동만큼 굵어진 라면은 입에 넣기가 무섭게 후루룩 잘도 넘어갔다. 스쿨버스에 오르면 낮 동안의 노동에 더해 배 속이 채워진 터라 너나 할 것 없이 잠이 쏟아졌고 우리는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대주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그해 시월 하순쯤, 귀를 의심케 하는 뉴스가 들렸다. 거리엔 '호외'를 외치며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뛰거나 바닥에 놓고 파는 이들이 있었다. 새까만 색으로 대문짝만한 글씨가 보이고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열아홉 살 내 인생에서 대혼란의 장면이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대통령이 '박정희'였다. 그 이름은 곧 '대통령=박정희'가 수학 공식처럼 확실하고 믿음직스럽고 꼭 맞아떨어졌다. 내가 야간 특별학급에 다닌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말했다.

"월급은 월급대로 받고 밤에는 '공짜로' 공부시켜주는 게 모두 대통령(박정희) 은혜이구만."

스무 살은 눈 깜짝할 사이 섬광처럼 지났다

1980년 스무 살, 고등학교 2학년이 됐다. 평탄하게 학교를 다녔다면 대학에 들어갔을 나이었다. 야간 4시간 수업은 Y여상 본교 교사 혹은 같은 재단인 B여중 교사들이 담당했다.

과목 중에 수학은 지루했다. 초등학교 때부터도 그랬지만 특별학급에서조차 특별히 재미없었다. 어느 날, 수학 선생님이 새로 왔다.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건조한 첫인상의 여선생님. 칠판에 쓴 이름은 한○섭. 나와 같은 성이었다.

선생님의 첫인상은 좀 건조했다. 수학 선생님이라 그럴까, 라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20대의 젊음이 눈에 띄기보다는 뭔가 달랐다. 그 다르다는 것이 수학 공부의 방법에서가 아니라 수학과는 별개로, 아니 어쩌면 수학적인(?) 세상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1980년 5월이 지나고 있는 때였다.

선생님은 종종 툭 던지듯 말하곤 했는데 어떤 문장의 기억보다는 '세상의 진실' 이라거나 '의심해보는 힘' 등 뭔가 아리송하기만 했던 걸 제시했다. 잘 웃지 않은 선생님의 말은 장난 같으면서 진지했다. 나는 수학 시간이 끝날 때마다 문을 나서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선생님을 뒤따라가며 '아까 말씀하신 거 그게 무슨 뜻이에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생각뿐이었다. 선생님은 이상하고 불편했다. 오래지 않아 수학 선생님은 학교에서 보이지 않았다.

학교와 일터는 평안했다. '삼숙'이는 무사히 졸업을 했다. 진숙이는 원하던 대로 '공주간전'에 진학했다. 영숙이는 서울로 유학 온 남동생을 돌보며 회사 경리로 취업했다. 나는 국어 선생님 소개로 여의도에 있는 무역회사에 들어갔다. 스무 살은 눈 깜짝할 사이 섬광처럼 지났다. 가장 가까운 친구가 대학생이 되었다는 건 내게 자극이었다. 시간은 덧없이 지났다. 어느 날 우연히 신문에 난 기사에서 한○섭 선생님 소식을 접했다. 선생님의 '남친'이 민주화 운동으로 수배 중이라는 것.

무표정하던 선생님의 말, 세상의 진실과 의심해보는 힘에 하나를 더 보탠다면 '민주화 운동'이 아니었을까. 스물일곱 살에 난 대학생이 되었다. 퇴계로 명동 일대에 최루가스가 만연하고 학우들은 수업을 빼고 도로를 점검하는 때가 많았다. 오후가 되면 독재 타도를 외치는 군중이 나타나고 또 한 켠에는 최루탄과 지랄탄을 쏘며 거리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다.

세상은 진실을 말하던 사람들과 그것을 막으려는 사람들이 뒤엉켜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세상의 진실이 조금씩 드러나는 순간들 속에 나는 '계획'할 새도 없이 짧고 애틋한 청춘은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 세 번째 맞는 스물을 산다.

덧붙이는 글 |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나의 스무 살 세상을 고민하게 한 한○섭 선생님께 꽤 늦은 안부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도 그 이성적이고 건조했던 선생님 모습을 기억합니다. 선생님, 건강하십시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연도별 콘텐츠 보기